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2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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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6:15-21 고여있으면 망한다. 

1. 계속되는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나라이다. 아마도 그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할 정도로 탄탄했던 것 같다.

2. 그렇게 탄탄한 두로가 멸망하니  온 땅이 놀라며 떨게 된다 (16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너지는 그날에 섬들이 진동할 것임이여 바다 가운데의 섬들이 네 결국을 보고 놀라리로다 하리라"

3. 두로가 멸망한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다. 자신들만 생각하고, 자신들의 부와 명성만을 원했다. 죄에는 이런 힘이 있다.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을 못 가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스스로에게만 집중하게 하여 주저앉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다. 

4.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살게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복이 되어서 그 복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전하도록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었다. 

5.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신들이 복이 되는 것만 붙잡았고, 복을 전하는 사명은 버렸다. 두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에게 찾아온 부와 영화를 얻었으나 하나님 알기는 원치 않았다.

6. 고여있는 은혜는 머물러 있는 복은 결국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다. 이스라엘도 두로도 은혜와 복을 소유하려다가 넘어졌다. 먼저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이유는 그 은혜와 복이 흘러 넘쳐서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7. 나의 삶은 두로와 이스라엘 같지 않은가? 먼저 복을 받았고, 은혜를 얻었지만 고여있지 않은가? 흘러가야 하는데, 흘러 넘쳐야 하는데 여전히 내 안에서 나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8. 우리의 삶은 복의 저수지여서는 안된다. 축복의 통로여만 한다. 항상 다른 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을 향해 있어야만 한다. 선교사로서의 나의 삶은 태국인들과 성도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나의 삶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9. 고여있는, 멈춰있는, 닫혀있는 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흘러가고, 넘쳐나고, 열려 있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복음이 흘러 넘치는 삶이 되기 원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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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2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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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6:1-14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

1. 하나님께서는 두로에게 심판을 선포하신다. 두로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해 무역을 독점하며 큰 부를 쌓았다. 그들의 죄가 본문에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했던 것 같다.

2. 하나님께서는 두로를 심판하기 위해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사용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왕들 중의 왕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7절)

3.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믿는 자들만 사용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다. 

4. 두로는 한마디로 박살이 난다. “공성퇴를 가지고 네 성을 치며 도끼로 망대를 찍을 것이며" (9절) 죽고, 무너지고.. 14절을 보면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 라고 완전한 멸망을 이야기 한다. 

5. 주석을 찾아보니 이 부분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두로는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시고, 왜 그 말씀대로 집행하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다. 

6. 오히려 답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악한 자들이라도 심판을 지연시키시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 말이다. 물론 두로가 회개했다는 어떠한 근거도 본문 가운데는 없다. 

7. 하지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완전한 멸망을 피한건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런데 두로만인가? 내 삶도 결국은 두로와 같다. 완전히 무너지고, 파괴되어야만 하는 죄악이 가득한 삶이었다. 이러한 나의 삶에 주님이 찾아오셨고, 그 주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다. 

8. 두로와 나는 별 차이가 없다. 두로가 멸망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왜 말씀이 성취되지 않았는지를 의아해하지 말자. 매일 내 삶에 일어나는 기적과 동일하다. 죽어야 하는 내가 죽지 않고 지금 살아있지 않은가? 죄로 지옥가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는가? 비단 나 뿐인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태국인이 이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다. 

9.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그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기 원한다.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기 원한다. 유불리를 따지는게 아니라 긍휼한 마음을 가진 자로 섬기기 원한다. 두로를 보고 교훈을 깨닫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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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2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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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5:8-17 심판의 외침은 아직 회개할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다

1. 오늘 본문은 모압, 에돔, 그리고 블레셋이 받을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공평하다. 그들이 잘못 행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2. 그런데 그것에 하나님의 백성도 예외는 없다. 8절을 보면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 라고 말씀한다. 유다는 이미 심판을 선포 받았고, 유다와 같은 이방들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소돔과 고모라'나 ‘노아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그들의 욕심에 이끌리어 서로와 전쟁을 하게 하여 전쟁에서 패하여 망하게 하셨다. 14절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진노와 분노를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세상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4. 하나님은 심판하시면서도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원하셨다. 17절 하반부를 보면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명성에 목매시는 것 같아 보인다. 

5. 그런데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알려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 넓은 우주에서 먼지도 안되는 지구에 사는 일개 족속들에게..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적인 의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것이다.

6. 세상의 주관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 이유는 모든 민족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민족들이 주를 알고 주를 예배하고, 주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다. 

7. 심지어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까지도 그 분께 담당시키면서까지 말이다. 이 넓은 우주에 먼지도 안되는 우리가 뭐라고.. 그 분 자신이 오셔서 우리의 죄와 심판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셨을까? 그런데 그것이 복음이다. 

8. 복음은 심오한 진리이지만 단순하다. 모압, 에돔, 블레셋과 같은 우리가 (어쩌면 더한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데,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대신 죽어주셨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9. 심판의 외침은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끝이 이르기 전에 돌아오라는 것이다. 심판 속에서도 우리를 부르시는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만 나아가는 내가 되자. 그리고 이 선교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계속해서 동참하자. 그 하나님을 알리고, 외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말이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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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2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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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3:22-35 굳이 왜 나를? 

1. 하나님께서는 오홀리바(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도구는 그들이 사랑했던 나라들이다.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는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22절 하반부)

2.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잠시 잠깐 만족을 줄 수 밖에 없고, 결국은 없어서 사라져버릴 우상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우상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신할 것 같이 다가오지만, 결국은 우리를 망하게 한다. 

3.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예언하신다.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항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27절) 35절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4. 우상울 숭배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한 대가는 처참하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할 수 없다. 

5.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다시 말씀하신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6. 반드시 죽어야만 했던 우리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도록 한 죄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7.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역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리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굳이 왜? 란 질문이 떠오를만큼 복음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예수의 생명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8.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은 자로 해야 할 것은 이제 우상을 버리고 진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사랑했던 것들. 하나님보다 의지했던 것들이 모두 버리고 하나님만 하나님 되시는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삶으로의 초대이다. 그러한 풍성한 삶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9. 그 복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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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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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3:1-21 행음자에서 신부로

1. 본문에서는 행음한 두 여인의 비유를 들고 있다. 애굽에서 부터 행음을 한 두 여인이 있는데, 한 어머니의 딸이다 (1절). 두 여인의 이름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이다. 4절을 보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다.

2. 이스라엘은 늘 자신들이 특별히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영적인 특권들을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으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오홀라도, 오홀리바도 하나님 앞에서 행음을 저질렀다.

3. 5-10절까지는 오홀라의 행음이다. 그들은 앗수르 사람을 사모했고, 앱굽사람과 동침하였다. 11-21절 까지는 오홀리바의 행음이다. 선택받은 민족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는 더욱 더 무섭다.

4.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여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긴 이스라엘의 타락은 사마리아보다 더 심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과 행음하였다. 

5.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의 비유로 자주 설명한다. 행음도 그러한 관점에서 신랑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행음을 저지른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호세아서에서 더 명확하게 설명된다. 

6. 사마리아도 행음 하였고, 이스라엘도 남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행음하였다. 이것은 비단 어떤 민족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과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우리 모두의 삶이 이와 같다.

7.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홀라와 오홀리바와 같은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의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행음하고, 남편을 버리고 도망갔던 호세아의 아내 고멜과 같은 자들을 다시 신부로 불러 주신 것이 복음이다. 

8. 나는 누구인가? 오홀라요, 오홀리바요, 고멜일 뿐이다.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내 힘으로는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우리의 신뢰와 의지를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고해질 뿐이며, 행음을 반복할 따름이다. 죄악이 가득한 것이 나의 삶일 뿐이다. 다시 한번 죄인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늘 행음하던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신 하나님만 찬양한다. 그리고 그 분께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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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2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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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5:11-22 하나님만 신뢰하기

1. 시편 25편 전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자가 경험한 어려운 일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2.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친밀함을 쌓아간다. 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주님의 지도하심을 받음을 고백한다.

3. 14절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그와의 친밀하심 속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됨을 고백한다.

4. 이러한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외롭고 괴로운 상황이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어도 힘든 일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 힘든 일 중에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이야기 하고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5. 시편 저자는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보호해달라고 20-22절에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시편의 결론은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는지 혹은 그가 계속 그렇게 힘들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열린 결론이다. 

6.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기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문제를 해결하셨든지, 그를 더 강하게 하셨든지, 그의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주셨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새 일을 행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7. 문제를 바라보고 있으면 답답하다. 하지만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면 우리는 온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면 해결해주셨을 것이고, 우리가 더 강해져야 하면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이고, 새로운 참된 소망을 가져야 한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다.

8. 하나님은 언제나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속에서 우리를 그 분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내가 할 일은 그 분께 아뢰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는 것이다. 교회의 재계약 문제도, 아이들의 문제도, 내 자신의 문제도 그 분께 아뢰자. 그 분을 신뢰하자. 그 분께 소망이 있다.

9. 오늘도 샬롬


*추석 연휴네요 태국은 추석이 없어서 모르고 지나가고 있었어요.. 즐거운 한가위 되시고,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래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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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1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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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3:1-6 나는 그 분의 양인가? 

1. 너무나도 유명하고, 암송하는 사람도 많은 그런 시편 23편이다. 하지만 1절부터 막히기 시작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고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을 때는 오직 여호와가 나의 목자일 때, 그리고 우리가 양일 때 뿐이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니 그 분의 목자됨은 결코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내가 그 분의 ‘양'인가 하는 것이다. 

3. 양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목자가 이끄는 소리를 듣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 양이 목자의 음성을 분별한다고 한다. 귀가 발달한 것이다. 양은 들은대로 움직인다. 목자의 신호에 따라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첨부터 그러진 못했을 것이다. 훈련되었다.  

4. 그리고 양은 목자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목자의 음성을 믿고 그가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이 ‘양'이다. 자기 생각을 따라 가지 않는다. 그저 이끄는 곳으로만 간다.

5.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무능하시고, 하나님이 목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분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하는 양이 아니어서가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이시기 때문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가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해도 주신다. 

6. 하지만 때로는 그 ‘전적인 신뢰'로 들은 음성을 따라 움직일 때에만 보여주시는 것들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점검해야 할 것은 내가 정말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대로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순종하며 움직이는 양인가? 라는 질문이다. 

7. 나에게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하지만 내 길을 가장 잘 아시는 분께 묻고, 듣고, 그 분께 구하며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의무도 강제도 아닌 믿는 자로서의 나의 특권이다. 

8. 내가 그 분의 양으로서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부족함 없다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내가 원하는데로 간다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내 삶의 전부이시기 때문에 그 분으로 만족하며 그 분이 인도하시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믿고 걸어가는 길임을 의미한다.

9. 수쿰빛 언약교회의 재계약문제도.. 또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도 내가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양으로 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혹시 내 눈에는 아닐 지라도) 가장 좋은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분의 양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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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1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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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2:1-11 상황과 감정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자

1. 삶의 어떤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그 위대한 다윗도 그랬던 것 같다. 

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절) 하나님이 침묵하시니 이내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3.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6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우리의 존귀함을 찾을 길이 없다. 다른 우상들에서 찾든지 혹은 자기 비하를 하게 된다. 

4. 하지만 9절부터 다윗의 마음은 바뀌어 자신을 모태부터 택하시고, 붙잡아 주신 하나님을 부르며 11절에는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 

5. 하나님은 사실 늘 우리 곁에 계신다. ‘임마누엘'의 약속을 우리 모두는 받았다. 하나님이 침묵하는걸로 느껴지는 그 시간은 사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여러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시간인 것 같다.

6. 다윗도 인생에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은 다윗도 자신 안에 그 하나님마저 자신을 버리시면 어떻하냐? 라는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다. 다윗은 하지만 결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우상을 섬기지도 않았고,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지도 않았다 (밧세바 사건을 제외하고는…)

7. 9-11절이 다윗의 위대함인것 같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느껴지지 않더라도 진리를 붙잡는다. 진리는 내가 느껴야만 진리는 아니다. 진리는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진리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이다. 

8. 상황에 휘둘리고, 감정에 휘둘려서 진리를 오해하지 말고, 다윗과 같이 그 어려운 시간 속에 진리를 붙잡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보다 우리의 교회와 선교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9. 오늘도 샬롬


* 오늘 특별히 기도를 부탁드리는 것은 수쿰빛 언약교회가 현재 코로나로 인해 교회 건물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건물 이사회에서 월세를 많이 올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 상황을 이야기를 했는데 잘 이야기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9월 안에 재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교인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주실 것은 1. 하나님께서 건물 이사회의 마음을 돌려 주셔서 월세를 올리지 않고 재계약 할 수 있도록, 2. 1번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재정을 공급해주셔서 계속 도시 사역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입니다. 저희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영접한 사람의 숫자가 벌써 8명이 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선한 방법으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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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1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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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8:23-31 어디에 권위를 두는가? 

1. 사도행전의 마지막이다. 바울은 로마에 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에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찾아왔다. 

2.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구약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3절)

3.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음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왜일까? 성경은 그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졌다고 말한다 (27절)

4. 이 표현이 ‘너무나도 강한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으로 복음의 진실된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임을, 그리고 메시아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실 자신들만의 메시아라는 생각이 너무 강했다.

5. 그 결과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 선입견이 깨지지 않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비단 이스라엘 만의 문제인가?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이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시는 것은 틀렸다.

6.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 보다 자신들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겼고, 그 교만함이 복음을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옳고, 하나님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은 우상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해야지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에 둬서는 안된다. 

7.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확신과 선입견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그것과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은 잘라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일지라도… 나의 삶에 이러한 태도는 없는가? 

8.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혹은 더 높은 신뢰를 두고 있는 것이 혹시 있지 않는가? 때로는 경험이고, 때로는 내 생각과 지식이고, 때로는 재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틀렸다. 이스라엘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우상이 아니하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내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9.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다시 한번 내 안에 내가 만든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 분께 모든 권위를 두기 원한다. 사역에서이든 삶에서이든 마찬가지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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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9. 1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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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7:27-44 보이지 않지만 지키시는 하나님

1. 사도 바울을 실은 호송선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고, 이제는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다니고 있었고, 희망은 육지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27절)

2. 사공들은 도망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꼬 (31-32절), 바울은 그들에게 아주 단언적으로 이야기 한다.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34절 중)

3.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이제 먹기 시작한다. 배의 여행이 시작될 때 바울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던 것과 대조된다. 그리고 배가 이제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 도달하였다.

4.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 도망갈까 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백부장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바울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43절). 이는 백부장의 행동이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기도 했다. 

5.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보호하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만물(신자도 불신자도 자연만물도 다 포괄되는)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다. 

6. 바울은 광풍속에서도, 14일이 넘는 표류 상황에서도 생명을 구하였고, 그는 그가 소원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대로 결국 로마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7. 때로는 우리의 삶에 유라굴라같은 광풍이, 14일을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실제로도 일어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 보이지 않은 손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계신다. 

8.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준 까마귀처럼(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누가 이렇게 했겠는가?) 우리 삶을 나도 모르는 사이, 나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수 많은 도움을 받으며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9. 삶의 풍파도,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말자. 보이지 않아도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지키고 계신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 바울처럼 신뢰함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 된다. 딱 한 발자국씩만 걸으면 된다. 그렇게 오늘도 한 걸음 내딛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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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