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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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8:26-40 순종을 통한 주님의 일에 참여함

1. 주의 사자가 빌립을 남쪽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인도하였다 (26절) 그런데 그 길은 광야였다. 빌립에게는 많은 질문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 가야하는지, 광야에 무엇이 있을지…

2. 지금처럼 구글맵도 없고, 핸드폰도 없는데 그 넓은 광야에 왜 가라고 하시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립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갔고,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를 만나게 된다. 

3. 순종할 때, 주의 계획을 만나게 된다. 내 의문과 내 생각을 넘어 순종할 때, 내 생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분의 계획 가운데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 내시는 이사야 말씀을 읽고 있었고, 빌립은 그 말씀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30-38절).

4. 주의 사자의 당황스러운(?) 음성에 순종하였을 때, 한 영혼이 구원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어쩌면 우리 삶에 쉽게 일어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빌립과 같은 적극적인 순종일 것이다.   

5. 말씀에 순종을 하였더라도 빌립과 같은 결과를 바로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여전히 순종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내가 순종했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꼭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6. 만약 빌립이 순종하지 않아 가지 않았다면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보내어 복음을 듣게하셨을 것이다. 나의 순종의 여부는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7. 하지만 내가 순종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순종하여 태국에 오지 않았더라도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다른 선교사나 믿는 자들을 통해 복음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주의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하게 해주셨고, 우리 교회 성도들과 교제하며 섬기게 해주신 것과 마찬가지이다. 

8. 우리 모두는 순종을 통해 주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이다.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 예배, 묵상 등을 통해 우리는 늘 순종해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이며”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불순종보다 순종을 택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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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2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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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54-8:3 율법의 계명과 정신

1. 유대인들이 돌로 스데반을 쳤다. 스데반의 말은 맞았지만 그들이 여태까지 쌓아왔던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은 스데반에게 마음에 찔리지만 귀를 막고 달려 들었다 (54, 57절).

2. 그리고 그들은 마음에 걸리지만 율법을 또다시 지켰다. 하나님을 모욕한 자를 성 밖에서 돌로 쳐 죽인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 그 이상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였다. 

3.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리는 가책을 받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한다. 가지고 있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4. 오늘 본문과 같이 열심으로 말씀과 믿음을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우리 자신과 양심을 속이는 일들이 종종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율법인가? 내가 가진 기득권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으로 알게 된 진리인가? 율법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인가? 

5. 스데반은 그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았고 그래서 그는 오히려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였기에'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선택하고, 끝까지 그들에게 잘못을 돌리지 않는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60절)

6. 율법을 지키게 되면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되는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게 된다. 다른 사람을 죽도록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 내 자아가 죽이려고 애쓰게 된다. 

7. 유대인도 스데반도 동일하게 율법을 지켰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의 계명을 지켰고, 스데반은 율법의 정신을 지켰다. 같은 율법을 지켜도 계명을 지키게 되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게 된다. 율법의 정신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나는 죽고, 그 분이 사시게 된다.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고, 사람들이 자유를 맛보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

8. 나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 정신을 지키고 있는가? 율법으로 사람들을 얽매이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살리고 있는가? 태국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고 싶다.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얼마나 헌신했는지가 그들을 바라보는 척도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9. 율법의 정신인 사랑으로 살리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복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율법의 계명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으로 바라보게 된다. 오늘도 복음 안에서 나의 정체성이 세워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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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1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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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44-53 절망적인 나를 넘어 그리스도께로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만났다. 하지만 그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러한 생각은 자신들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게 되었다.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 다윗의 의도는 매우 좋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허락하셨지만 크신 하나님을 성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가두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3. 오늘 스데반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논증한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48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49절) 하나님은 가장 크신 분이시다. 

4. 하나님이 가장 크신 분이시라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 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분을 거역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1절)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까지 못 박았다. 

5. 하지만 그것이 비단 이스라엘의 모습만은 아니다. 바로 나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알기에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고, 스데반은 지금 그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 

6. 우리는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도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그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또 오늘 본문처럼 스데반과 같은 사람을 통해 우리와 같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계속 말씀해주고 계신다.

7. 들을 것인가? 듣지 않을 것인가? 목과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 물론 내가 할례를 받겠다고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일 따름이다. 하지만 내가 어느정도 절망적인지를 아는 것이 내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지를 안다면 그제서야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게 될 것이다. 

8. 내가 할례 받아야 할 사람임을 모른다면, 내가 성령을 항상 거역한 사람임을 모른다면… 결국은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다. 나의 오늘의 삶이 혹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은가? (100%이겠지만) 혹은 하나님을 내가 정한 모습, 내가 정한 공간으로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9. 오늘도 그래서 내 자신의 악함과 절망을 깨닫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다. 그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원한다. 성령과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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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1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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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1-16 신뢰하며 기다리기

1.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원하는 타이밍,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약속은 하나님의 시간을 반드시 기다려야만 한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설교를 하는데,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약속, 요셉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보자면 지금 몇 대가 지났지만 여전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받지도 못했다. 

3. 5절을 보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약속만 있었지 땅도 자녀도 없었다. 

4.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 중 야곱이 12아들을 낳았다. 야곱의 때에 이르러 비로서 후손의 약속이 조금 더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땅은 없고, 그들은 오히려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요셉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5.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신경이나 쓰시는지 고민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미리 보내셨고,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나갔다. 우리 인간의 근시안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그 분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

6.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비슷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관심이 있으신건지? 도대체 이 팬데믹은 언제나 끝이 날건지.. 태국 선교사로서 내가 줌으로 하고 있는 일들이 의미가 있는건지… 나의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보고 판단할 때가 있다. 

7.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약속의 가장 중요한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경험하고,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고 계시지 않은가? 

8.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재단하지 말자. 내 계획으로, 내 시선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오히려 말씀 속에서 그 분을 찾고, 그 분의 계획과 그 분의 약속을 계속해서 발견하며 견디고, 인내하고, 혹시 내 때에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 징검다리를 잘 놓는 사람이 되자. 

9. 조급하지 말고, 충성되이 살아가자. 보이지 않아도 일하시는,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만 붙들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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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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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6:1-15 사명을 위해 하는 일들

1.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의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는 결국은 먹을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1절).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실수였다.

2. 사도들의 대책은 이 일을 섬길 수 있는 적절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매우 높았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 기준이었다. 쉽게 찾기 힘들것 같은 사람이 7명이나 세워졌다. 

3. 사도들이 그렇게 한 것은 자신들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더 중요한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함이었다. 사도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4절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4. 과부들을 구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찌 중요하지 않을 일이랴.. 하지만 사도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더 큰 사명에 집중하고, 그 외의 일은 은사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맡겼다. 

5.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달려갈 길이 어느 영역인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면을 다 잘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집중할 것에는 집중하고, 필요한 부분에는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섬기면 된다. 

6. 또 그렇게 사람을 세워줘야 그 사람 가운데서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나의 사명을 잘 알고 집중하고 있는가? 사람을 세우기에 앞서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나의 사명과 가야할 방향이 선명해야 한다.

7. 사도 바울의 고백이 떠오른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오늘 사도들과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았고, 그것을 붙들었다. 그래서 집사들을 세운 것이다.

8. 나의 사명 또한 사도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태국 땅에 서 있지 않은가? 물론 사도 바울과 사도들과 비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만 말이다. 그 사명을 위해 오늘도 달려가기 원한다. 사람을 세워야 하면 세우고, 격려하고 가르쳐야 하면 그렇게 하며 오늘을 달려가기 원한다. 오늘은 목양팀 미팅과 능 형제 성경공부를 줌으로 해야 한다. 계속해서 사명을 위해 달려갈 수 있는 나와 수쿰빛 언약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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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1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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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5:27-42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증과 이유가 되는 삶


1. 사람들은 제자들이 인싸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을 인싸로 만든 분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한다 (27절). 하지만 사도들의 대답은 결연하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29절)

2. 이러한 사도들의 태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화가 났고,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33절). 그 때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나와서 그들을 설득한다. 38-39절을 보면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3.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은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고,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래서 채찍질하고 사도들을 풀어준다 (40절). 이 일은 기독교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이다. 

4. 그렇기에 사도들은 매를 맞으면서도 죽임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나니라" (40절).

5.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가게 되어 있다. 약속의 자녀를 죽이기 위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이방 왕들이 유다 왕의 혈통들을 죽이려고 시도했고, 헤롯의 영아살해 등등.. 하지만 약속의 자녀는 끝까지 이어졌고, 예수께서 약속대로 오셨다.

6.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 땅의 썩어질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 일을 할 것인가? 42절을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7. 그 일은 기쁨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붙잡혀서 구금당해야 했고, 매질 당해야 했고, 때로는 능욕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리를 향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항해 걸어갔다. 하나님 한 분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단 한번 밖에 없는 삶의 보증이요, 이유였다. 

8. 나의 삶도 사도들의 확신과 기쁨이 있기를 원한다. 이 길을 걷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한번 뿐인 삶의 보증이요, 이유가 되시는 그런 삶 말이다. 사도들에 비하면 나의 삶에는 고통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기껏 고민하는 것은 건강, 재정, 자녀 등 개인적인 문제 밖에 없지 않은가? 

9.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내가 되고 싶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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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14.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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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5:12-26 아싸의 삶

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이 정리되고 나서 교회는 더욱 더 정금과 같이 단련된 것 같다.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가 더 많이 일어나고 믿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다 (12절).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 마음으로 모인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2절)


2. 그들은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3절). 백성들이 그들을 칭송할 이유는 아마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했던 착한 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자들을 고치고, 돌보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칭송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3. 하지만 계속해서 기적들은 일어났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혀지면 병이 나을까 하여 병든 자들을 베드로 옆으로 데려가기도 하였다 (15절). 그리스도 인들이 요즈음 말로 하면 인싸(인사이더, 내부에 있는 사람으로 인기가 많은 사람)가 된 것이다. 자신들도 놀랬을 것이다. 


4. 하지만 그들이 인싸가 되려고 인싸의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싸(아웃사이더,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하였는데 인싸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을 하였고,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 갔기 때문이다. 


5. 기독교는 계속 아싸의 길을 걸어왔다. 물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인싸의 길을 걷긴 했지만 진짜 거룩한 영성들은 항상 아싸의 길을 걸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셨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요한이 그러하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나아간 중세의 수도원들,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만 붙든 종교개혁자들, 자신의 편안함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아간 선교사들 등등..


6. 그 누구도 인싸가 되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좁은 길, 낮은 길로 가려고 했던 사람들이 믿음의 영웅, 인싸가 된 것이다. 어제 본문을 보면 인싸가 되려고 자신의 땅을 팔았으나 그 돈을 숨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오히려 죽음을 당했다. 


7. 인싸가 되려고 하지 말고 좁은 길, 낮은 길로 걸어가려고 하자. 그 길에 생명이 있고, 그 길에 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길로 걸어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혹 인싸로 살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아 주실 것이다. 


8. 오늘 인기를 추구할 것인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못해도, 이해해주지 못해도 선을 행하고, 사랑하며 아싸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어떠한 선교사로 오늘을 살 것인가? 가끔 한국에서 우리 가정을 정말로 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그 순간의 당혹감이나 외로움이 몰려 올 때가 있다. 


9. 하지만 잊혀지는 것이 선교사의 사명 아닌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는 것이 우리 선교사의 사명이 아닌가? 그 사명을 붙들고 아싸의 길을 오늘도 걸어갈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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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7. 14.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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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4:32-5:11 사람을 위해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자

 

 

1. 오늘 본문에서는 같은 공동체 속에서 두 가지의 상반된 모습이 나온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첫 번째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32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아주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요약을 지키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하지만 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자신의 것들을 내어주는 공동체 안에 악한 생각이 들어왔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시도였다.

3. 바나바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두었다 (37절). 그의 행동은 아주 파격적이었고, 복음적이었다. 서로 물건을 통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교회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과 같이 말이다.

 

4.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기록이 뒤에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바나바의 헌신을 본 것 같고, 바나바는 모든 값을 사도들에게 주었으나, 이들은 소유를 팔아 얼마간 감추고 일부만 사도들 앞에 내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고 싶었으나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내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 그래서 이 부부는 죽게 되었다. 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헌신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을 보신다.

 

6.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돈이나, 드러나는 그 무엇, 선해 보이는 행동을 드리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드리길 원하신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이 결국 말로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7. 오늘 나의 마음은 어떤가? 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사람을 속이려고 하지는 않는가? 좀 더 거룩해보이는 말투, 거룩해보이는 행동(?) 등등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마음에서는 무엇이 나오는가?

 

8.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간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도, 거룩해 보이기 위함도 아니다. 오직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고치실 수 있는 그 분께만 나아간다. 살기 위해서이다. 회복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쉼과 회복이 있기를 원한다. 사람을 위해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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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1-26 탁한 거울과 같은 나의 변화는 회개와 돌이킴에서 나온다 (특별기도부탁)

1.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고쳐 걷게 하였다. 한 마디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들고 모여들게 만들었다 (11절).

2.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 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2절) 베드로는 알았다. 자신이 한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3.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보다 그 통로로 사용하신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베드로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증언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6절)

4.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은 중요하다. 특별히 개인 경건은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대신하거나 그 분과 비교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통로일 뿐이고, 우리는 그저 그 분의 영광을 비추는 탁한 거울일 뿐이다. 

5.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누군지 알았기에 예수를 강력하게 증언할 수 있었다. 내가 드러나려고 하고, 내가 한 것 같고, 내가 무엇인가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 때 부터 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반사할 수도 없는 더럽기 그지 없는 그저 탁한 거울에 불과하다.

6.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한다. 결국 능력은 나의 경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킴에서부터 나오며, 예외는 없다. 

7. 삶도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저 탁한 거울임을 잊지 말고, 회개와 돌이킴이 계속해서 내 삶에서 있기를 원한다. 사역이 되어지고, 사람들이 변화하는게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통로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능력임을 절대로 잊지 말자. 

8. 오늘도 샬롬

* 혹시 뉴스에서 보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6일 새벽에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 인근의 플라스틱 공장이 폭발하면서 심한 유해가스가 분출되고 2차 폭발이 우려되어 처음에는 반경 5키로 주민들 대피, 오후에는 반경 10킬로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고, 저희 가정도 이틀을 다른 곳에서 대피를 하고 왔습니다. 화재는 진압이 다 되었지만 특별히 저희 가정과 저희 교인들 중 상당수가 반경 5-10킬로 이내에 살고 있어서 유해가스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또한 태국은 요 몇 일 계속 6천명 대의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다가 오늘은 결국 7천명이 넘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인원의 절반에서 2/3는 방콕에서 발생한 환자입니다. 또한 백신 수급이 늦어지고 시노백, 시노팜 등의 중국산 백신들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저희 가정과 수쿰빛 언약교회, 그리고 태국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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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15-26 순종이 목적인 질문

1. 이스라엘에 있어서 12 지파를 상징하는 매우 상징적인 숫자이다. 가롯 유다가 죽었을 때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서상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2. 추천된 두 명의 인물은 복음서에서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22절을 보면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세워…"라고 기록 되어 있다. 복음서 본문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쫓아다니고, 12제자에 들지는 못했지만 무척이나 헌신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3. 제자들이 두 사람을 추천한다. 한 사람은 요셉이고, 한 사람은 맛디아이다. 요셉이 더 유력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름도 먼저 기록되었고 그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하다.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3절)

4. 기도하고 제비를 뽑았지만 (24절) 어쩌면 제자들의 의도는 요셉이 뽑히길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는 맛디아가 뽑혔고,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되었다 (25절). 제자들이 내심 바라고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5. 하지만 성경에는 어떠한 분쟁도, 다툼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더 신뢰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태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6.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내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일하심도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내 머리로 이해되면 오케이이고,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정말 그럴까?의 의심하는 태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7. 내 생각과 달라도, 내 이해와 달라도 그 분의 뜻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내 뜻을 정해놓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뜻을 덧입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8. 순종이 목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 내 생각을 강화하고 확고히 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정말로 듣기 위해 질문하고 순종하기 위해 질문하고 싶다. 하나님을 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말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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