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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6:19-32 복음과 복음의 결과

1. 바울은 자신이 알게 된 복음이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하고 아그립바 왕에게 말한다. 복음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부터만 나온다. 

2. 그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20절이다.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복음을 들은 자의 반응은 이와 같아야 한다. 

3. 먼저는 회개를 해야한다. 복음을 듣고 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서의 반응은 회개에 합당한 일이다. 이것은 어떤 사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복음을 들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의 반응일 것이다.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면 이 두 가지 반응이 꼭 있어야 한다. 회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삶. 바울은 이러한 복음의 깨달음 위에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빛을 전하는 것이다 (23절)

4.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메시지는 당연히 미친 것 처럼 들린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24절) 하지만 바울은 결코 미치지 않았고, 나도 결코 미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5.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알게 되기를 원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9절)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누리는 평안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원했다. 이 마음이 바울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6. 복음을 알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정돈되어 샬롬을 누릴 때,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대충 내 맘대로 죄 가운데 살면서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살게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7.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러나야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다. 그 삶이 없이는 안 그래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복음 조차도 의심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특히나 기독교에 적대적인 지금 시대에는 말의 복음이 아니라 삶의 복음만이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8. 복음은 상식적일 수 없다. 파격적이고 믿기 힘든 사랑이다. 하지만 복음에 합당한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상식적이어야만 한다. 그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과격한 사랑 밖에 없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상식적이나 파격적인 사랑을 보여줄 때, 삶의 예배와 삶의 전도가 시작될 것이다. 내 삶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9. 복음에 합당한 삶을 맺기 위해서는 당연히 복음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복음을 깊이 알고 그 사랑을 경험할 때에만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내 삶이 오늘도 그렇게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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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3:31-24:9 더둘로의 나를 향한 고발

1.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해 천부장을 통해 호송된다 (31-32절). 하지만 총독은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면 그들의 고발을 듣겠다고 말한다 (35절).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호사 더둘로를 데리고 와서 바울을 고발한다 (1절). 그들은 먼저 벨릭스를 칭송하는 것으로 고소를 시작한다 (3절).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해석했던 것 처럼 그들은 항상 로마로부터 독립을 원했다. 

3. 하지만 오늘의 그들은 그들의 목적(바울을 죽이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원수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3절).

4. 그리고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지금 이 표현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감염을 일으키는 전염병 바이러스 같은 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5. 더둘로의 고발은 사실이었다. 바울은 전염병 같은 자가 맞았다.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진리와 불의가 충돌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이 율법과 충돌하였다. 더둘로가 틀린 것이 있다면 바울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자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을 퍼트리는 자였다. 

6.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실 바울과 같아야 한다. 가는 곳 마다 진리가 드러나야 하고, 사랑이 들어나야 한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요즈음 시대에서 기독교는 그 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정말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전염병 같은 자'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다. 

7. 왜 그럴까? 우리가 복음이 아니라 다른 것에 집중하기 때문인 것 같다. 복음은 화목하게 하고, 담을 허무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우리들 만의 담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화목과 화평이 아니라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게 하고 있는게 아닌가? 

8. 더둘로의 고발을 보며 지금 나의 삶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복음에 더욱 더 집중하기 원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전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결국은 그 복음이 내 안에 가득해야한다. 복음이 나를 빚어가야 한다. 전염병이 아니라 향기가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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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3:12-30 죽이는 자와 살리는 자의 차이

1.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온다. 죽이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 죽이려는 자는 유대인들이고, 살리려는 자는 바울의 생질과 천부장이었다. 

2. 먼저 유대인 40명은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 이렇게 맹세한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2절)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을 망친다고 생각하는 바울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3. 이들을 보며 근본주의 이슬람과 다른게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고, 소란이 일어나면 그가 죽는게 당연한 것인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사상이 보인다. 그들에게는 지금 사랑은 없고 판단만 남았다. 

4. 하지만 살리려는 사람들도 있다. 바울의 생질이 이 소식을 듣고, 천부장에게 가서 바울을 구하고자 한다. 바울의 생질은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천부장은 그저 상황을 듣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 사람이었다. 

5. 천부장이 보기에도 바울이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29절) 물론 바울이 로마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합당한 이유가 없는 한 로마 시민의 자유는 지켜져야만 했다. 

6. 나의 마음은 혹시 유대인들과 같지 않은가? 나의 생각과 관점과 다르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봐주기 보다는 ‘왜 저렇게 생각하지?’ 라며 그를 다르게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는가? 실제로 죽이지는 않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마음으로 살인하는 자라는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7.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로 살아야 한다. 살리기 위해서는 결국 바울의 생질과 같아야 한다. 가족으로 사랑한 것이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었으랴? 결국은 사랑이다. 

8. 판단은 사람을 죽이게 되지만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흠 많고, 판단받을 만한 존재였는가?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치 않으시고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죽으셨을 때 사도들과 같이 바울과 같이 사람을 살리는 자들이 나오지 않았는가? 

9. 사랑이다. 사랑만이 사람을 살린다. 오늘도 그 예수의 사랑이 나를 살리고, 나도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사랑이 모든 것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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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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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2:9-29 증인의 사명

1. 사도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 받은 일에 대해서 다시 나누고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렇게 바울이 자신의 부르심과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부분들이 몇 부분 된다. 반복되는 느낌이다. 

2.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일을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의 부르심을 따라 하는 일이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5절) 그를 부르신 것은 그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3.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의 과정과 예수 그리스도, 곧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계속해서 나누는 것이다. 증인의 삶은 나의 생각이나 기준, 감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증인은 반드시 그/그녀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나누어야만 한다.

4.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았다.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가 반복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계속해서 나누었다면 기록되지 않은 그의 자신의 보고 들은 것을 나눈 것은 얼마나 더 많을까? 그리고 그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변화했는가? 

5. 우리 모든 믿는 자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믿는 자의 부르심을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는 더욱 더 이 증인의 사며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 생각을, 내 감정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다. 오직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다. 

6. 바울은 단순히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하지 않았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계속 숨기고 있다가 이제서야 밝히고 있다 (25절). 그가 가진 자원과 상황을 최대한 복음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7. 그가 로마 시민임을 빨리 밝혔다면 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간증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재판을 통해 복음 전할 기회를 찾았고, 이제서야 그가 로마시민임을 밝히고 있다. 증인의 삶은 복음의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는 단순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하고, 또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지혜로와야 한다. 

8. 나는 사도바울과 같이 가장 단순하게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혜롭게 전하고 있는가? 복음에 다른 것을 첨가하지 않기를 원한다. 오직 보고 들은 것만 전하기 원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지혜롭게 잘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잘 연구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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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2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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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1:1-16 사랑이 이끌어 가는 삶

1. 바울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예언한다 (4절).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했다.

2. 그렇지만 그들과 인사한 이후에 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와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을 예언했다 (11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바울이 가서는 안된다고 권하고 있다 (12절).

3.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뜻을 거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13절)

4.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제자들, 그리고 예언자 아가보 모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어려움을 겪고 죽을 수도 있을 거라고 예언하며 말린다. 나라면 이러한 순간에 갈 수 있었을까? 두렵기도 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사람도 있고…

5. 나 같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을 것 같다. 그를 갈 수 있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 바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 두 개를 지키고 있다. 

6.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 사랑이 그를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예언도, 예언자의 예언도 물리치고 자신을 만류하는 사람들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사랑의 동기가 아닌 그 어떤 것도 죽음 앞에서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7. 고전 13:13에 나오는 말이 진실로 진실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하나님에 대해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다면 어쩌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닐수도 있다. 

8.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 사랑으로 나는 이웃을 섬기고 나의 시간과 재정을 내어놓고 있는가?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가? 어쩐 질문에도 쉽사리 ‘네'라고 대답하지 못하겠다. 옆에서 찡찡 거리며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는 요엘이조차 제대로 품지 못하는게 나 아닌가? 

9.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을 받음에서 나오게 된다. 결국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사랑을 받아야먄 사랑할 수 있다.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나의 존재일 뿐이다. 사랑받았음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경험하여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 태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또 우리 가족들에게..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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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2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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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0:28-38 좋은 리더의 덕목

1. 사도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 권면을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첫 번째 권면은 ‘삼가라'였다 (28절). 하나님께서 장로들을 세워 자기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으니 이리가 들어올 때 삼가 양들을 삼가 지키라는 것이다 (29절). 

2. 두 번째 권면은 자신의 눈물의 훈계를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쉬지 않고 눈물로 가르친 바른 말씀을 기억함으로 다른 이들을 든든히 세우라고 권면한다 (31-32절).  그리고 바울이 말한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하고 권면한다. (35절) 그리고 그 바로 앞 구절에는 깨알같은 바울의 고백도 나온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준 것과 같이" (35절)

3.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보여준 모범을 에베소 장로들이 따라오길 원했고, 그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정말로 좋은 리더의 모범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태도를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4.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깨달았고, 복음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라가려고 하였고, 또한 자신이 섬기고 있는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고 그 이상의 것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리더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참 어려운 말임이 틀림이 없다. 

5. 말씀을 가르치다보니 어쩌다 확진자와 접촉한 가족을 만나게 되어 지난 3일을 예준이와 한 방에서 격리를 하였다 (다행이 접촉한 분이 음성이어서 조금 전에 격리해제 하였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말씀 속에서 요 몇일 성도들이 성경읽기에 거의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내가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6. 온라인 성경읽기사역은 다음 리더들도 세워가고 있고, 잘 진행되는것 같았는데 왜 요즈음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것일까? 라는 고민에서 시작되었는데 결국은 성도들을 마음으로 평가하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지금 페북에 글은 올리고, 라인방에 채팅은 하면서 어찌 성경은 안 읽으러오지? 라는 생각으로 판단하였던게 생각났다. 

7. 마음이 너무 조급한 선교사이다. 겨우 한달 해놓고… 그들이 나를 따라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좋은 리더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바울은 3년을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사람을 세우고도 자신이 한 것 이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급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계속해서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 

8.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씀을 보고 적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설교해야하는지 등등을 보여주고 그들을 격려하는게 나의 역할이란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 아니다. 바울과 같은 모범을 보여줄 수 있도록 내 자신을 점검하고, 복음 안에서 더욱 더 자라가자. 

9. 오늘도 샬롬 

*3일간 격리중이었습니다. 3일만 격리했음에 감사하고, 좁은 방에서 나오니 참 감사하네요.. 늘 기도에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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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2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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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9:8-20 말씀을 통한 삶의 변화

1. 바울은 회당에서 전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만 말하는 작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 오히려 죄로 인해 망가졌던 온 세상 모두가 회복되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큰 기쁨의 소식이다. 

2. 하지만 온 세상의 회복이라는 큰 소식은 우리와 상관없는 듯한 큰 일만 말하고 있지 않다. 작디 작은 우리 개개인의 회복을 포함된다. 12절을 보면 바울은 병든 사람의 병을 낫게하고, 악귀도 떠나가게 한다. 

3. 그리고 우리가 섬기던 우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18-19절을 보면 마술을 섬기던 이들이 그 책을 모아 불사른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4. 18-19절을 보면 에베소에서 마술이 얼마나 유행했었는지를 보여준다. 회개하여 불 태운 책 값만 은 오만이었다. 회개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의 책까지 생각한다면 그 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유행이 아니라 진리로 돌아오게 만든다. 

5.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었는데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둘 중에 하나이다. 복음이 가짜이거나 내가 그 복음을 제대로 믿지 않았거나.. 그런데 복음은 가짜일 수 없다. 바울을 비롯하여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서 변해왔다.

6.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니라 ‘나'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은 ‘나'의 문제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복음으로 인해서 정말로 변화받은 사람인가? 태국 형제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가장 마음이 어려운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7. 나는 그들에게 변화받야 한다고, 우리가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도 달라져야 하고, 우리의 착한 행실은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표지판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정작 나의 삶도 내가 어쩌지 못하고, 연약하기 그지 없다. 

8.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변화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변화받는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9절 하반부). 꾸준히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나에게 계속해서 적용해야 한다. 

9. 내 삶에서도 오늘 말씀처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0절)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는 일이 일어나기 원한다. 말씀이 삶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말씀의 권위로 살아가는 날이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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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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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8:12-23 사명을 따라 묵묵히

1.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1년 반을 가르친다. 오늘 말씀은 그 이후의 사건이다. 바울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고소를 당하여 갈리오 총독에게로 끌려간다. 

2.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제 본문에서 약속하신 것과 같이 그 고소는 갈리오 총독으로 인해 취하된다. 바울이 실제로 법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다면 법정에서, 언어와 명칭, 유대인의 법에 관한 것이면 스스로 처리하라고 말한다 (15절).

3.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총독을 통해 바울을 구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용하시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타나심만 해도 힘이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며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4. 하지만 바울은 이루어진 그 일을 보고 이제 고린도를 떠나야 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20절). 자신의 사명과 가야할 길 때문이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왔고, 에베소에서 안디옥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한다. 

5. 고소와 비방을 당하고, 매를 맞고 하는 시간들 속에서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이 해야 할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를 둘러싼 세상은 소란하고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도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흔들어 대지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따라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6. 그러한 바울의 사역은 23절을 보면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명을 따라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사람들이 세워진다. 사명을 따라 묵묵히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 

7. 코로나로 인해 세상은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다. 때로는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이 때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사명을 점검하고 사명을 따라 묵묵히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세워진다.

8. 코로나로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온라인 모임은 더욱 더 많아졌다. 거의 매일 줌미팅으로 사역별 모임, 양육, 성경공부가 있다. 매일 밤 성경도 읽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 내가 묵묵하게 해야 할 일들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각자가 섬기는 일들로 인해 사람들이 세워질 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더욱 더 사명을 따라 걸어가자. 주께서 일하실 것이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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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1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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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8:1-11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

1.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고, 함께 살며 일을 같이 하며 전도를 하였다 (1-3절). 매우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동역자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듣지 않았다. 

2.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리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6절) 바울의 실망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바울의 이 말은 단순히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3.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 하지만 바울은 동족들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인해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도 복음을 들으면 가족들에게 친한 친구들이 먼저 생각나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의 거절과 비방으로 바울은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옷을 터는 행위는 이제 나와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렇게 실망한 바울에게 하나님은 깊은 위로를 보내주신다. 

4. 9-10절 말씀이 그 위로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과 이 성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이다.

5. 유대인이고, 헬라인이고 다 바울에게 대적하며 비방하는 것 같았지만 이 성 안에는 자신들의 동족들과 이방인들인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이다. 즉, 바울이 전한 복음에 반응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6. 보이는 것은 대적하고 비방하는 무리들이었지만 복음은 그렇게 전해졌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많다는 말씀이 전도자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바로 가지 아니하고 성에 일년 육개월을 더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11절). 

7.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실적을 요구하고, 보이는 결과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아도 성장하고, 확장된다. 매일 밤 10시에 성경읽기를 그동안 온라인으로 하면서 어떤 날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기쁘기도 하였고, 어떤 날은 두세명이 읽기에 낙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혼자만 읽은 날은 없었다. 

8.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일하셨고, 사도행전을 다 읽어가는 이 시점에서 두 명의 자매가 성경읽기 모임을 함께 맡아주기로 하였다. 내가 설득하거나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성경읽기 사역을 계속하며 말씀을 읽고 나누기로 하였다. 처음 생각은 3달 정도를 하면서 사람을 세울 생각이었는데 한달 만에 세워진 셈이다. 믿는 자가 없어 보이는 태국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여전히 세워지고, 말씀을 향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9. 바울이 받은 것 같은 위로를 받으며 (물론 그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저 내 자신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일하신다. 그 주님만 계속 신뢰하며 우직하게 걸어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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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8. 1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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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7:16-34 자존감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1. 바울이 아테네(아덴)에서 전도를 하고 있다. 어려서 읽었던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 대목이다. 많은 신들이 그리스에는 존재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2절)

2. 종교심이 많다는 말은 그들이 진리를 알기에 갈급하단 말로도 들린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솔깃한 것들이 들리면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21절에 보면 아테네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그들의 관심은 이전에 자신들이 알지 못하던 외국에서 들어온 오직 새로운 신이었다. 

3. 한마디로 속이 빈 깡통같은 곳이었다. 종교성도 많고, 새로운 신에 대한 관심도 많아 탐구를 하지만 막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4. 하지만 바울의 소개에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던 아덴 사람들이 왜였을까? 그들은 찬란한 문명과 철학을 자랑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철학을 자랑했고, 한낱 유대인에 불과한 바울의 말을 무시했다고 보여진다.

5. 한 마디로 해본다면 바울을 어디 시골에서 온 촌뜨기로 생각했던 것 같고, 그 결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성은 모르는 새로운 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들(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동경과 비교우위를 통한 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6. 그랬기에 한낱 시골뜨기인 바울은 무시당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진리를 무시하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줘 버렸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과 비교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죄인인지, 덜 죄인인지를 비교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만 속죄할 수 있는 죄인이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복음은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해 더 깊이 들여다 보게 한다.

7. 복음을 더 깊이 붙듬으로 비교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기 원한다. 남보다 조금 나으면 안심하고, 조금 떨어지면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나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임을, 그 분의 사랑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존재임을  깨닫기 원한다. 

8. 아테네 사람들처럼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내가 가진 것에 나의 존재를 세우지 않기 원한다. 비교우위가 나의 자존감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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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