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2. 7. 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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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4:12-20 복음 안에서의 진정한 사랑

1. 사도바울의 12절에서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이 원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을 다른 복음을 가진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도 가지기 원했다.

2. 사도 바울은 그들과 같이 되었고 (그들의 상황이나 형편과 같이)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자신의 눈도 빼어줄 만큼 깊은 관계였다 (15절).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다른 복음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3. 하지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여전히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19절).

4. 사도 바울의 사랑은 자신의 감정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듯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 내 힘으로 내가 가진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려고 하면 그것은 짐이고, 수고이고,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속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다가 결국은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이 가진 한계이다.

6. 이 한계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라고 해서 마냥 사랑스럽고, 이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그 한계와 끝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7. 인간적으로 본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랑할 만하지 않다.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끝까지 사랑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로 하여금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8. 어제 아내와 요엘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요엘이에 대해서 예민하게 대하고, 가능하면 분쟁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개입하는 등의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요엘이의 성장과정에서 나오는 경험으로 인해 당연한 것이라고 나누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경험이 여전히 요엘이를 억누르거나, 억울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고, 우리는 여전히 요엘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오직 복음에서부터만 나온다. 내 힘으로, 내 감정으로 요엘이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하다가는 자꾸만 지쳐가고, 중단하게 된다.

9. 결국은 복음이다. 나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새롭게 되고, 내가 그리스도로 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은 존재 임을 계속해서 깨달아갈 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사랑 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기 원한다. 내 생각과 내 전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랑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한다. 가족도, 교회 성도들도, 태국인들도 그렇게 사랑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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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7. 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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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4:1-11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면… 

1. 율법은 때가 차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기 전 까지만 유효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 비하면 초등학문 수준이다 (3절).

2. 그리스도의 깊이와 넓이와 아름다움은 율법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깊고 넓고 광대하다. 구구단을 외우며 문제를 푸는 초등학교 수학과 비교해서 미적분을 비롯한 고등수학은 얼마나 더 깊이있고, 어려운가?

3.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구구단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구구단을 사용해서 할 수 있는 고등 수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한데도, 구구단만 옳고, 구구단만 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4. 구구단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종노릇 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하지만 고등수학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게 만든다. “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6절).

5. 우리가 율법과 그리스도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너무나도 선명하다.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아빠’로 부를 수 있게 한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6. 초등학문은 낮은 수준의 것이다. 초등학문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지위까지 올라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초등학문을 갈망하고, 초등학문에 속한 무엇들을 얻기 원한다.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7. 처음에 맥이란 컴퓨터를 접했을 때 아이폰을 접했을 때 다른 컴퓨터와 핸드폰들이 잘 보이지 않는 증상들이 있었다. 외관 디자인이 일단 너무 이뻤고, 인터페이스와 아이콘들도 너무 이뻤다. 그래서 한동안 맥 앓이를 했었다. 정말 다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면 아마도 동일한 증상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다른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다. 

8.  문제는 아직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만 내가 편한 것, 내가 좋은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안도감을 준다. 내가 이만큼 애쓰고, 내가 이만큼 기여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을 준다. 우리의 구원에도 내가 기여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율법이 구원에 있어서 편한 느낌을 줄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아니다.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의 결과이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단 한 부분도 기여할 수 없다. 

9. 이번 한 주도 은혜로 살아가기 원한다. 내가 나의 구원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뭔가 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 아름다움을 보았기에 압도되고, 그 아름다움을 보았기에 다른 모든 것이 사도바울의 표현처럼 배설물로 여겨지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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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9 복음만 복음만 

1. 인간은 결코 의로울 수 없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삶은 의로움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온갖 더러움과 연약함과 악함 투성이의 삶이었다. 

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그 모든 악함과 연약함을 담당하러 오셨다. 왜냐하면 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3.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부정하면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무리들이 갈라디아 교회 안에 나타났다.

4.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6절).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율법을 지키는데서 나올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율법을 잘 지키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면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니 너무 아이러니가 아닌가? 

5. 불가능하고, 망할 존재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산 길을 만들어 주셨다. 

6. 내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변화는 이 포인트에서 나온다. 어제 목양팀 모임에서 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의 케어그룹 모임에는 참석하지만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몇몇 지체들이 있는데 그 이유가 우리 교회의 설교 때문이라고 한다.

7. 정확히는 구체적인 적용이 없어서라고 한다. 예를 들면 크리스찬과 돈, 크리스찬과 일 이런 식의 시리즈 설교를 원하고, 그 속에서 구체적인 적용, ‘어떻게 살아라!!’ 를 원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마음이 어려웠다. 우리 교회의 설교는 복음과 그 복음으로 인한 믿는 자의 변화된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본인들이 원하는 구체적인 적용 방법을 이야기 해주지 않아서라고 하니 좀 마음이 실망이 되었다. 

8. 무엇을 원하는지는 이해가 되었지만, 결국 또 다른 율법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삶은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삶인데, 내가 사랑 받았고, 내가 용납 받았고, 내가 구원받 았고, 내가 은혜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이전과 같지 않고, 다른 이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이고,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거 말고 내가 어떤 것을 실천하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다시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라고 말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가? 결국은 복음의 문제인데, 복음이 온전해지면 적용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결국은 복음을 깨닫지 못함에서 나오는 문제인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씁쓸했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느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9. ‘너희가 이 같이 어리석으냐' (3절)  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가 더 집중하고, 더 계속해서 말해야 할 것은 또 ‘복음'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을 해라’, ‘~~게 살아라' 라는 말은 듣기엔 편하고 실천 가능할 것 같지만 결국 우리를 옭아매는 율법이 되고, 우리는 결국 또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넘어지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밖에 없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전해야 할 일은 복음과 그 복음의 결과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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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11-21 죽어야 사는 비밀

1. 베드로는 진정으로 복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질문을 통하여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2. 자신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기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무할례자(이방인)들과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 자리를 피하였고, 이 일은 바나바를 외식에 빠지도록 하였다 (13절).

4. 복음을 알고, 복음을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실족하고, 외식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이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이전에 엄청난 은혜를 경험하였더라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은 엄중한 진실이다. 

5.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은 그 유명한 구절을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6.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율법으로 통칭되는 나 자신을 의지하고, 행위를 강조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다른 복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일 것이다. 

7. 나의 정욕과 샘솟는 악을 이기는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일 것이다. 세상의 법칙과 다른 십자가의 신비는 죽으면 살게 되고, 죽으면 승리하고, 죽으면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반대로 죽지 않고 내가 살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영원히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8. 오늘 나는 죽고 있는가? 육체에 대해서, 정욕에 대해서,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대해서, 살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서, 나 스스로를 의지하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마음에서 죽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사역이 잘 되는 것 같고, 더 많은 영혼들이 교회로 몰려오더라도 나의 삶은 헛될 뿐이다. 나는 주님의 복음과 관계 없는 사람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가 없다. 

9.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자. 그것이 나의 삶의 소망이며, 간절한 기대이어야 한다. 거짓 복음에, 외식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의지하는 그 복음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내 자신이 변화되는 그런 삶이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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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1-10 복음과 복음의 결과

1. 갈라디아 교회에 발생한 문제는 거짓 형제들이 거짓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이 불완전한 반쪽자리 복음이라고 말하며 할례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3-4절). 

2. 할례는 결국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을 강조하는 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믿음은 구원의 반쪽일 뿐이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있어야 우리의 구원이 온전하다고 가르친다. 

3. 팀 켈러는 이러한 것을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했다고 말한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복음의 결과는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면 구원도 믿음 + 선행으로 받는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4. 복음의 결과는 우리가 복음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과정일 뿐이다.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 삶은 이전과 다르게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지, 선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5. 우리의 구원에 복음 외에 어떤 것이든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다 다른 복음이다. 하지만 진짜 복음을 가진 사람의 삶은 행위를 강조하는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더라도 반드시 선한 삶이어야만 한다. 

6. 지금 교회가 겪는 어려움들은 바로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한 신자들 때문이다.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음)의 교리도 오해되어 빛과 소금으로 살아내야 하는데도 구원받았기 때문에 대충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기 때문에 대충 살고, 필요하면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와 교인들의 삶이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다를 것을 기대했지만, 우리의 삶이 그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믿고 천국가라’는 말이 그저 허공에 떠도는 구호가 되는 것일 것이다.

8.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별명은 ‘그리스도인’이었고, 이것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경멸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였다.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아무도 병든 자들을 돌보지 않았을 때에도 (심지어 가족 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은 병든 자들 돌보았다. 예수를 믿으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시대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숫자로 증가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보여준 복음과 복음의 결과가 다른 이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9. 나는 복음을 따르고, 복음의 결과가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나의 삶은 진실로 매력적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있는가? 나의 말과 행동과 삶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있는가? 복음이, 복음의 결과가 혼동되지 않고 그것이 내 삶에 올곧이 나타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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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1-24 복음, 사랑의 시작

1.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결코 사람의 지혜나 지식 등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1-12절).

2. 복음이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선한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복음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복음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닿을 수 없다.

3. 그래서 복음은 항상 인간과 상관없는 외부에 있어야 한다. 인간의 노력과 애씀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일 수 없다.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의 자비로만 받는 것이 복음이다. 

4. 사도 바울도 동일한 표현을 말한다. “그러나 내 어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복음은 은혜로 받는 것이고, 거저 받는 것일 뿐이다. 

5. 이러한 복음의 개념이 선명할 때,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절망적인 상황에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나에게 복음을 주셔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도 다른 이들을 이 복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6. 내가 복음을 그렇게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내가 사랑하기 힘든) 다른 이가 복음을 나와 마찬가지로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7. (내가 사랑하기 힘든) 그와 내가 같은 존재이고, 같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쉬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절망적인 존재였고,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모든 사랑의 관계의 시작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8.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복음을 계속해서 잊어버리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지만 언제 내가 그렇게 은혜 받았냐는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낮게 대하고, 비교하려고 하고, 사랑보다는 조종하려고 한다. 그래서 매일 매일 복음의 재발견이 내 삶에서 필요한 이유이다. 복음으로 내 존재가 다시 조직되어야 하고, 복음으로 인해 내 정체성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 

9. 오늘도 다시 복음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임을, 내가 사랑받고 용납받은 자임을 그리스도께서 그도 사랑하고 용납한 자임을 기억하며 다시 사랑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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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10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1.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의 어조는 매우 강하다. 인사를 먼저 하고 (1-3절),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자 말자 (4-5절) 그는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강한 어조로 권한다.

2.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라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복음은 죄에 대해 절망적인 우리를 구원하신 기쁜 소식인데 그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쫓는 것을 사도 바울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그리고 그 다른 복음이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교란케 하여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7절). 즉 우리로 하여금 헷갈리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여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이다. 

4. 실제로 이 다른 복음은 우리의 삶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생각, 즉, 봉사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기복신앙도, 내가 하나님께 잘 못했기 때문에 병이 찾아왔다는 결과주의적 신앙도, 예수를 믿으면 잘되고 복 받아야 한다는 번영신앙도 다 다른 복음이다. 

5. 다른 복음은 교묘하게 우리의 신앙생활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신앙은 항상 극과 극을 달린다. 모 아니면 도이다. 성도들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오늘 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6. 우리가 알고, 믿고, 전해야 할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뿐이다. 성도들에게 다른 복음 메시지를 전하면 절대로 안된다. 다른 복음의 메시지는 성도들로 하여금 넘어지게 만드는 지름길이고, 잘못된 신앙을 가지게 할 수 밖에 없다.

7. 어제 주일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모세의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의 절망적인 상태, 죄인인 상태, 우리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는 구원에 대해 무기력한 상태이기 때문임을 나누었다.

8.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을 방콕에 구해서 어제 교회에 처음 나온 형제, 자매가 있었다. 치앙마이에서 온 남 자매와 우돈타니에서 온 옴 형제였다. 남 자매는 신자였지만 옴 형제는 아직 불신자였다. 다른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어제 그 설교를 듣고 그들의 삶이 복음으로 인하여 변하여가길 기도한다. 예배 후에 교제하며 라인그룹과 케어그룹으로 초청했고, 일단 교회 라인그룹에 먼저 들어왔다. 어떻게 계속 복음을 전하고 양육할지는 숙제이다. 그들에게 다른 복음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9.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계속 선포되며, 복음으로 하여금 내 삶이 계속 변화되어가길 원한다.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또한 우리 성도들 안에 일어나길 원한다. 남 자매와 옴 형제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0. 오늘도 샬롬

*어제 온 남 자매입니다. 옴 형제와는 어제 정신이 없어서 사진을 못 찍었네요.. 이 두 사람이 교회에 잘 적응하고, 특별히 옴 형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게 되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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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6. 2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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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4:1-11 기도하면서 사랑하기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방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이방인의 뜻은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우상숭배이다.

2.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2절에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방인(믿음이 없는 자들)의 뜻은 사람의 정욕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정욕을 쫓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살전 4:3에도 동일한 의미의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함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정욕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가는 삶이다. 

4.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의 정욕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런 마음조차도 가져서도 안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믿는 자들은 그것들을 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3절 후반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5. 지나간 시간 동안 한 것만 해도 족하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따라가고, 사람의 정욕과 결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7-8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해주신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6.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기도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고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이 친밀함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7. 기도가 우리의 삶을 준비시켜주고 있다면 실제의 실천은 사랑하기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기도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도만 많이 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방인(믿음이 없는 자)들의 모습이다. 기도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동이고, 기도로 나의 사랑없음을 감추는 것일 뿐이다. 

8. 반대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려고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사랑도 그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될 것이고, 결국은 내 힘이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도와 사랑하기는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만 한다. 

9. 나의 삶에서 기도와 사랑은 짝을 이루고 있는가?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한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기도하면서 사랑하고 있는가? 그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지만 내 삶에서 사람의 정욕을 쫓던 시간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이제는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는 자로써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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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6. 2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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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3:13-22 고난은 하나님의 뜻

1.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늘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우리의 삶에 고난이 전혀 없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2. 하지만 고난은 두 가지의 고난이 존재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악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일 것이고, 두 번째는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일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7절).

3. 보통 우리가 두려워하고 힘들어 하는 고난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첫 번째 고난이야 내가 자초한 것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선을 행하고, 착하게 살아왔고, 하나님을 잘 섬겨왔는데 내 삶에 이런 고난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생각일 것이다. 

4. 하지만 17절은 선을 행하더라도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난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고난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8절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야기 하고 있다. 

5.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18절 상반부) 사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착하게 살아왔다고 하지만 우리 인생이 실제로 그렇게 선한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일부 선을 행하고 일부 착하게 살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삶은 악함과 연약함 투성이의 삶일 뿐이다.

6. 하지만 완전히 의로우셨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서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여 지고, 할 말을 잃게 되는 것이다. 

7.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나음을 입었고,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고,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의 고난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에게만 집중하고, 나의 억울함과 나의 힘듦에 집중되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서 어떠한 일을 이루실지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고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8. 수쿰빛 언약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 일들은 가끔 나를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분노가 일어나게 한다. 나도 나의 이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나의 억울함과 힘든 것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들을 행하시는지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히어로 이시며 주인공이시다. 내 삶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든지, 일어날 것인지 간에 그 분만을 신뢰하고, 따라가기로 하자. 그것이 고난을 이기는 능력이다.

9. 오늘도 샬롬

*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계속 더하여 주십니다. 지난번 제가 사진을 보내드렸던 예수님을 영접했던 타완 자매랑 같이 왔던 너이 자매(가운데 줄무늬 가디건)가 어제 두 번째로 예배에 참석했고, 오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타완 자매와 더불이 너이 자매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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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6. 17.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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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2:1-10 삶의 복음

1.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배로운 모퉁잇돌로 표현하고 있다 (6절) 모퉁잇돌이 무엇인가? 돌을 필요한 만큼 잘라 쓰고 남은 나머지 꼬다리 부분이 아닌가?

2. 한마디로 그 누군가에게는 쓸데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쓸데 없는가? 아무런 상관도 없고 관계도 없기 때문에 버려도 되고, 없어도 된다. 한 마디로 꼬다리다. 

3.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보배로운 산 돌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꼬다리 처럼 보일지라도, 그 분은 세상의 왕 이시고, 창조주 하나님 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 이시다.  

4. 그리고 말씀에 따르면 그 꼬다리 돌이 머리돌이 된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7절) 예수님의 존재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 

5. 예수님을 꼬다리로 여기는 자들에게 우리가 보여줘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거룩한 삶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6. 믿는 자의 삶은 우리를 불러주신 분의 거룩함을 닮아야 하고, 불러주신 분의 아름다움을 증거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꼬다리로 여기던 사람들의 사람들의 시선이 변할 수 있다. 

7. 입술의 복음이 아니라 삶의 복음이어야 한다. 나의 삶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를 비추는 나의 삶의 거울은 어떠한가? 사실 부끄럽기 그지 없다. 나의 삶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8. 나의 삶이 나를 부르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하는 삶임을 기억하자. 죄를 이겨내야 하겠지만 오로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자의 삶이 되자.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것 처럼 말이다. 가족들을, 성도들을, 주변의 다른 이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써 사랑하기에 힘쓰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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