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12-20 복음 안에서의 진정한 사랑
1. 사도바울의 12절에서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이 원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을 다른 복음을 가진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도 가지기 원했다.
2. 사도 바울은 그들과 같이 되었고 (그들의 상황이나 형편과 같이)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자신의 눈도 빼어줄 만큼 깊은 관계였다 (15절).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다른 복음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3. 하지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여전히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19절).
4. 사도 바울의 사랑은 자신의 감정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듯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 내 힘으로 내가 가진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려고 하면 그것은 짐이고, 수고이고,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속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다가 결국은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이 가진 한계이다.
6. 이 한계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라고 해서 마냥 사랑스럽고, 이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그 한계와 끝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7. 인간적으로 본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랑할 만하지 않다.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끝까지 사랑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로 하여금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8. 어제 아내와 요엘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요엘이에 대해서 예민하게 대하고, 가능하면 분쟁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개입하는 등의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요엘이의 성장과정에서 나오는 경험으로 인해 당연한 것이라고 나누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경험이 여전히 요엘이를 억누르거나, 억울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고, 우리는 여전히 요엘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오직 복음에서부터만 나온다. 내 힘으로, 내 감정으로 요엘이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하다가는 자꾸만 지쳐가고, 중단하게 된다.
9. 결국은 복음이다. 나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새롭게 되고, 내가 그리스도로 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은 존재 임을 계속해서 깨달아갈 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사랑 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기 원한다. 내 생각과 내 전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랑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한다. 가족도, 교회 성도들도, 태국인들도 그렇게 사랑하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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