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2. 6. 1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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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1:13-25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되게 하라

1. 베드로 사도는 우리로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고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5절)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가?

2. 베드로의 이 권고 이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18-19절)

3.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이미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거룩 하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이 너무 멀고, 어렵고 한 자들에게 거룩 하라고 한 권고가 아니다. 

4.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거룩하게 된 자들이기에 (과거형) 지금의 삶 또한 거룩 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우리에게 이미 임한 거룩을 지키라는 것이다. 내 삶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썩을 것을 버리고 썩지 아니할 것을 붙들어야 하는데 베드로 사도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23절). 

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24-25절)

6. 흔들리지 않는 것, 시들지 않는 것,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온 그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사는 것이 일상의 삶에서 거룩을 지키는 일이다. 하지만 말씀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언제나 쉽지가 않다. 말씀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읽는 것 조차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7. 성경이 그저 책이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내가 말씀을 읽을 수 있는 첫 걸음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관심없는 태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그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도록 할 것이다. 

8. 신학교 수업이 어제 있었는데 신학생들이 성경의 기초도 성경을 보는 관점도 부족하고,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함이 마음에 참 안타까웠던 차에 어제는 특별히 진도와 상관없이 성경을 언약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 구절을 일일이 찾아가며 가르쳤고,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음을 설명했다. ‘사라’ 라는 여학생이 특별히 관심을 보였고, 다른 학생들도 눈빛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초롱초롱 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이 모습이 참으로 감사했고, 부족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9.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나 또한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고, 마음에 새겨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89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 3명을 포함하여  제가 가르치는 클래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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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6. 1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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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8:8-22 비교하지 않으면 충분히 감사한 축복

1. 이스라엘(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부터 작은 자 였지만 약속의 자녀가 되고, 차남이었지만 장남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형 므낫세와 아우 에브라임을 반대로 축복하려고 한다.

2.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 48:14 자신이 형의 축복을 가로챈 것으로 인해 그의 젊은 시절이 얼마나 허비되었는가? 그런데도 그는 차남인 에브라임을 더 축복하려고 한다.

3. 왜 그랬을까? 요셉이 그 아버지의 손의 위치를 바꿔주려고 하지만 (17절) 야곱은 그것을 거절한다. 그의 뒤바뀐 축복에는 의도성이 있었던 것이다. 에브라임이 더 큰 지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4. 하지만 그 의도성은 항상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에브라임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내가 장자 므낫세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장자가 받는 축복을 내가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날까?

5. 에서도 그래서 야곱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가? 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딴길로 가기라도 했었지만 므낫세는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므낫세는 장자의 축복을 받기에 결격사유가 없었다. 

6. 하지만 오늘 축복의 말을 들어보면 둘을 차별해서 축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20절)

7. 그들이 받은 축복은 이름의 순서만 바뀌었지 같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둘 다 큰 지파가 될 것인데 에브라임이 좀 더 큰 지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둘 다 크지만 굳이 그 중에서 누가 더 크냐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싸움이 되고,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8.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이 내게 족한줄 알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큰 지파 중에 더 큰 지파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큰 지파가 된 것 조차도 불만을 가지고 화를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가 내게 족한 줄 알아야 한다. 비교는 항상 비교 우위와 비교 열등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절대로 다른 이들의 축복과 비교해서 나를 보지 말고, 오직 나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자. 

9. 늘 저의 부족한 묵상을 읽어봐주시고, 반응해주시고, 기억하며 기도해주시고,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교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계속 태국의 영혼들을 섬겨나가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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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6. 1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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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7:27-48:7 하나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1. 야곱의 인생의 마지막이다. 그의 인생은 정말로 파란만장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한 그가 인생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다.

2. 첫 번째는 자신을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메어가라고 이야기 한다.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30절 상반부) 

3. 야곱도 이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이스라엘 12지파로 세운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5절)

4. 야곱의 인생이 이전에는 자신의 욕망과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었다면 인생의 마지막에서 그는 이제 약속의 성취를 갈망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5. 무엇이 야곱으로 하여금 약속을 기억하고, 약속을 갈망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한 것일까? 그의 인생에는 선한 것이 별로 없었기에 높은 확률로 그의 인생에서 신실하게 만나주시고, 끊임없이 역사하신 하나님 때문이었을 것이다.

6.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이해하시고, 신실함으로 사랑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이 변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7. 오늘 그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아무것도 선한 것이 없는 우리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우리의 삶을 늘 인도하시며,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갈 수 있도록 변화시키시는 그 하나님을 지금 만나고 있는가?

8.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곁에서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함께 계신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옆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우리 옆에 계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일을 우리 안에 행하실 것이다. 1년을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첫 제자가 졸업식을 했다. 그의 인생에도 야곱의 인생과 또 나의 인생과 동일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하심이 늘 함께 하길 기도한다. 

9. 오늘도 샬롬  

*사진은 1년간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 찰리 형제 입니다. 졸업을 하고 고향 교회를 섬기러 가게 됩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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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6:8-27 내가 붙들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

1. 하나님의 길을 걸어간 이삭의 자손은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야곱 한 명이었다. 야곱은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여종, 총 4명의 아내가 있었고, 그녀들을 통해서 도합 12명의 사내 아이를 낳았다. 

2. 그 12 명의 사내아이들은 또 부지런히 자녀들을 낳았다. 그래서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70명이 되었다 (27절). 사실 한 할아버지를 둔 자녀들의 숫자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이다. 

3. 이 숫자가 왜 중요한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 22:17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는 숫자는 얼마나 큰 숫자인가? 셀 수 없다고 표현할만큼 많은 숫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들은 딱 한 명, 이삭에게 주신 아들은 딱 두 명, 그 중에서 한 아들은 다른 길로 가버렸다. 

4. 그러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것은 얼마나 쉽지 않았을까? 또한 야곱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거의 죽은 줄로만 알고 계속 살았지 않았는가? 뭔가 특별한 변화가 없고,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로 이뤄질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아니 그러한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잊어버리고 사는 시간들이 흘러갔을 것이다.

5.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천천히 일하여 주셨고, 한 할아버지 밑에서만 도합 70명의 식구가 나오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숫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약속이 뭔가 보이는 시점이 되었다. 

6. 내가 원하는 시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속도로 일하신다. 따라서 내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 뿐이다. 하나님의 속도를 하나님의 방법을 내가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7. 느리면 느린대로, 급하면 급한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그 약속을 붙들고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조급하고, 내가 하려고 하면 엉뚱한 잘못된 일들이 발생한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속도와 일하시는 방법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라가고 있는가? 

8. 지난 금요일에 교회에 한 번도 나와본 적이 없는 두 영혼이 또 커피숍으로 교회로 왔다. 작년 부활절 파티에서 영접한 빔 자매가 친구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한 친구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거 자체가 전도에 도움이 된다는게 신기할 정도이다. 함께 먹고, 교제하고, 축복했는데 두 자매가 주일에 예배에 나오기로 했고, 어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그 중에서 타완 자매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정을 하고 영접기도를 했다. 한 영혼 전도하기가 그렇게 힘든 태국에서 (오죽하면 태국의 별명이 ‘선교사의 무덤'이겠는가?) 계속해서 영혼들이 주님께로 나아오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속도와 방법이 내가 따라가기에 벅찰 정도이다. 

9. 초대교회에게 주신 사도행전 2:42-47의 말씀을 붙들고 교회를 팀으로 함께 세워가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약속의 말씀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말씀대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고 계신다. 다른 방법, 다른 묘수를 더하려고 하지 말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붙들고 계속 걸어갈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늘 함께 기도하여주시고, 후원하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여러분들 덕분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10. 오늘도 샬롬

*사진에 앞 쪽에서 기도 받는 자매가 이번에 영접한 타완 자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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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4:1-13 복음으로 용서하기

1. 요셉은 마지막으로 형제들을 시험한다. 그의 시험은 정말로 잔인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형제들이 정말로 변했는지를 알려면 이 방법 말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셉의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2. 그는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가방 안에 넣어두고, 베냐민을 잡아둠으로 인해서 형제들의 우애와 사랑을 테스트 하려고 한다. 요셉이 당했던 경험 속에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 같다. 나를 배신하여 내 일생의 반을 감옥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한 사람들이었다. 

3.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을 쉬이 용서하지 못한다. 아니 용서하기 어렵다. 요셉은 용서의 자리까지 이미 갔지만 형제들이 정말 변했는지를 테스트 해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용서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도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4. 요셉의 이러한 인간적인 행동이 매우 이해가 된다.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형제들이 원망스러웠겠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하심이 있었더라도 그의 마음의 생채기는 쉬이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5.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매우 명료하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고전 3:13 우리의 마음에 생채기가 있을지언정 우리 마음에 아픔과 힘듦이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용서해야만 한다. 

6. 그 이유는 우리가 선한 인간이기 때문도, 우리가 율법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다. 나 또한 용서받은 가해자이며, 그 또한 용서받은 피해자임을 이해할 때에라야 비로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7. 요셉의 시험은 이미 형제들을 용서를 한 이후에 이루어졌다. 시험의 결과를 통해서 형제들을 용서하느냐, 용서하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요셉은 자신의 힘든 시간동안 하나님을 정말 만났다. 모든 이가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보았다. 

8. 하나님과 함께 함이, 그 속에서 자신이 용서받은 피해자이며, 용서받은 가해자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오늘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나를 용서받은 피해자이며, 또한 용서받은 가해자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가? 

9. 사도바울이 고전 3:13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복음의 바른 이해만이 용서할 수 있도록 하여준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분을 알아갈 때 우리는 비로서 용서할 수 있다. 나도 복음 안에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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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5. 27.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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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1:37-57 하나님이 인생의 주어 되시게 하라

1. 요셉은 꿈해석으로 말미암아 이집트의 2인자가 총리가 되었다 (40절). 총리가 되어서 자신의 야망을 펼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꿈대로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48절). 

2. 요셉이 위대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바로 51절인 것 같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3. 형들이 자신에게 한 일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겠는가?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에게 한 무고죄를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술관원과 자신이 해준 꿈 해석을 통해 관직으로 복직이 되었는데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로 지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자 했다. 

4. 정말로 그 모든 고난과 아픔의 기억을 스스로 결정해서 잊어버린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요셉의 처절한 고백이었다. 요셉이 진짜 신앙인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그의 고백 속에 여전히 자신이 주어나 주체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5. 51절에서 주어는 “하나님이"이다. 자신이 스스로 그만 생각하자, 잊자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6.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나는 누구를 주어의 자리에 놓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인가? 하나님인가? 요셉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도 오해를 받고, 관계의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동의되지 않고, 내가 이해되지 않아도 여전히 모든 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실 뿐이다. 

7. 요셉과 같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갈 때, 그제서야 ‘므낫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므낫세’의 이름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고백일 뿐이다. 

8. 이번주 월, 화에 일박 이일로 교회 목회팀 모임을 가졌다. 그 동안 수쿰빛 언약교회를 이끌어오신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앞으로를 어떻게 하나님께 이 교회를 맡겨드리어서 영혼들을 잘 섬길 수 있을지를 나누었다. 교회의 머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고, 우리 목회팀의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일 수 없다. 기쁨도 슬픔도, 고난이나 어려움도 다 주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9. 우리는 모든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주어가 되시게 하면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요셉은 그렇게 했다. 나도 요셉과 같이 그렇게 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목양팀 미팅 때 찍은 사진입니다. 태국 전도사님 2 가정, 저희 가정, 미국 선교사 가정 해서 총 4가정이 수쿰빛 언약교회를 함께 세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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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5. 1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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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6:9-43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름들에게 

1. 오늘 본문은 에서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 에서는 언약 밖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멸시했던 성경에서 보았을 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왜 오늘 본문은 에서의 자손을 이렇게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2. 에서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번성하여 에돔 족속이 되었다 (43절) 그리고 이 에돔족속은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하나님이 이것을 모르셨을리 없었을텐데, 에돔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3. 에서와 에서의 자손들의 이름은 나에게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도 약간은 대충 읽어나간다. 그들의 이름이 세라, 삼마, 미사 (17절) 무엇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4.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들이 언약 밖에 있든 아니든 하나님께는 이 모든 이름들이 소중했고, 귀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5. 에서에게는 솔직히 회개하고 돌아올 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에서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 또한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해 둔 것이다.

6. 내가 관심있고, 소중히 여기는 이름들,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더욱 관심가져야 할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그 이름들이다. 그들은 내가 전혀 모를 수도 있고, 이미 만났더라도 나의 무관심으로 기억을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7.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들에게 나의 눈길이 머물러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역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연약함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만 머물러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큰 관심도 사랑도 없다. 마치 에서의 족보를 읽는 것 처럼 말이다. 

8.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가 믿는 자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일 것이다. 에서의 족보가 나에게 달게 읽혀지길 원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복음 안에서 나와 깊은 관계를 맺어갈 수 있기를 원한다. 

9. 복음이 나로 하여금 궁금하지 않은 이름들에게, 나의 관심 밖에 있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이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도 그리스도로부터 이러한 사랑과 관심을 받을 자가 아니었음을 기억하고, 내가 받은 복음의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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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5. 1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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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6:9-43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름들에게 

1. 오늘 본문은 에서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 에서는 언약 밖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멸시했던 성경에서 보았을 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왜 오늘 본문은 에서의 자손을 이렇게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2. 에서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번성하여 에돔 족속이 되었다 (43절) 그리고 이 에돔족속은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하나님이 이것을 모르셨을리 없었을텐데, 에돔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3. 에서와 에서의 자손들의 이름은 나에게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도 약간은 대충 읽어나간다. 그들의 이름이 세라, 삼마, 미사 (17절) 무엇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4.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들이 언약 밖에 있든 아니든 하나님께는 이 모든 이름들이 소중했고, 귀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5. 에서에게는 솔직히 회개하고 돌아올 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에서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 또한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해 둔 것이다.

6. 내가 관심있고, 소중히 여기는 이름들,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더욱 관심가져야 할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그 이름들이다. 그들은 내가 전혀 모를 수도 있고, 이미 만났더라도 나의 무관심으로 기억을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7.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들에게 나의 눈길이 머물러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역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연약함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만 머물러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큰 관심도 사랑도 없다. 마치 에서의 족보를 읽는 것 처럼 말이다. 

8.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가 믿는 자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일 것이다. 에서의 족보가 나에게 달게 읽혀지길 원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복음 안에서 나와 깊은 관계를 맺어갈 수 있기를 원한다. 

9. 복음이 나로 하여금 궁금하지 않은 이름들에게, 나의 관심 밖에 있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이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도 그리스도로부터 이러한 사랑과 관심을 받을 자가 아니었음을 기억하고, 내가 받은 복음의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가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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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5. 1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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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4:18-31 복음의 등을 보여주는 사람

1. 세겜 성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다. (33:2) 세겜은 디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야곱의 아들들과 화친하고 결혼하기를 원했다. 

2.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과 화친하고 혼인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속임수를 사용하여 하몰과 그의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고록 하였고 (22절), 그들이 아파하는 틈을 타서 모든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린다 (25절). 

3.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은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히위 족속들이 한 일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구하며 화친을 구했던 그들에게 똑같이 대응한 야곱의 아들들의 속임수 또한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4. 야곱의 자녀들의 논리는 틀렸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까?” (31절) 그들은 디나를 처음에 욕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화친과 결혼을 원했다. 야곱의 자녀들이 말하는 것은 그들의 복수를 정당화하는 말에 불과했다. 

5. 야곱의 아들들의 이러한 속임수의 출처는 어디인가? 생각해보면 야곱의 인생에 가득찬 거짓이 그의 아들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야곱이 아이들에게 속임수를 쓰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라도 그의 삶에 가득찬 속임수와 거짓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운 모양이다. 

6.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등을 보고 배운다고 하였는데, 야곱의 아이들은 야곱의 속이는 인생을 보고 배웠는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등을 보여주고 있는가? 또한 우리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등을 보여주고 있는가? 

7. 혹은 잘못된 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자녀들처럼 나의 잘못된 행동을 잘못된 논리로 애써 디펜스 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어떤 아빠이며 어떤 선교사인가? 오늘 본문은 나의 행동과 말을 돌아보게 된다.

8. 하지만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야곱의 아들들과 나와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으로 매일 새롭게 되지 않는 나는 그저 죄인이고, 나 자신 만을 생각하고, 여러가지 억지 논리로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받은 복음, 내가 받은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며, 오늘도 내 마음에 복음을 새겨야만 한다. 내가 야곱의 아들들 중에 하나임을 결코 잊지 말자.  

9. 매일 매일 복음을 기억하고, 내 삶에 적용하여 아이들에게 성도들에게 복음의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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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5. 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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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2:21-32 과하게 베풀어주신 은혜

1. 오늘 본문은 유명한 본문이다. 형을 달래려고 온갖 수를 다 쓰던 야곱이 하나님이 보낸 자와 밤새 씨름하였고,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건이다. 

2. 본문을 읽어가면서 의문이 든 부분은 24절이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 본문을 생각하면 이전에 들었던 설교의 내용들, 야곱이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것이나 이름이 바뀐 사건 등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야곱이 먼저 기도하지도 않았고,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3. 그저 ‘어떤 사람'이 홀로 남은 야곱에게 나타났을 뿐이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야곱이 먼저 구하거나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권적으로 먼저 나타나 주셨고, 씨름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야곱의 삶으로 훅 들어온 것이다. 

4.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구원 모두 동일하다. 내가 믿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혹은 내가 결심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이 그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 어느 찰나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먼저 찾아와 개입해 주신 것이다. 

5. 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무엇인가 기여했다고 생각하면 그때가 바로 망하는 길이다. 야곱도 그의 인생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는 솔직히 은혜를 과하게 누린 사람이라고 생각될 만큼 문제투성이의 삶을 살지 않았는가?

6.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것도 야곱이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씨름해주시고, 져 주시고, 이름을 바꿔 축복해주신 것이다.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7. 지금 나의 삶을 돌이켜 봐도 마찬가지이다. 사역을 돌아봐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열심히 살아가고, 애쓰며 살아가지만 막상 내가 무엇을 했는지 돌아볼 때, 내가 한 것이 별로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나쁜 자세는 바로 ‘교만'인 것 같다. 내가 한 게 없는데 내가 한 것처럼 생각해야 생기는 마음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8. 하나님께서 하셨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계속 기억하고 내 마음에 새기길 원한다. 나의 인생과 야곱의 인생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기억하자. 야곱만 은혜를 과하게 누린 사람이 아니라 나 또한 은혜를 충분히 과하게, 흘러 넘치도록 누린 사람임을 잊지 말자. 혹시 내 기준에 아직 은혜가 더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오래참고, 기다리고, 사랑하자. 나도 그렇게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사랑해준 사람들로 인해 지금 오늘까지 오지 않았는가? 야곱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내 삶에도 동일했음을 기억하고, 나도 동일하게 가족들에게 수쿰빛 언약교회 교인들에게 기다리고, 사랑하며 베푸는 자가 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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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