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2. 8. 1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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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6:16-36 욕심과 불순종보다 더 크신 말씀

1.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계속 먹을 것에 대한 욕심에서 부터 비롯된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말씀하시지만 (16절) 이스라엘은 욕심을 내어 더 거두어 보관하려 한다 (20절). 하지만 그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 버려야만 했다

2. 두 번째 불순종은 안식인 전 날에 발생하였다.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 전 날은 갑절로 거두라고 하셨다. 상하지도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자들은 거룩한 안식일에 또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7절). 

3.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은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그들의 먹을 것에 대한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능력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4.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죄악 중에 하나도 역시 욕심이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더 많이 먹으려고 하고, 더 많이 얻으려고 하는 욕심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 

5.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 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먹을 것, 입을 것, 가질 것에 대한 욕심을 더 깊이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중인 셈이다. 이 욕심에 따른 불순종의 모습은 단순히 지금 우리 세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6. 내 욕심보다 더 큰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위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하고, 하라고 하면 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욕심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욕심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7. 선교사로 살아가도 이 욕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 신분이 혹 내 직업이 나를 이 욕심에서 자유케 해줄 수 없다. 욕심을 이기는 길은 오직 말씀 뿐이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자신에게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말씀으로 단 번에 제압했다.

8.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읽고, 살아내지 않으면 우리 삶은 즉시 욕심이라는 홍수에 잠겨 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욕심을 이길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이기시지 않으셨는가? 오늘도 겸손히 말씀을 읽고, 말씀과 동행하는 하루 속에서 자기 중심적인 불순종과 욕심을 벗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순종도, 욕심을 이기는 힘도 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복음)이 우리 삶의 능력이 되어야만 한다. 그 복음을 따라가는 자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말씀을 읽고도, 듣고도 불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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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8. 1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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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6:1-15 불평하지 말고 딜 하지 말고 지금 하자

1. 이스라엘 백성은 영광스러운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통해서 출애굽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봤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문제는 아주 현실적인 ‘음식'에 대한 문제였다.

2. 1절에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아서는 이미 75일 가량을 광야생활을 한 시점이었다. 75일간을 굶었을까? 굶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이전에 먹던 고기를 먹지 못했고, 배불리 먹지 못했던 것 같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들은 이전에 애굽의 노예로 있었을 때에 그들의 얼마나 힘들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는지를 잊어버렸다. 고통은 잊어버리고 과거는 미화되어 그들이 고기와 떡을 먹었던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5.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4-12절에 보면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느니라" 라는 비슷한 구절이 4번이나 나온다 (7, 8, 9, 12절).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그들은 가장 영광스럽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슬며시 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6.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을 들을만한 어떤 일을 하셨던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원망하는가? 애굽의 노예라는 비참한 현실이 끝나자 말자, 이제 좀 더 편하고 좀 더 쉬운 삶에 대한 갈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7. 이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이다. 이 어려움만 지나고 나면 하나님을 잘 섬길텐데… 하나님께서 이것만 해결해주신다면 십일조를 할 텐데, 선교를 갈텐데… 등등의 고백들이 삶에 얼마나 자주 있었던가? 하지만 지금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이 마치고 나서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8. 나는 오늘 무엇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며 또 불평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내게 닥친 문제들로 인해 하나님과 딜을 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는 있는가? ‘하나님께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이것만 넘어가게 해주신다면..’ 이라고 말하면서 불평하며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이시다. 내가 불평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분명히 좋은 것을 주시겠지만, 불평하지 말고, 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섬기는 오늘 하루, 그리고 나의 삶이 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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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8. 1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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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4:15-31 빛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1. 하나님의 구원은 Yes 아니면 No 이다. 경계가 정확하다. 구원 아니면 망하는 것이다. 회색 지대도 중간 지대도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2. 이 정도면 내가 구원의 90% 정도에 미치지 않았나요? 90%면 20%나 40%에 비해 구원에 많이 가까워졌는데 왜 나는 0%인 사람과 똑같이 망하는 건가요? 불평할 수도 있다. 

3. 오늘 본문에서 홍해를 건너기 직전의 상황도 동일하다. 20절을 보면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4.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들 사이의 경계는 매우 뚜렷하였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올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한쪽에는 구름과 흑암으로 대표되는 어두움이 있고, 한쪽에는 빛으로 대표되는 밝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5. 빛과 어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반드시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아주 조금의 빛도 없기 때문에 어두움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도 40%도 90%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 구원은 항상 100%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나 어떠한 것으로도 조금도 기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빛 안에 있던 이스라엘은 오늘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구름과 흑암 안에 있던 애굽은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홍해 바다 밑으로 수장되게 된다. 

7. 출애굽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항상 100%이며 그 100%의 구원이 결코 우리에게 나올 수 없는 것임을 배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 

8.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우리 교인들과 내가 만나는 태국 사람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바로 빛이다.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셔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의 빛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빛 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나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을 잊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빛 안에 거하게 하도록 오늘도 맡겨주신 사역들을 성실함으로 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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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3:1-16 대속받은 삶을 기억하라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절기로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3절). 그리고 그 날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이 날의 의미에 대해서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14-16절).

2. 15절을 보면 대속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3. 대속이란 ‘남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거나 속죄 하는 것'으로 애굽의 모든 첫 태에서 난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것이다. 

4.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누군가가 희생 제물로 죽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 받았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5.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대속받았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죽으셨고,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용서받고 용납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 자신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이 용납과 용서를 선물로 얻게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6.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러면 애굽의 백성들의 삶은 무엇이냐? 그들은 왜 큰 아들들을 잃어야 했나? 그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7.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아시지 않는가? 창세 전 부터 하나이셨던 성부, 성자, 성령이 분리되고, 그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경험하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아신다. 그렇기에 복음을 믿는 자의 삶은 담대해야 하고, 또한 겸손해야 한다. 

8.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그들의 구원은 그리고 나의 구원은 누군가의 희생과 대속으로 시작되었다. 구원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쉽게 여기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겸손해야 한다. 나의 구원이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원에 대해 감사가 없어지고, 희생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교만하게 되고, 다른 신을 쫓아가게 된다. 은혜로 출애굽 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기억하자. 그래야 영적으로 산다. 그래야 겸손하고 또한 담대할 수 있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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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2:37-51 하나님의 눈에만 ‘여호와의 군대'?

1. 모든 재앙이 마친 이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게 된다. 그들은 급히 나가야 함으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로 그냥 나가게 된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8절) 라고 설명하고 있다. 장정만 육십만인데 거기에 타민족들과 가축들까지 포함 되었으면 얼마나 많은 인원 (200만명 이상으로 추산한다) 에 얼마나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을까?

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분주하고 정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 라고 독특하게 부르신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1절)

4. 무엇을 봐서 그들이 ‘여호와의 군대’가 될 수 있는가? 그들은 변변한 무기 하나 가지지 못한 애굽의 노예들이었고, 아무런 군기도,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어중이 떠중이 같은 자들이었다.

5. 그러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군대'로 불러 주시고, 인정해 주셨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호세아의 아내 고멜과 같이 우리는 언제나 돌아서고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이 아닌가?

6. 그런데도 이러한 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자격이 없는 자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으로 불러서 자격을 가진 자로 인정해 주신다. 죄인인 나를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하나님과 원수였던 자를 아들로 인정해 주신다. 

7. 오합지졸과 같았던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로 인정해 주신 그 복음이 지금 나의 삶에 또한 충만하다. 만약 내가 ‘이스라엘이 무슨 하나님의 군대냐?’고 말한다면 그 논리는 내 삶에서도 완전히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내가 죄인이지 무슨 의인이냐… 하지만 복음은 내가 의인이라고, 내가 자녀라고,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해주고 있다. 나의 논리를 따를 것인가? 복음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이다. 지금 당장의 나의 눈에, 나의 기준에 차지 않더라도 나와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8. 어제 주일에도 ‘젬'이란 형제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의 인생에 처음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것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카톨릭 계통의 학교를 다녀서 최근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성경을 혼자 읽었다고 했다. 주변의 크리스챤 친구에게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말하자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녹래 전도사에게 연결을 해주었고, 녹래 전도사는 우리 교회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이런 저런 복음의 대화를 나누었고,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아침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 눈에 젬 형제가 바로 의인이고, 자녀이고, 하나님의 군대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지만, 사람이 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껴졌지만 그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참으로 귀하고, 또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 그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9. 그들이 믿음을 가졌든지 가지지 못했든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태국인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선교사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선을 가져야만 한다. 그들의 행위로, 모습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 자로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사진에 나오는 젬 형제가 오늘 면접이 있다고 합니다. 기도를 부탁드리고, 다음 주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열려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오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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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1:1-10 계속된 경고는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1.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신다. 그 경고는 무서운 내용이었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5절)

2. 처음 난 모든 것이 죽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온 애굽에 전후무후한 큰 부르짖음이 있을 것이다 (6절). 이스라엘과 애굽은 완벽하게 똑같은 죄인이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그 둘을 완전히 갈라버리려고 하신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7절 하반부) 완전히 같은 죄인이었던 이스라엘과 애굽의 운명은 이제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3. 우리의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그도, 나도 똑같은 죄인이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죄인'일 뿐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께서 구별시키신다.

4. 이 ‘구별하다’ 란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be seperated, distinct’의 의미를 가지는데, 완전히 갈라져서 서로 연결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함께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의 길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5. 하나님은 바로에게 계속 경고하셨다. 이미 아홉 차례나 유례없는 기적들로 말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계속해서 거부한다. 그들의 마지막은 전후무후한 큰 부르짖음과 후회 뿐이다.

6. 태국에도 하나님께서 195년동안 계속해서 선교사들을 보내시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0.65%만이 그 부르심에 반응했다. 나머지들은 여전히 그 경고와 사랑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마지막이 어떨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7. 계속해서 외쳐야 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어제의 묵상처럼 내가 그 빛 안에 살면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그 빛 안에 살아가도록 초청해야 한다. 듣더라도 듣지 않더라도 외쳐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더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얼마 전에 영접했다고 사진을 보냈던 카놈(너이) 자매가 진정으로 회심하여 그 빛 안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고1 인데 그동안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이번에 제자 훈련에 참석하면서 담배를 다 꺽어서 버리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가정 환경이 매우 좋지 않은데 (부모님 모두가 좋지 않은 일을 하신다) 어머니를 교회에 데려오고 싶다고 말한다. 

8. 얼마나 오래 복음이 전해져 왔는가 보다도 지금 몇%가 믿고 있는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계속 외치고 있느냐일 것이다. 지금 계속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전하기 위해 어떠한 것을 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활동 하나 하나가 너무 소중하다. 나에게는 반복되는 일들 중에 하나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좀 더 영적으로 예민하고, 좀 더 열정을 가지고 양육하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장을 계속해서 만들어가자. 그 다음은 태국인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 

9. 카놈(너이) 자매의 변화를 보면서 주님께 감사하고, 정말 주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빛을 전하는 자로써 빛 안에 살아가는 자로써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더 내가 하고 있는 사역에 대해서 정성껏 해 나가자.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본문에 나오는 카놈(너이) 자매입니다. 변화된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도록, 그리고 부모님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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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0:21-29 함께 빛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1. 이제 온 애굽을 흑암이 덮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니라" (21절).

2. 낮이고 밤이고 어두움이 가득찼고, 애굽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빛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빛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1:3. 요한 사도도 하나님을 빛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 1:5. 즉 하나님이 있는 곳이 빛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어둠이 있는 곳이었다. 즉 애굽 땅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에 흑암이 가득했던 것이다.

3.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빛이 있었다.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23절). 애굽에는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흑암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빛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4. 이스라엘도 애굽과 마찬가지로 빛(하나님)이 그 곳에  있을 어떤 이유나 그들의 선한 행위가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백성들과 완전히 같았다. 완벽한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빛이 있었다.

5.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은 우리가 특별한 존재여서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저 우리가 있는 곳에 빛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죄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6. 내 인생에 빛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몇일 전에 밤에 비가 많이 오면서 온 동네가 정전이 되었다. 핸드폰 플래쉬를 비춰가면서만 뭔가를 할 수 있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나님이 없는 우리의 삶은 바로 그것과 같다. 더듬어 무언가를 할 수 밖에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7.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본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이 없고, 빛이 없는데도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우리 가정이 태국에서 살아가는 이유도 그 빛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그 빛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 빛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면서 너희들도 이 빛 안에서 함께 보자고, 함께 살아가자고 초청하기 위해서이다. 

8. 감사하게도 이 빛 안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 가정의 태국에서의 여정을 기도로 마음으로 또 재정으로 후원해 주시는 많은 분들이 있다. 코로나 시기에 교회를 개척해서 그 동안 아무도  직접 와서 보거나 함께하지를 못했었는데 7월에 태국이 열리면서 몇 분들이 다녀가셨다.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또 필요를 요청한 것과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여서 많은 것들을 준비해주셨다. 함께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갈 수 있고, 함께 그 빛을 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힘이 되었다. 

9. 늘 정리한 큐티를 카톡으로 보내면서 이름을 보며 기도 하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저희가 갚을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지만 함께 이 빛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께 우리의 빛 되신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수쿰’빛’ 언약교회와 함께 걸어가주시는 모든 분들 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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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0:1-20 하나님을 힘써 알자

1. 애굽왕 바로는 마음이 강팍하여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거절한다. 하나님은 이를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1절) 라고 설명한다. 

2. 그런데 이 표적들은 애굽왕과 애굽인들에게만 하나님의 표징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또 다른 목적은 2절에서 설명한다. “네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 결국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의 자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어떠한 놀라운 일들을 그들의 삶 가운데서 행하셨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메뚜기 재앙을 일으키신 것이다. 

4. 예기치 않은 고난의 시간 혹은 내가 특별히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고난의 시간이 닥칠 때가 있다. 수쿰빛 언약교회를 개척할 때에도 그랬다. 오해와 서로 다른 생각들로 인해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5. 그런데 바로 그러한 고난의 시간에 내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나는 그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만 하나님을 잘 몰랐는가? 아니다. 모세도 잘 몰랐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당연히 하나님을 잘 몰랐다. 

6. 모세도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며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었고,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실 때에도 그는 거절했다. 그가 하나님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불평을 하는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7.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리고 바로도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온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진짜 하나님이심을 모두에게 드러내고 있다. 

8. 나의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내가 섬기는 모든 사역과 열매가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되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과 기적을 통해서 지금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바로에게 하나님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9. 내가 오늘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가? 그저 그 분께 나아가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나는 용납 받았고, 용서 받았고, 사랑 받았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모든 자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된다.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고, 삶의 자리에서 그 분을 기억하고 그 분께 묻고 들으면 된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알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10. 오늘도 샬롬 

*그간 큐티를 정리해서 보내지 못했습니다. 집을 이사하고 정리하는 중이고, 다문화리더십 국제컨퍼런스를 준비, 진행했고, 또 방콕에 오신 손님들로 인해 참 분주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바쁘고 분주하더라도 말씀을 더 깊이 붙들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자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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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7. 1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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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2:1-10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인도해가시는 삶

1. 모세는 레위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난 시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남자애들은 태어나면 그 즉시 나일 강에 던져져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시기였다 (1:22). 

2. 그러한 시기에 모세의 부모님은 그를 숨겼다. 숨기다 숨기다 더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제는 모세를 떠나보내야 해서 그 가족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를 하게 된다. 그것은 갈대상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3절)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를 한다.

4.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도 아이를 보호할 수 없는 정도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전부를 했더라도 가족들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이 갈대 상자가 모세를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갈대 상자가 가다가 뒤집어질지, 물이 스며들게 될지, 못된 짐승들이 와서 아이에게 해를 가할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5. 그래서 모세의 누이는 그 갈대상자가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4절) 감사하게도 이 갈대 상자는 긍휼한 마음이 있는 모세에게 가장 적당한 바로의 딸에게 가 닿았다. 

6. 바로의 딸은 과연 아버지의 명령을 몰랐을까?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지 않고 살릴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이집트 왕국에서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기에 대해 충분히 긍휼한 마음을 가져 살릴 수 있는 그 바로의 딸에게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모세의 갈대 상자를 이끌었다.

7. 우리의 인생도 언제나 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신다.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울며, 아이를 보내는 갈대 상자를 만들어야만 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이의 갈대상자가 떠내려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를 여전히 붙들고 계시며 인도하고 계신다. 

8. 물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바로의 공주가 갈대 상자를 건지는 것과 같은 좋은 결과가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인도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울며, 원망하며 갈대 상자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여전히 우리를 인도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성도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갈 수 있는 것이다.

9.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어려운 길이든, 기쁜 길이든 걸어나가기 원한다. 모든 것을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로 받기 원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간섭하심을 발견하기 원한다. 지금 당장 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손이 나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그 신뢰를 놓치지 않는 자가 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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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7. 1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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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12 그리스도면 충분합니다

1.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강력히 권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절)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더 이상 율법으로 구원받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면 충분하지, 그리스도에 어떠한 것도 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율법은 초등지식이고, 종의 멍에이고,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지어야 할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4절). 로마서에서 바울이 설명하였지만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다. 하지만 그 율법을 절대시 하게 되고, 그 율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율법은 그 선함을 잃어버리고 또 하나의 우상이 될 뿐이다.

4.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이 하나님 대신 섬기고 있는 우상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대신할 만큼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격분한 것이다. 바울은 심지어 그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까지 말한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2절) 그것들이 더 자라지 못하게 잘라 버리라는 것이다. 

5. 우상이라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좋은 것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상의 절대성과 영향력을 가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좋은 것일 수 없고 우리의 삶과 인생을 망치는 그 무엇인가가 되어 버린다. 

6.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그것이 율법이었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그것은 여러가지 것들로 존재한다. 선교사로 살아가면서도 가장 큰 이슈는 물질이다. 통장에 어느정도 재정이 들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뭔가 안심이 되고, 안정감을 느낀다. 통장의 잔고가 줄어가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7. 물질 뿐이 아니다. 칭찬과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또한 나의 우상이다. 내가 여러가지 사역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가 정말 영혼들 때문 만인가? 태국의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덜 자고, 나의 것들을 포기해가며 그들을 섬기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신실하고, 좋은 선교사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 하나도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받고 싶은게 나의 모습이다. 이러한 우상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정감,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인정보다 때로는 아니 자주 더 크게 느껴지는게 나의 삶이다. 

8.  사도 바울의 권고처럼 이러한 우상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기 원한다. 어떠한 좋은 것들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음을, 내가 누려야 하는 안정감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인정도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임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단순히 구원에 관한 것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원한다. 내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면 충분하다는 고백을 하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 그리스도면 충분합니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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