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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35-44 의무감이 아니라 기쁨, 사랑, 감사로

1. 예수님이 돈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이다. 물론 그것이 예수님께서 헌금을 강요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의 실생활에 관심이 많으셨다. 

2. 오늘 본문도 매우 유명한 본문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해설을 보면 1고드란트가 한 번의 목욕료에 해당한다고 하니 많이 잡아도 우리 돈으로 몇 천원 혹은 만 원 정도 되는 돈을 헌금 하였다 (42절). 그런데 여러 부자는 많은 돈을 넣었다 (41절). 

3. 이 과부에 대한 수식어는 ‘가난한’ 이다. 그 시절의 과부를 생각해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과부를 호의로 도와줄 사람이나 장성한 자식이 없다면 그녀의 인생은 구걸해서 살아야 하는 거지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은 늘 고아와 과부를 돌볼 것을 강조하셨다.

4.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를 헌금 했느냐에 관심이 많다. 그의 상황이 어떠하건 간에 많이 헌금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 적게 헌금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많고 적음을 조금 다르게 보셨다. 

5. 풍족한 사람은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많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셨고, 이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과부가 자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넘치게 헌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44절)

6. 부자들과는 다르게 이 과부는 자신의 전부를 넣었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돌봐줄 후견인도 없고, 장성한 아들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다 드리고 나면 그럼 내일은 어떻게 살려고? 그녀는 그 기대와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었다. 

7. 그녀의 헌금 방식을 보면서 그녀가 ‘이번에 이만큼 헌금 했으니 하나님께서 더 많이 채우실거야’ 라고 생각했을거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삶을 인도해가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로 그저 있는 것을 드렸을 뿐이었다. 묵상하는 동안에 이것이 오늘 한 번이 결코 아니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8. 헌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얼마를 드렸음을 자랑하는 것도, 혹은 ‘하나님께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갚아주세요’ 라는 부채의식을 드리는 것도 아니다. 헌금은 그저 나의 사랑과 감사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수단이고,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즉 나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헌금을 하는 목적이 이 과부와는 다른 순간이 많았다. 많은 순간에는 의무감으로 ‘이건 해야 하는 거니까 꼭 해야 돼’ 라고 생각하며 헌금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드리는 기쁨은 사라지고, 사랑과 감사의 고백은 사라지고 무미건조하게 헌금을 드린 적도 많았던 것 같다. 

9.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의무감과 무미건조함이 왠 말인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의무감이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사랑도, 감사도 존재할 수가 없다. 선교사의 삶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더 어려운 환경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통한 매달 많은 분들의 선교헌금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주인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선 안된다. 기쁨과 사랑과 감사가 헌금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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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3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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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11:1-11 환호에 취한 새끼 나귀가 되지 말자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직전이시다. 왕으로 오신 분께서 제자들에게 무엇가를 시키신다. 엄청난 일을 시키시지 않을까 제자들은 기대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작은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1-2절)

2. 왕과 작은 나귀 새끼는 어울리지 않는다. 왕에게 어울리는 것은 젊고 혈기 넘치는 백마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백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신다. 그것도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신다. 

3. 제자들도 뭔가 미심쩍고, 뭔가 어색하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갔고, 나귀를 풀어왔다. 그때 묻는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5절) 가져가서 그걸로 뭘 할거냐? 묻는 이유는 놀라서일 수도 있지만 새끼 나귀가 그만큼 하찮고, 사람이 아직 타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나귀였기 때문일 것이다. 

4. 예수님의 대답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 (3절) 였다.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이고,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새끼 나귀를 들어서 쓰신다. 그런데 묵상을 하면서 이 새끼 나귀가 바로 나의 모습 같단 생각이 들었다. 

5. 나도 하찮아 보이고 별 볼일 없는 자 였으나 (물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어느 날 주님께서 오셔서 나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고, 나를 주님의 사역으로 초대해 주셨다. 내가 뭔가 주님과 어울리는 백마 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새끼 나귀 였기 때문일 것이다. 14살 때 예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해에 선교사로 또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11년차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6. 특별한 장점도 특별한 은사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주가 쓰시겠다"하며 불러 주셨고, 여전히 나의 삶을 붙들어 가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을 태우고 가던 나귀가 “호산나" 하며 종려가지를 흔드는 사람들의 환영 앞에서 어리둥절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면 그 환호가 자신을 태우고 가는 분께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오는 환호로 혹시 착각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력이 들었다. 

7. 나는 어떤 새끼 나귀인가? 예수님이 불러주셨고, 그 분의 사역에 불러 주셨는데 나는 그 분을 태우고 가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착한 나귀인가? 아니면 그 분께 오는 환호를 나에게 오는 환호로 착각하여 교만하고, 그 환호를 가로채려고 하고, 그 환호에 취해 있는 악하고 게으른 나귀인가? 

8. “주께서 쓰겠다 하라"고 나를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을 잊어버리거나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주께서 쓰시고자 불러 주신 한낱 새끼 나귀임을 잊지 말고, 주를 태우고 감으로 인해서 경험하게 되는 주님께 드려지게 되는 그 감사와 찬송을 가로채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새끼 나귀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위에 계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9. 어제 읽었던 세례요한의 고백이 결국 정답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모든 자리를 내어드리고 자신은 사라졌다. 세례 요한의 삶이 내 삶에 있기를… 환호에 취한 새끼 나귀가 되지 않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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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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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52 ‘필요’에서 ‘따름'으로

1. 오늘 본문에서는 맹인 바디매오가 주인공이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쳐 예수님을 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7절)그의 외침은 예수님을 다른 목적으로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고, 잠잠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48절 상반부)

2. 하지만 바디매오는 절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 보다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아만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3. 그는 더 크게 외쳤고, 예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부르신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고, 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52절)

4.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너의 기도의 간절함이 너를 낫게 하였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디매오의 반응도 나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따라가는 자가 되었다. 

5. 오늘 본문에서는 바디매오는 ‘나음'이라는 필요에서 간구를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은 ‘따름'으로 마쳐진다. 예수님도 바디매오의 간구 속에서 ‘믿음'에 주목하신다. 누구든 처음에는 자신의 어떠한 목적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 분의 도우심이 필요할 수는 있다.

6. 하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나의 필요로 인해서 혹은 나의 필요의 채우심을 기대하기 위해 예수님을 불러서만은 안된다. ‘필요’에서 시작했더어도 그 마지막은 ‘예수를 따름’으로 마쳐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일 것이다. 

7. 나의 기도생활은 어떠한가? 예수를 따르기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기도인가? 나의 예배는? 나의 사역은?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나의 ‘필요’인가 아니면 ‘따름'인가? 솔직히 나의 기도의 대부분은 ‘필요’를 말하지 ‘따름'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 ‘필요'에서 ‘따름'으로 넘어가는 것이 영적인 성숙인 것 같다. 지금 나의 현 주소는 어디인가? 성장하고 있는가? 성숙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필요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따름에는 무관심하지 않는가? 

8. 태국 성도들은 대부분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들의 필요의 대한 하나님의 채우심이 매우 중요하다. ‘신앙적 경험'이 매우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필요’의 기도에 응답했을 때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오늘 말씀처럼 ‘필요'에는 반응하지만 ‘따름'에는 무관심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는 램프의 지니인가?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 하나님의 어린양인가?

9.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할 수록 복음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록 오늘 바디매오와 같이 결국 예수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른 복음을 전하고, 바른 복음을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필요’로 인해 일희일비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해 만족하기 원한다. ‘필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이 내 삶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를 원한다. 나도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를 길에서 따르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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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2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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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32-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1.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게 되실 것이고, 종교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고난과 능욕을 당하시나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32-34절).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좀 답답하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예언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름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에수님께 한 자리를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35-37절). 심지어 같은 수제자 라인이었던 베드로는 쏙 빼놓고 말이다. 

3. 그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예수님의 기준을 말씀해주신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4-45절)

4.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세상의 기준과 나의 기준은 다르다. 세상은 권력을 가지고 힘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만 예수님의 기준은 오히려 섬기는 자가 더 큰 자이고, 으뜸이 되는 자는 종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5. 그리고 45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온 이유도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받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기 위해 온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6. 우리의 기준은 분명히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이 생각하는 권력이나 대접, 혹은 중요한 자리가 우리의 목표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섬김이어야 하고, 헌신이어야 하고, 그리고 사랑이어야 한다.

7. 하지만 섬김, 헌신, 사랑을 목적으로 사는 삶은 얼마나 어려운가? 선교사로 살아가면서도 얼마나 많은 대접을 받고 싶어 하고,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가? 여전히 세상이 가치관과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려고 하고, 섬김이 아니라 권력이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8. 사역에서만 그런가? 가정에서는 어떤가? 섬김으로, 헌신으로,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아내와 아이들의 섬김을 받고 싶어 하고 있는가? 여전히 나는 힘과 숫자를 바탕으로 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쉽게 변화되지 않는 것 같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말씀하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예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삶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대접하기 위해 더 많이 움직이기 원한다. 엉덩이가 가벼운 영성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 

9.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섬김을 통해 나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나는 누구누구와 달라. 나는 잘 섬기는 사람이야’ 라는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쪽으로 빠지지 말자. 내가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유는 나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 누구에게도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것으로 나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자.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만 의식하자. 

10. 삶의 한 절 이라도 그 분을 닮아갈 수 있기를...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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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2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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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13-22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지만 중요하다

1.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하지만 이 이웃사랑은 단순히 ‘사랑해'라는 말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사랑이다.

2. 오늘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절) 하고 묻는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있었던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이 말하는 계명들을 잘 지켜왔기 때문이다. 

3. 19절에서 예수님이 십계명에 대해서 지켜야 함을 설명하시고, 그는 20절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영생이었을까? 아니면 율법을 잘 지킨 자신에 대한 칭찬이었을까? 

4.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율법의 계명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지켜야 하고, 입으로의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의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21절 상반부)

5. 그런데 그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고, 정말로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려주신다. 그것은 자신의 재물을 다 팔아 나눠주라고 하신다. 즉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6. 율법을 정말로 지키는 것은 그저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계명을 지키는 일은 좋든 싫든 그 계명만 지켜내면 된다 (사실은 이것만 해도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의 정신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7. 물론 영생은 믿음으로 얻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이전과 같다면, 우리의 삶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실 것이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8. 이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율법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는 신앙인들은 기독교를 망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되게 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한동대 동문회에서 고 장응복 님의 글을 읽었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 113억원을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한동대에 기부하였고, 그로 부터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250명이 넘는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기부를 알리지 말라고 하였고, 자녀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으셨다. 그는 ‘배워서 남주자’는 한동대의 슬로건에 감동을 받아 ‘벌어서 남주자' 로 화답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말로 순종한 영생을 가진 자였다. 

9. 그의 삶은 큰 울림을 준다. 돈을 많이 기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진정으로 율법의 정신을 지킨 예수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율법의 정신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 율법의 계명도 지키기 버거운 나로서는 마음이 어렵다. 요엘이의 짜증 하나도 받기 힘든 내가 아닌가? 나는 정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 없다. 오직 필요한 것은 예수의 은혜이다. 그 분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그 분의 사랑 안에서 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만 한다.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사랑이 부족한 내 삶에 은혜를 부어주시길…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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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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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7:30-40 ‘믿음 없음'이 모든 죄와 연약함을 일으킨다

1.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하는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다. 이삭은 야곱이 속임수를 썼지만 그에게 축복한 것을 무를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2.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33절),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37절)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40절) 아버지 이삭의 말처럼 이제 약속이 성취될 일만 남았다.

3. 에서는 그제서야 소리지르고 슬피 울며 후회하게 된다 (34-38절). 그동안 그는 말씀을 붙들지 않았고, 자기 자신만을 믿었다. 자기 자신의 육체적 강함과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권을 파는 것도 그는 경히 여겼다. 

4.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에서는 지나간 축복 앞에서 후회하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붙든 자의 최후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약속보다 클 수 없고, 하나나님의 신실하심보다 더 신실할 수 없다. 

5. 그러기에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드는 것이다. 약속의 성취가 더뎌 보이더라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쉽지 않더라도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로 향해 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지키실 분이 바로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6. 어제 묵상에서 나는 두려움이 아니라 약속을 붙들기로 결정했다. 오늘의 묵상에서는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로 결정했다. 중요한 것은 결정이 결정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삶으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7. 삶으로 나타나려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약속을 언제든지 “예"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런데 자주 나에게 이 확신과 믿음이 부족함을 느낀다. 

8. 하나님께서 하실거라고 믿으면서도 조금만 내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조금만 내가 원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께 쉽게 마음이 상한다. 여전히 에서와 같이 내 자신의 판단과 계획을 의지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지혜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온 역사와 만물을 돌보고 계신 것을 믿는다면 에서와 같이 내 자신을 의지함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9. 결국은 나의 ‘믿음 없음’이 약속이 아니라 내 자신을 믿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의 ‘믿음 없음'이 하나님을 작게 보고, 내 자신을 크게 보도록 착각을 일으킨다. 나의 ‘믿음 없음'이 내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믿음 없음'의 결국은 후회와 눈물이다. 오늘 내가 믿기를 원한다. 오늘 내가 예수를 내 삶의 가장 큰 분으로 붙들기를 원한다. 오늘 내가 에서와 다른 길로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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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2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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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7:15-29 두려움이 아니라 약속이다

1. 리브가와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로 결정하였고, 적극적으로 계략을 짠다. 좋은 의복을 가져와 입히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에게로 나아가 축복을 요구한다 (15-19절).

2. 야곱은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까지 사용한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0절)

3. 가장 중요한 것이 아버지의 축복이었기에 눈에 아무것도 보이는게 없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음대로 팔아서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취하려고 한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4. 리브가와 야곱의 태도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세상 그 무엇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욕망이고 나의 이익이다. 그래서 하나님 조차도 내 욕망 앞에서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5. 그런데도 이삭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야곱을 에서인 줄 로만 알고 축복해 준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고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었는데도 말이다. 

6. 사실 야곱이 받을 축복은 처음부터 예언되어 있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그런데 이 예언을 온 가족 모두가 잊어버리고 아버지 이삭은 관습적으로 형을 축복하려고 하였고, 둘째와 엄마는 약속이 없으니 이를 자신의 힘으로 얻어내려고 하였다.  

7.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뤄진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거나 결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변경할 수 없다. 우리가 약속을 잊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8. 내 생각과 내 결정을 의지하지 말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약속을 붙들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것,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 좀 잠시 내려두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지를 듣도록 하자.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약속을 붙들지 못하면 두려움이 찾아온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사용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고 말한다. 

9. 두려움이 아니라 약속이 내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 약속이 없으면 두려움이 우리 삶을 장악하게 되고, 두려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에 집착하게 만든다. 두려움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 약속을 놓치지 말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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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1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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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6:1-16 부모의 등이 아니라 복음으로 

1.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고 자라는게 아니라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하였다. 즉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보다도 더 효과가 있는 양육방법은 부모의 삶이라는 것이다.

2.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 이삭의 행동은 완전히 이해가 된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한 그대로 행한다. 흉년이 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버리고 다른 땅으로 가서 살고 (1절), 그 땅에서 아내로 인해 오해를 받아 죽기 싫기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하게 된다 (6-11절). 

3. 물론 이 일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여준 삶의 모습들이 이삭에게 영향을 미쳐 지금 이삭은 그 아버지가 한 그대로 행하고 있다. 

4. 약속의 땅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흉년 중에 그들을 도우실 수 없었겠는가? 온 땅과 하늘의 창조자이신 주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나와야 하는 그들의 인생을 책임지실 수 없었겠는가? 아브라함과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끝이 난다. 

5. 그런 면에서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 없음’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등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을까? 하나님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원하면서도 나도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지는 않는가? 입으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이야기 하면서 일상에 영향을 잘 줄 수 없는 그런 연약한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6. 아브라함도 이삭도 연약했다. 그들의 믿음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믿음에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2절)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도 복을 주신다. 

7. 그것이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이고,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신다. 내 등을, 내 삶을 돌아보면 도저히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설명하기 힘든 삶이다. 부족함과 연약함이 점철되어 있는 삶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8. 그런데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늘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우리의 믿음이 뛰어나고 삶이 뛰어나서 자녀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사랑과 은혜가 연약한 나와 내 자녀들에게 임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의 말 처럼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가? 

9. 이 은혜와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 모두에게 있다. 내가 어쩔 수 없고, 절망적인 사람임을 깨닫고, 그러한 절망적인 내 삶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아이들이 이 복음이 그들의 삶에서 진심으로 믿어지길 기도한다.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깊이 보여주신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고 깨닫기 원한다. 물론 나의 삶도 복음으로 인해 다시 새롭게 되어지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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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1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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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5:1-18 복이 흘러가려면..

1. 아브라함이 175세로 죽었다 (7절). 아브라함은 평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신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죽기 직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 5-6절을 보면 그 정리의 내용이 나타난다. 

2.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그의 장자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보다 먼저 태어나거나 더 유력한(?)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물려주게 된다.

3.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5절) 그리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살 길을 마련해준다. 하지만 그들이 이삭과 함께 살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동쪽으로 모두 떠나보낸다. 

4. 아브라함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도 자신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약속이었고,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후순위로 넘겨 버린 것이다.

5. 그리고 이삭이 받은 것은 복이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11절).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게 된다. 이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부로 묘사하며 그들이 받은 복 중에 물질의 복이 있었을거라고도 말한다.

6. 그 말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물질의 복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더 근본적인 복은 바로 관계의 복,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복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복이 내 자녀들로 흘러가는 것이다.

7. 그런 면에서 나는 복 받은 자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나와 관계를 맺어주시고,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나를 사랑해주신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이 복은 이삭에게로 흘러간다. 그런 면에서 나의 자녀들은 나와 함께 이 복을 누리고 있는가? 를 생각해보게 된다.

8. 선교사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아직 아이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 복이 아이들에게 흘러가도록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 드렸던 가정예배가 생각이 난다. 여전히 가정예배는 힘이 든다. 항상 한 명은 뭔가 속이 상해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꾸준히 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으로 믿는다. 예준이, 요엘이는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것도 생각중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지 않는다면 선교지의 상황에서 아이들이 양육받기 쉽지 않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겠다. 

9. 하나님의 관계의 복은 은혜의 영역이다. 내가 애쓴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도 하지 않으면서 은혜에만 기대는 것은 부모의 사명이 아니다. 교회 성도들 성경공부 시키는 것 만큼 바쁘더라도 좀 더 시간을 내어서 아이들과 말씀을 대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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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3. 1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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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4:50-67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더 신뢰하기

1. 리브가의 오빠 라반과 아버지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종이 찾아와서 혼인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50절). 우연히 발생한 일인 것 같지만 이 일은 우리들이 개입해서, 우리들이 뭔가 기여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온전히 여호와로 말미암아 발생한 일이라고 그들은 고백한다. 

2.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저 타국 멀리서 아들의 결혼을 위해서 종을 보내었는데, 그 종이 처음 만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같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의 조카라니??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순적하게 이루어지다니..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저렇게 고백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3. 그리고 그들이 리브가를 어떻게 축복했는지를 보면 그들이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60절) 그들의 고백은 창 3:15절에서 예언된 ‘여자의 씨'를 생각나게 한다. 

4. 리브가는 그 종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집으로 가게 되고, 이삭은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리브가를 만나게 된다 (62절). 그리고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이삭은 어머니 장례후 위로를 얻게 된다 (67절). 

5. 이 모든 스토리를 계속해서 이끌어 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함께 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6.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에만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내 생각, 내 계획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 분명히 내 생각과 내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를 앓으면서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루틴으로 해야 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7.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 머리로 계산하고, 생각하고, 계획하여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라고 말하며 내 계획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8. 해야 하는 일, 해야만 하는 일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원한다.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나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이 내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나를 좀 더 내어 드리기 원한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아팠기 때문에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데 시간을 쏟기 보다는 새로운 인도하심을 위해 내 시간을 좀 더 사용할 수 있기를 원한다. 내 삶에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일들’이 더 늘어나기를 소망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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