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2:35-44 의무감이 아니라 기쁨, 사랑, 감사로
1. 예수님이 돈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이다. 물론 그것이 예수님께서 헌금을 강요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의 실생활에 관심이 많으셨다.
2. 오늘 본문도 매우 유명한 본문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해설을 보면 1고드란트가 한 번의 목욕료에 해당한다고 하니 많이 잡아도 우리 돈으로 몇 천원 혹은 만 원 정도 되는 돈을 헌금 하였다 (42절). 그런데 여러 부자는 많은 돈을 넣었다 (41절).
3. 이 과부에 대한 수식어는 ‘가난한’ 이다. 그 시절의 과부를 생각해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과부를 호의로 도와줄 사람이나 장성한 자식이 없다면 그녀의 인생은 구걸해서 살아야 하는 거지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은 늘 고아와 과부를 돌볼 것을 강조하셨다.
4.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를 헌금 했느냐에 관심이 많다. 그의 상황이 어떠하건 간에 많이 헌금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 적게 헌금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많고 적음을 조금 다르게 보셨다.
5. 풍족한 사람은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많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셨고, 이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과부가 자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넘치게 헌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44절)
6. 부자들과는 다르게 이 과부는 자신의 전부를 넣었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돌봐줄 후견인도 없고, 장성한 아들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다 드리고 나면 그럼 내일은 어떻게 살려고? 그녀는 그 기대와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었다.
7. 그녀의 헌금 방식을 보면서 그녀가 ‘이번에 이만큼 헌금 했으니 하나님께서 더 많이 채우실거야’ 라고 생각했을거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삶을 인도해가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로 그저 있는 것을 드렸을 뿐이었다. 묵상하는 동안에 이것이 오늘 한 번이 결코 아니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8. 헌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얼마를 드렸음을 자랑하는 것도, 혹은 ‘하나님께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갚아주세요’ 라는 부채의식을 드리는 것도 아니다. 헌금은 그저 나의 사랑과 감사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수단이고,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즉 나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헌금을 하는 목적이 이 과부와는 다른 순간이 많았다. 많은 순간에는 의무감으로 ‘이건 해야 하는 거니까 꼭 해야 돼’ 라고 생각하며 헌금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드리는 기쁨은 사라지고, 사랑과 감사의 고백은 사라지고 무미건조하게 헌금을 드린 적도 많았던 것 같다.
9.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의무감과 무미건조함이 왠 말인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의무감이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사랑도, 감사도 존재할 수가 없다. 선교사의 삶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더 어려운 환경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통한 매달 많은 분들의 선교헌금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주인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선 안된다. 기쁨과 사랑과 감사가 헌금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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