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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2:13-20 물어야만 한다

1. 야곱은 지금 두렵다. 형 에서가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두려움은 야곱으로 하여금 많은 계략을 만들어내고 있다. 엄청난 선물과 대답할 말을 계략중이다. 

2. 그는 먼저 에서에게 줄 선물을 선택한다. 14절에 보면 암염소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절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3. 엄청난 선물의 양을 보면 놀라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재산이 그가 가진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가 빈손으로 가족을 떠나서 라반에게 가서 봉사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는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계략과 생각으로 거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부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4. 그런데 지금 그의 삶에는 하나님은 없고, 또 다시 자신의 힘으로 이 어려움을 뚫고 지나가려고 계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형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을 경외함보다 더 크게 그에게 다가온 것이고, 그는 다시 이전의 속임수와 거짓으로 점철된 그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5. 물론 그의 계획은 아주 적절하다. 자신의 형이 깜짝놀랄 만큼의 선물을 준비하고 형 혹은 형님 정도가 아니라 ‘자기 주(님)'라고 부를 정도로 형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정도면 형의 자신을 향한 분노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6. 지금 야곱이 잊어버린 것은 자신의 삶에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머리를 쓰고 계략을 세우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해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잔꾀를 의지하는 모습으로 가고 있다. 

7. 이러한 모습이 나의 삶에도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일은 멀어만 보이고 불확실해 보인다. 지금 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머리를 쓰는 것은 훨씬 더 가까워 보이고,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내 생각을 의지하는 것은 망하기 위한, 일을 망치기 위한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8. 멀어만 보이고 불확실해 보이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묻는 것이다. 내가 계획하고 내 생각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묻는 것이다. 물어야만 한다. 다윗의 삶의 자세를 보면 가장 잘 이해가 된다. 다윗은 항상 물었다. 올라갈까요? 싸울까요? 따라갈까요? 사울을 죽일까요? 묻는다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태도이다.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심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묻는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9. 교회 사역에 있어서 가정의 일에 있어서 묻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내 머리와 생각을 빨리빨리 돌려서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멀게 느껴지더라도 물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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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9:21-35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1. 참으로 불행한 가정사이다. 야곱이 오기 전에 이미 이 불행은 시작되어 있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것이 잘못의 시작이 아니라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레아가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의 시작이었다. 

2. 성경에서는 레아가 ‘시력이 약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 다음 문장에서 라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과 상당히 비교가 된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창 29:17) 시력이 나쁘다는 것은 참 애매한 표현이긴 하다. 

3. 하지만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외모를 비롯한 모든 것에서 라헬과 레아는 계속해서 비교 당했던 것이 분명하고, 그 비교 속에서 라헬은 점점 높아지고, 레아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졌던 것 같다. 그래서 라헬이 결혼할 수 있을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4. 사람은 외모로 평가 받거나 그 사람이 타고난 어떠한 것으로도 평가 받아서는 안된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고, 어려서 부터 배워 온 진리인데도, 여전히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기준이 야곱의 가정 뿐만 아니라 지금 내 삶에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5. 레아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레아를 야곱에게 그저 넘기기로 라반은 술수를 쓴다. 라반 입장에서는 어차피 결혼하지 못할 딸을 이렇게라도 결혼시킬 수 있으니 매우 좋은 계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아에게는 이러한 계략이 자신의 자존감에 얼마나 더 상처를 줬겠는가? 

6. 존중과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생각, 사람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치를 매기지 않고 외모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절망을 줄 수 있다. 성경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죄와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7. 사람을 물건으로 보기 시작하고, 돈이 가장 귀한 가치가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성경의 가치관은 여전히 우리에게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더 귀함을 말씀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도 다른 이들을 바라볼 때, 성경적이지 않은 기준으로 비교하거나 판단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8. 사랑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라면 비교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사랑의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 자체로 그저 사랑해주셨기 때문이고,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타고난 것으로가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예수로 그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9. 수쿰빛 언약교회의 교인들을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내가 선교사이기 때문에 그래도 쉽다. 더 어려운 것은 ‘그래도 이정도는 해줘야지’ 라고 기대하는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 또한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원한다. 야곱과 레아와 라헬이 안타까운 경쟁에 빠진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고,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기 원한다. 그렇게 사랑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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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5:1-12 욕망이 아니라 믿음으로 

1. 성경은 어려운데 쉽고, 쉬운데 어려운 것 같다.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를 모르는 것 같은 때가 있는 것 같은데, 또 어떤 때는 너무 쉬워서 이게 맞나 싶은데 그게 진리일 때도 있다.

2. 오늘 본문에서도 쉽게 쉽게 설명한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믿는 자의 주된 사명은 사랑하는 것이다. 

3. 그리고 4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길까? 무엇을 이길까? 생각할 수 있는데, 4절은 조금 더 설명하고 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4. 우리가 세상에 대해 승리함은 세상적인 기준(지배하고 정복하고 더 많이 가지고 누리게 되는 것)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오는 죄와 죽음에서의 승리이다.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우리에게 왕 노릇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5.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1절에서는 이 믿음에 대해 설명하기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이라고 설명한다. 즉 예수께서 구약 성경 전체가 예언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창 3장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이에 대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나 같은 선지자’ 라고 했던 바로 그 분임을 믿는 것이다. 

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모든 것이 헛것이다. 한때(지금도) 조엘 오스틴이란 목사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는 ‘긍정의 힘'이란 유명한 베스트셀러를 쓴 번영복음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우리는 왕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누려야만 하고, 우리가 누릴 것을 믿으면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의 교회는 부는 갈망하는 사람들로 인해 부흥했고, 조엘 오스틴 목사는 더 부자가 되었다. 

7.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기 이전에 그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어주는 램프의 지니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우리가 믿는대로(욕망하는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임을 예언하고 있다. 

8.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내가 바라는 모습대로 살아가기만을 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욕망이다. 요한 사도는 오늘 계속해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믿음보다 우리의 욕망을 예쁘게 포장한 믿음에 더 혹하게 된다. 십자가 보다는 영광을 기대하게 되고, 대접하고 섬기기 보다는 대접받고 섬김을 받기를 기대하게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9. 나의 믿음이 오직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에 있다면 욕망이 아니라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엉덩이가 가벼운 영성' ‘섬김의 영성' ‘사랑의 영성'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아내가 없는 이 시간을 아이들을 위해 조금 더 시간을 낼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 조금 더 시간을 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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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4. 2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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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11-21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 안에서 

1. 오늘 본문은 11절에서 선언적으로 시작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1절) 성경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들의 힘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다.

2. 사랑은 사람이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태어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태어난 아기들을 보면 한없이 이기적이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한다. 이러한 인간들이 어떻게 사랑을 알게 되었을까?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3. 아이들은 사랑을 부모를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엄마의 자기희생적인 사랑, 아빠의 헌신적인 사랑을 경험하면서 사랑을 배우게 된다.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사랑을 배우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사랑을 알게 되었을까? 그 아버지, 그 어머니였을 것이고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랑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4. 11절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태초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19절도 동일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살아하셨음이라"

5.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도, 우리의 성품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주 이 사랑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만약 매일 이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랑의 원천이 말라버리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내 삶을 돌이켜 볼 때, 아이들과, 아내와 관계에 어려운 마음이 생길 때에는 내 안에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가 멈추고, 사랑을 받는 교제의 시간이 끊어지고, 내 안에서 이기심이 샘 솟아 오를 때이다. 사랑의 키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이다.

7. 사랑하려면 사랑 받아야 한다. 사랑 받으려면 사랑의 근본이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 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지금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 없이는 내 힘을 짜내서 사랑하는 것 뿐이고 그러면 금새 지치고, 금새 포기하게 된다. 

8. 오늘도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원한다. 사실 표현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묵상하고, 예배하고… 이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을 더욱 더 사모하고, 그 자리를 지키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사춘기 예준이와 예민한 요엘이에게 사랑을 쏟아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가르친다는 핑계로 내 감정을 쏟아내면서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기를 원한다. 일상의 사소함 속에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배워가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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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4. 20.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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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2:1-11 사랑의 행함

1. 요한 사도는 ‘사랑의 사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한 사도가 강조한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사랑의 행함’을 이야기 한다. 

2. 첫 번째로 요한 사도가 말하는 사랑의 행함은 ‘범죄하지 않음'이다 (1-4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어찌 범죄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이타적이고 희생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3. 두 번째로 요한 사도가 말하는 사랑의 행함은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 (6절) 이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6절) 우리에게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4. 요한이 말하는 두 가지 사랑의 행함은 우리의 사랑이 결코 감정적인 사랑이나 말 뿐이 사랑이 되어서는 안됨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이 빛 (선함) 그 자체 이시기 때문이다. 

5.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고, 절대적으로 선함이라는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라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마땅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게 된다. 모든게 우연인데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겠는가?

6. 그 절대적인 선과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오셔서 그 선함과 사랑에 대해 모범을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빛이신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7. 예수님께 보여주신 사랑은 말도 아니었고, 단순한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의 행함을 보여주셨고, 십자가에서 그 분이 행하신 사랑의 행함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러기에 6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가 행하신 ‘사랑의 행함'대로 우리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8. 오늘 내가 행하여야 할 ‘사랑의 행함’은 무엇인가? 요한 사도가 강조한 두 가지이다. 범죄하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의 행하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아내가 한국에 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전적으로 돌보면서 지내야 한다. 아내는 내가 아이들에게 너무 엄하게 하거나 아이들이 짜증을 낼 때 받아주지 않고 혼낼 것을 염려하고 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조금 더 너그럽고 조금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가정 안에서 ‘사랑의 행함'이 없는 사람이 무슨 사역을 하고 다른 사람을 어찌 섬기겠는가? 

9.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정확히는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가 행하시는대로 오늘 행하며 살아가기 원한다. 조금 부족함이 많더라도 그 분을 따라가며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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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4. 1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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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1:1-10 연약해도 사랑하면 사랑의 관계가 확장된다

1. 요한이 그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은 ‘사귐'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3절 상반절) 이 사귐이라는 것은 사랑의 관계의 확장이다. 

2. 그런데 그가 복음을 전한 것은 단순히 성도간의 교제 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3절 하반절) 복음의 교제는 성도간의 교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과의 교제를 의미한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또한 확장된다. 

3.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교제가 없는 자들로 하여금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은 믿는 사람들 사이,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킨다.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

4.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들과 어떠한 교제를 하고 있는지, 정말 내가 복음을 가진 자로써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이 사랑의 관계를 확장하고 있는 자인가? 

5. 부활절 주일 저녁에 예전에 기숙사에서 섬기던 자매로 부터 연락이 왔다. 그냥 얼굴만 보고 잠시만 만나고 가고 싶다고.. 너무나도 아끼는 자매이지만 여러 이유에서 연락을 잘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오라고 했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아래는 페이스북에 남긴 글 중의 일부이다. 

6. “복음과 마음, 그리고 삶을 나누었던 영적인 딸 같은 자매이고, 지금은 태국 공립학교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이 자매가 태국 설날이라고 찾아왔다. 꽃을 가져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대신 과일을 가져왔다. 
나이 자매가 느낀 그런 미안함과는 달리 나이 자매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꽃과 같았고. 나이 자매의 삶 그 자체가 나의 지난 선교 첫 번째 텀인 2011-2014년을 아름답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고, 나이 자매와 짧은 나눔과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선교사로서의 첫 텀, 그 시절 내가 복음을 가진 자로써 나이 자매 앞에서 충분히 살아내지 못했음에 미안했고, 지금은 또 나에게 주어진 다른 영혼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음이 미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음을 붙들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나이 자매를 통해서 충분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7. 내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었다. 내가 잘해서도 아니고 그저 주님의 은혜로 일어난 일이었다. 요한이 말한 것 처럼 나이 자매에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확장이 일어났고, 이것은 누군가가 잘해서가 나타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8. 내가 좀 더 잘하면 사랑의 관계가 좀 더 잘 형성되고 확장되겠지만, 감사한 것은 내가 잘 하지 못하고 부족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 사귐을 확장해가고 계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절망감이 먼저 찾아왔다. 나는 복음을 가졌지만 충분히 복음적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부활절 주일에 있었던 일, 또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보니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부족한 중에도 충성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귐이 사랑의 관계가 확장되어 가기 때문이다.

9. 부족하지만 오늘을 또 그렇게 살아가기 원한다.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며 사랑하기 원한다. 연약해도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넘어저도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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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2. 4. 1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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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6:9-20 삶의 목적과 부르심을 따라가는 삶 (맨 아래 기도제목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그 분의 삶의 목적과 부르심에 따라 이 땅에서 인간의 몸으로 사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리고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삶은 그 목적과 부르심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삶이었다. 그래서 살아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도 예수님의 삶의 목적과 부르심을 따라가는 것 이었다. 

2.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5절) 아주 간결한 문장이지만 예수님의 삶의 목적과 부르심에 일치하는 명령이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것 처럼 그 부르심을 따라 이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된다. 

3.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면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삶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기뻐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과 부르심을 따라가는 삶이어야만 한다. 

4. 물론 내가 좋아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을 주님이 싫어하셔서 강제로 빼앗아가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 단 한 번 임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처럼 제자들처럼 나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찾고, 그 부르심을 따라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5.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다른 많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며 15절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중요한 말씀임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은 쓸데 없는 말을 하시거나 여러 말을 길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6. 다시 한번 내 삶의 목적과 부르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내가 태국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 한번 묵상해 본다. 어제 밤에 아내와 마라가 급히 한국으로 들어갔다. 애착이 깊었던 아내의 친할머니를 뵈러 간 것이다. 어쩌면 이 땅에서 뵙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고민 끝에 한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항으로 배웅 갔던 요엘이가 화를 내며 서럽게 울었다. 이유는 자기도 한국에 너무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빠는 왜 태국으로 와서 자기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아빠를 원망하며 우리도 다른 사람처럼 한국에서 살면 안되냐고 물었다. 

7. 이미 몇 차례 이번에는 한국에 갈 수 없고 내년에 함께 가자고 설명했지만 요엘이가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모습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좀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요엘이가 하는 원망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태국에 오기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그저 태국에서 이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것 뿐 아닌가? 그 뿐 아니라 태국에 있느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도 뵙지 못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족과의 만남도 재정과 사역지의 상황을 수없이 고민하며 결졍해야만 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8. 다 답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바로 내 삶의 목적이고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왜 수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견디면서 태국 땅에서 살아가는지, 왜 아들에게 원망을 듣고,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며 살아야 하는지 한 가지로만 답할 수는 없겠지만 이 땅에서 태국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이것이 바로 나의 부르심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요엘이가 언젠가 부모를 이해할 날이 오길 바란다. 

9. 나 또한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삶의 목적과 부르심을 점검하고, 부르심을 쫓아 살아가기 원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하신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이 되길 원한다. 그렇게 살아가다 죽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한국에 오늘 도착한 아내와 마라가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순적하게 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그리고 마음이 많이 속상한 요엘이를 주님께서 위로해주시고 만나주시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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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1-11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는 삶

1.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돈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필요악'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고, 많은 상반된 이슈가 있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돈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신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2. 오늘 본문에는 돈을 사용함으로써 온 역사의 기록에 남은 두 사람에 대해서 나온다. 한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는 한 여자로 나오지만 다른 본문에서는 마리아라고 나오는 여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롯 유다이다. 

3. 그녀는 자신이 가진 ‘전부’인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온전히 다 부었다 (2절). 가롯 유다는 그녀에게 (오늘 본문에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며 왜  그것을 낭비하냐고 말을 했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님께 두는 가치의 차이였다. 

4.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 하나님으로 믿었기에 예수님보다 더 큰 가치는 그녀에게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가롯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에 더 이상의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자들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로 결정하였다 (11절).

5. 두 사람의 인생에서의 예수님의 가치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갈랐다. 9절 말씀처럼 두 사람은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두 사람을 기억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린 아름다운 여인으로, 가롯 유다는 자신의 욕심으로 스승을 판 천하의 파렴치한으로 말이다.

6. 우리 모두는 작게든 많이든 가진 자들이다. 그 가진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예수님께 어떤 가치를 두고,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우리)에게 달려 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 처럼 사랑함으로 베풀고, 사랑함으로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삶이 예수님께서 우리 가진 자들에게 기대하셨던 삶이 아닐까? 

7. 예수님이 전부셨던 온누리 선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삶이 떠오른다. 그 분들은 한센병 환우들로써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 장례비 등을 모두 모아서 선교지로 보내어 수 많은 환우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 땅에서의 그 분들의 삶은 빛나거나 화려하지 않았지만 지금 천국에 계신 많은 분들의 삶은 별같이 빛나고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아낌 없이 주님을 위해 드렸기 때문이다. 

8. 나는 나의 가진 것을 나누고 있는가? 사랑을 베풀고 있는가? 나누고 있는가? 예수님이 내가 가진 가장 귀한 분이시기에 내가 가진 물질과 소유 또한  아낌없이 나누고 있는가? 최근 부모님이 쓰러지신 교회 성도의 가정에 헌금을 했다. 확실히 내 소유가 흘러가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게 되고, 기도하게 되었다. 얼마를 가졌냐보다는 내가 예수님을 누구시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께 어떤 가치와 소망을 두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 가치와 소망을 따라 마리아와 같이 가족들에게, 성도들에게,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드리고, 나누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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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28-37 깨어 있으라

1.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바로 ‘깨어 있으라' 이다. 왜 깨어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언제 일어날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징조는 알 수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8절) 징조가 일어나면 그 징조를 통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분별해야만 한다. 

3. 하지만 징조는 딱 거기 까지이다. 징조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뿐이고, 실제로 언제 어떻게 인자가 다시 오실지를 알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4.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5절) 

5.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순교의 자리에서도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찬양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부활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죽음을 그저 통과의례였을 뿐이었다.

6. 지금의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2000년이 넘도록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무뎌진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래도록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림의 관성’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은 아닐꺼야'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7. 내 영이 깨어 있어야 하는데도,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를 생각하며 늘 민감하게 살아가야 하는데도 너무나도 무뎌지고 너무나도 타성에 젖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있는데도  거기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나 자신을 악한 것들로 부터 지키기에만 급급하지 않는가?

8.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나 자신만 말씀 위에 서서 나를 잘 지키고 잘 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함께 영적으로 예민하게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교인들에게, 주변의 이웃들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기 원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깨어 있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이 없다면,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거라는 절실함과 긴박감이 없다면 정말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9. 깨어 있는 자로 오늘을 살아내기 원한다. ‘기다림의 관성'이 내 삶을 무뎌지게 하지 않기를 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깨어 있기를 원한다. 교회의 리더십들에게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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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1-13 그냥 좋은 것 말고 가장 좋은 분!

1.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그 어느 민족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셨지만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성전에서 만나주시기 때문이었다.

2. 하지만 너무 큰 자부심은 이 성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만들었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본질적인 역할 보다는 성전 그 자체가 우상화 되기 시작하였다. 종종 듣는 말 처럼 선물을 주시는 분 보다 선물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2절) 라고 예언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은 70년에 로마군의 침공으로 일어났다. 정말 싹 무너져 버렸다. 

4.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곳이다. 성전 그 자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성전에 잘못된 우리의 욕망을 투사하거나, 성전을 본래 기능은 상실한채, 성전 자체만을 자랑하게 되면 그것은 문제이다. 성전이 유대인들에게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5. 우리 삶에도 이러한 성전들이 많다. 분명히 좋은 어떠한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파괴될 수 밖에 없다.

6.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사역, 자녀, 재정… 다 중요하고 다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결코 안된다.  

7. 오늘 다시 내 마음을 다른 것들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부터 오는 좋은 것들이 하나님보다 높아지지 않기를 원한다. 어떤 사역도, 가정의 일도, 재정의 문제도 하나님 보다 커서는 안되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는 일보다 더 마음을 쏟아서는 안된다. 

8.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분께 나의 삶을 드리기 원한다. 무너질 것들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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