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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14:1-15 참 평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1.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다. 이 평안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 아사의 땅에는 전쟁도 없었고, 그는 힘을 모아 성들을 건축할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그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6절)

2. 평안을 누리는 일은 너무나도 부러운 일이다. 특히나 지금과 같이 평안을 찾기 힘든 세대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그가 평안을 누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비결은 2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3. 4절에서 또한 설명하기를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5절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평안에는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4. 평안을 위해서는 우리도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 자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의와 공의를 행할 힘이 그리 많지 않다. 때로는 가능하지만 더 많은 시간은 죄를 짓고 살아간다. 아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애썼다. 우리도 애쓰면 어쩌면 잠깐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망적인 우리들에게 새로운 산 소망을 주셨다“인애(Steadfast Love)와 진리(Faithfulness)가 같이 만나고 의(Righteousness)와 화평(Peace)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시 85: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우리의 힘으로 평안을 누릴 수 없기에 그 분의 사랑과 진리, 정의와 화평이 만나는 그 한 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6. 그래서 그 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 16:33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율법이 완성되어 의로움이 흘러 넘치며, 모든 사랑이 충만하여 그 평안이 흘러 넘치는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오직 그 분 안에서만 평안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7. 나는 누구 안에 거하고 있는가? 어디에 있으면서 평안을 누리려고 하는가? 아사와 같이 어쩌면 가능한.. 때때로 일시적으로 가능한 평안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 일시적 평안에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오직 예수 안에서 구할 수 있는 평안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지는 않은가? 

8. 오늘도 예수 안에 거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세상이 어지럽고, 코로나의 확산으로 인해 불안하고 선교사로써 무능해 보이는 시간을 경험하면서도 예수 안에 거하길 원한다. 그 분의 참 평안 안에서 쉼을 누리며 그 분의 사랑을 누리길 원한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만 참 평안을 경험하길 소망한다. 내가 그 분 안에, 그 분이 내 안에 계시는 그 신비를 경험하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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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3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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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12:9-16 유일한 참 소망 예수 그리스도

1. 르호보암은 인간이 어떤 존재지인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제 묵상에서도 봤지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손을 구하는 자였다. 인생을 거의 마감하는 시점에 섰지만 그는 거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2. 9절을 보면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랬더니 12절에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3. 하지만 13절에 “르호보암 왕이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세력을 굳게 하니…”라고 기록된 후에 14절은 또 다시 그의 넘어짐을 기록하고 있다.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

4. 약해지면 하나님을 찾고 (스스로 겸비하고), 강해지면 악을 행한다. 우리 삶에 있는 악의 존재는 이렇게 끈질기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같지만 어느덧 순식간에 다시 나를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5. 이것은 비단 르호보암과 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들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르호보암의 삶의 결론의 죄의 삯인 “사망”이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랴” 롬 7:24

6. 우리의 힘으로 죄를 해결해보려는 노력은 이렇게 허망하다. 힘들면 의지하고, 좀 괜찮으면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이러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잘 아시기에 영원한 용서를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어린양으로 보내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우리의 연약함은 그 분 안에서 감추어진다. 

7. 내가 가망이 없다고 깨닫는 것, 나에게서 아무런 소망이 없고, 르호보암과 같이 절망적이었지만 내 삶에 한 소망이 나타나셨음을 믿는 것이 소망이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의 문제 해결의 차원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우리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8. 나의 삶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를 원한다. 절망의 반복 속에서도 참 소망을 따라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도 넘어지고 오늘도 나에 대해 실망하는 내 삶이 그리스도로 인해 참 소망을 얻게 되기 원한다. 4월의 마지막 날이다. 5월에는 더욱 더 예수를 사랑하고, 더욱 더 예수 안에 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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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2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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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12:1-8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얼굴을 구하는 자

1. 어제 본문에 따르면 르호보암의 나라가 하나님을 쫓는 자들로, 예배하기 원하는 자들로 인해 강해졌다. 하지만 그러한 강하여짐은 르호보암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었다. 르호보암의 교만은 단순한 한 사람의 교만 그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나라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2.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1절)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랑해서 얻은 강함이 오히려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따라하도록 만들었다. 

3.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켰던 이유는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율법을 지켰던 이유는 그들의 안전과 강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킨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강하여졌더라도 계속 율법을 지켰을 것이다. 

5. 이렇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을 ‘기복신앙’이라 한다. 복을 구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이 복 그 자체이신데도 그 하나님께 다른 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원한 생수에게 가서 먹고나서 목이 마른 다른 물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6. 이것이 르호보암의 모습이고 또 나의 모습이다. 언제든 나의 유익만 채워지면 나의 필요만 채워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데간데 없다.  하나님을 이용하고, 또 이용한다. 사역에서도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7. 하지만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멸하시지 않는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으신 것 처럼 말이다 (7-8절). 지금 나는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나의 필요)인가?  손이 아니라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8.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나의 초점을 맞추기 원한다. 코로나가 잠잠해질 줄을 모른다. 태국 전역은 2,000명이 넘고 방콕은 계속 1,000명 가까이 감염자가 나오고 있다. 전화와 라인을 통해서 계속 심방하고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얼굴을 구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격려하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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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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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11:13-23 무엇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가? 

1.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이 되었다. 북쪽 이스라엘의 여러보암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길로 가기 시작한다. 15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을 세움이라"

2.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을 섬기기 위해 기존의 레위 제사장들이 직분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4절) 권력을 잡고 나서 여러보암은 하나님과 완전히 등을 올린 것이다. 마치 지금의 세상처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같은 모습니다.

3. 하지만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모두 르호보암 쪽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곳에서 살 수 없다는 그들의 굳은 의지가 보여지고,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들의 모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나아간다.

4. 그리하여 르호보함은 강성해진다. 그들이 와서 군사력이 되었기 때문에 강성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해졌다. 우리의 강함은 말과 기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함에 있다.

5.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인가? 주님을 예배함이 나의 힘인가? 주님을 경외함이 나의 힘인가? 아니면 세상이 만들어낸 그들의 신이 나의 힘인가? 무엇이 나의 힘이고, 무엇이 나의 소망인가?

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네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73:25-26 이 것이 나의 소망이고 나의 힘이고, 나의 능력인 것이다.

7. 코로나로 인해서 점점 위축된다. 같은 단지 안에 두 번째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아내가 아는 인도 선교사님도 코로나에 확진 되었고, 방콕에서도 한 선교사님이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 매일 확진자는 2000여명에 육박하고 그 중 1000명은 방콕에서 걸린 사람들이다. 

8. 나의 안전과 힘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내가 만든 안전이란 우상? 내가 생각하는 지금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함이 힘이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힘인가? 두렵고 염려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피난처와 의지할 바위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

9. 잊지말자. 여로보암은 총 10개의 지파였고, 르호보암은 단지 2개의 지파였다. 하지만 르호보암이 강해진 것은 사람이나 기병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이 예배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강하게 만드셨다. 모든 능력과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 분만 믿고 신뢰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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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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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9:1-12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위해 받은 은사

1. 솔로몬은 자신의 명성을 듣고 온 스바 여왕의 모든 질문에 대해 만족하게 답을 해주었다. 어떤 질문을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는 ‘어려운 질문으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1절)

2. 여왕의 질문에 대한 솔로몬의 답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녀는 매우 만족하였고,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칭송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칭송은 먼저 자기가 들은 소문이 당신의 실제 지혜의 반도 되지 않음을 칭송하고 있다 (5-6절).

3. 그리고 나서 당신들의 신하들이 매일 당신의 지혜를 들을 수 있어서 복되다고 칭송한다 (7절). 그리고 나서 그녀는 쌩뚱맞게 하나님을 송축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하나님을 송축할지로다" (8절)

4. 8절은 이방 왕에게 나왔다고 믿기 힘든 대답이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고 그 자리에 올리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왕이 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세워 그들의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5.  그녀의 고백의 핵심은 당신이 그렇게 지혜롭고 당신이 왕이 된 이유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가 되게 하려는 것도 맞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위해서이다.

6.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아보셨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명령하셨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이유를 이방 여왕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가 어떠한 은사를 가진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7. 신약의 전통을 따라 우리의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세워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은사를 받은 이유는 또한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나님의 샬롬이 없는 곳에 샬롬을 회복시키는 것이 선교이듯이 우리의 은사들은 이 샬롬이 없는 곳에 샬롬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8. 지금 나의 은사는 어디에 주로 사용되고 있는가? 정의와 공의가 먼 이야기 같이 들릴 때가 많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정의와 공의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누가 정의와 공의를 붙들 것인가? 하나님의 이 성품을 누가 드러낼 것인가?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 

9. 어제 페북 메신저로 지난 주 부터 온라인 예배를 드리던 아직 잘 모르는 태국 형제로부터 자기가 실직을 해서 직업을 구하고 있는데 생활비가 없는데 돈을 좀 빌려 줄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다 (지금 어느 곳이나 그렇겠지만 관광산업이 멈춰서 태국 경제상황이 많이 어렵다). 믿음의 형제들과는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에 미안하다고 했고, 기도를 해주었다. 하지만 돈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먹을 것이라도 사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묵상을 하며 들었다. 그를 위해 상황을 더 알아보고, 돈이 아니라 필요한 음식이나 생필품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좀 알아봐야겠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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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2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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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8:12-18 믿는 자의 삶의 모습

1. 성전 건축이 다 마친 후에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명령을 따르게 한다. 첫 번째는 모세의 명령이다.

2. 13절을 보면 “모세의 명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다. 

3. 그리고 또 그들이 지킨 것은 14절에 나오는데로 아버지 다윗의 규레를 지켰다. “솔로몬이 또 그의 아버지 다윗의 규레를 따라…” 그는 아버지가 성전에서 내린 명령들과 하던 것들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성전의 완공은 “결점 없이 끝났다” (16절).

4. 그리고 솔로몬은 이제 바다를 통한 무역에 집중하게 된다. 모든 것이 완성된 후에, 온전하게 된 후에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랴? 하지만 성전의 완공과 크게 관련없는 17-18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 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니 무역이라기 보다는 삥을 뜯어온 것 같다. 솔로몬의 나라가 이제 강해지고, 안정되어지자 자신들의 강함을 앞세워 조공을 받아온 것 같기도 하다. 금 사백오십 달란트는 작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1달란트를 대충 계산해도 현재 가치로 약 20-25억 사이니까 말이다.

6.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에 드러내야 하는 역할이었다. 하나님을 등에 입고 삥을 뜨거나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그런 역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그렇게 한 것이었다. 

7. 우리 크리스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을 이 땅에 반사하는 거울이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과 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윗의 다윗 되었던 이유는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물으며 걸어가는 그 삶 때문이 아닌가? 밧세바와의 사건에서도 그는 나단의 책망에 회개하지 않는가?

8. 하나님을 등에 업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다른 자들을 착취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써 정말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나의 삶은 어떠한가?를 돌이켜 보게 된다. 삥은 뜯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반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전달되고 있는가? 맡겨주신 사명을 잘 전달하고 있는가? 

9. 나로 인해 샬롬이 선포되고 있는가? 하루 확진자가 1500-1700명이 되는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 자꾸만 위축되고 있다. 활동도 하기 힘들고.. 하지만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좀 더 연락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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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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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8:1-11 나는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1. 솔로몬이 여호와의 모든 전과 자신의 궁궐 건축을 20년 동안 건축하고 이제 마쳤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충분해 보였다. 

2. 하지만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그의 또 다른 면이 나온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에 이르러 이르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 (11절)

3. 그는 이방인인 자신의 이집트인 아내가 결코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것을 알았다면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분명코 알았을 것이다. 만약 저 여인이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었다면 그 여인은 다윗의 왕궁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4. 하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풍습과 애굽의 신들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었고, 그녀는 당연히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여자였다. 솔로몬은 그것들을 다 알고 있음에도 애굽 여인, 아니 바로의 딸과 결혼했다. 흔히 말하는 정략결혼이었을 것이다. 

5.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전의 그 아름다움과 그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도 뒤로는 애굽여인과 정략결혼을 한 솔로몬.. 그런데 그의 이러한 모습이 나에게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6. 한 쪽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다른 쪽으로는 내 머리를 굴리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굳이 솔로몬만의 모습이 아니다. 내 삶에서도 아마 매일 보는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나를 더 사랑하고,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7. 결국 이스라엘은 쇠퇴하고 만다. 솔로몬의 이러한 삶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인가? 바로의 딸로 대표되는 세상의 권력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우리는 결정해야만 한다. 

8. 안전과 평안은 세상의 권력자의 딸과 결혼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그 분을 경외함에서 나온다. 물론 지혜로운 외교나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 다른 것들을 붙드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인가? 다른 것인가? 결정해야만 한다. 

9. 늘 연약하고 부족함에도.. 솔로몬과 같이 뒤로 딴 짓을 하더라도 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기 원한다.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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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2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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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7:11-22 조건없이 그 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1. 세상 그 어느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는가?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15절)

2. 그 분의 눈과 마음이 항상 이 성전 위에, 이 성전에세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있겠다 하셨다. 이러한 엄청난 축복을 받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또한 경고 하신다. 

3.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20절) 하지만 그 경고는 선행 조건이 있다. 19절이다.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레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4. 하나님께서는 조건없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달렸다. 그들만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5.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도 우리가 무엇인가 잘하면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배교나 변절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셨다. 남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하나님을 사랑며 그 분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뿌리뽑혀 죽을 것인가? 이스라엘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그들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7. 하지만 이게 곧 나의 모습이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되는데, 그게 너무나도 안되는게 바로 나이다. 자꾸 다른 것에 눈이 간다.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 나의 신랑인데도 고멜과 같이 창기가 되어 다른 것에 한 눈을 팔고, 다른 것에 내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8. 나는 지금 조건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조건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하나님 이 것 좀 해주세요, 하나님 이 것 좀 주세요" 아내가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9.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절하지 않으신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가장 큰 사랑을 받았기에 나도 그렇게 사랑하고, 거절하지 않기를 원한다. 늘 넘어지고 안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오늘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닮기 원하며..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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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19.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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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7:1-10 하나님과 사람의 간격을 메운 제물, 예수 그리스도

1. 솔로몬의 스케일은 참 크다. 어마어마한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쳤고, 그 성전 봉헌식도 말도 안되게 엄청난 규모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신다. 그리고 불로 임하신다. 

2. 1절에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3. 모든게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샬롬이라면, 하나님의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도 샬롬일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 순간..  죄인인 인간은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그 누구도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갈 수 없게 된다 (2절).

4. 그리고 죄인인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대신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솔로몬은 역시 엄청난 스케일로 소를 이만 이천 마리, 양을 십이만 마리를 드린다.  

5. 말도 안되는 숫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간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하나님과 우리와의 간격은 크다. 그정도로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6. 성전 봉헌식에서 더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 분과 우리와의 간격이다.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내 자신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소 이만 이천 마리, 양 십이만 마리를 드려도 그 간격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7. 우리는 그 정도로 답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신다면 상황은 다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가장 귀한 그의 아들의 생명을 제단에 바치셨다 (사실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의 죄물로 드려지는 것 외에는 없었다. 

8. 나는 그런 존재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의 값을 치룬 존재… 내 스스로가 작아 보이고, 연약해 보여도 나의 가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작아지지 말자. 그 분이 세상을 이기셨다. 언젠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장면을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이다. 

9. 그 때는 그 분의 영광 앞으로 더 깊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움츠러들지 말고, 쫄지 말자. 나는 싸구려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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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4. 1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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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6:1-11 모든 것 되신 분이 한 점으로..

1.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샬롬이다. 그것이 평안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계셔야 하고,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제 성전이다. 솔로몬이 언약궤를 성전 안으로 가져왔고, 이제 모든 회중들이 그것을 보고 있다 (3절). 

2. 하지만 지금 이 샬롬은 하나님의 샬롬은 아닌 것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성전이라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만든 것이지 하나님께는 사실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고 온 우주에 하나님은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3.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무례한(?) 요구에도 응답해주시고, 성전으로 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가 정해 놓은 그 한 곳으로 오셔서 샬롬을 이루신다. 모든 것이신 분이 한 점으로 오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고 은혜인가? 

4.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전의 필요를 이루신 완전한 성전이신 것이다. 친히 하나님의 본체께서 아예 이 땅으로 오셔서 그 몸을 깨뜨려 제물로 드려주시고, 모든 말씀을 응하게 하셨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본 성전은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나 불완전한 성전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임재하였지만 여전히 부족한 성전이었다.

5.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 때, 이미 그 아름다운 솔로몬의 성전은 없어지고 난 후 였고, 그보다 못한 헤롯의 성전이 남았을 뿐이었지만… 온전한 성전이 오셨기 때문에 그림자들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6.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이제 더 이상의 성전은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고,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 회복해야 할 샬롬이 너무나도 많지만… 

7. 이제 그 어느자리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제물도 드릴 필요가 없다. 완전한 제사장, 완전한 성전, 완전한 제물로 오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8. 하나님께 늘 무례한 요구만 하는 나 같은 자의 요구에도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나 같은 자를 구원하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이렇게 선교지까지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에 감사드린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그 완전하심과 온전하심을 전하는 것이다. 

9. 태국의 코로나 상황이 코로나 시작 이후로 가장 심각한 요즈음이다. 복음을 전하는게 가능이나 할까? 라는 생각도 든다.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모든 것 되신 그 분께서 온전히 한 점(성도의 삶)으로 임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기도하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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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