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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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8:9-22 하나님이 내 삶에 반석이 되시는 삶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시는 삶과 하나님이 나의 삶에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는 삶은 얼마나 다른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자의 삶이 아니라 후자의 삶을 택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을 만들려고 한다(14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어느 누구를 우리의 적으로 혹은 우리의 대적으로 두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스트레스를 받고 힘이 드는데, 그 상대가 어느 누가 아니고 온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을 나의 대적으로 둔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아니 옴짝달싹 못하고 우리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참혹한 길을 택하려고 한다. 엄청나게 간땡이가 부은게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 지금 나에게도 이 선택권은 있다. 하나님을 나의 반석으로 모실 것인가? 아니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로 둘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반석으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두기 위해서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20절). 그 분만이 옳으시고, 그 분만이 길이시며, 그 분만이 변하지 않는 참 소망 되심을 내 삶에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무지하고, 우리는 무능하지만 무한하게 지혜로우시며, 영원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을 쫓아가는 삶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야 하나님이 비로소 내 삶의 반석이 되는 것이다.  

 

매일 주시는 ‘증거의 말씀’을 쫓아가기 원한다. 왜냐하면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 삶의 반석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모른다.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나에게 무엇이 선한 길인지,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는 고백으로 그 말씀을 쫓아갈 수 밖에 없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이 말씀은 따라도 되고 거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더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 기도한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분별할 수 있도록… 내 욕심과 내 생각이 내 삶을 이끌어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나를 내어 드린다. 두려워도 그 길을 가기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가 되시니 그 말씀만 쫓아가기 원한다. 하나님이 내 삶에 반석이 되시는 그 삶을 오늘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한다. 

 

https://youtu.be/xTsZz-Aj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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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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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8:1-8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가고,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는 길로 가자. 

 

올 해가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말이 있다면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가고,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는 길로 가자’였다. 벌써 5월이 되었지만 묵상 속에서 여러 번 되뇌이게 하셨고,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오늘 본문 이사야 8장에서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6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했던 것은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7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으로 강해 보이고, 빨라 보이고, 힘이 있어 보이는 그것들을 의지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느리더라도, 빨리 가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천천히 흐르는 물이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눈으로는 뭔가 충분해 보이지 않고, 뭔가 부족한 것 같고, 그 시작함이 어렵게 느껴지는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뒤편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이 있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느리더라도 빨리 가지 못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가야하는 그 길일 것이다. 

 

지금은 빨라 보이는, 힘이 있어 보이는 그것을 선택하게 되면 결국은 그것이 가득하여 목까지 가득차게 되어(8절) 나중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마음에 되네인다.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가고,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는 길로 가자.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의지하자. 그 실로아 물을 천천히 흐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내 눈이 빨라 보이고, 강해 보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면 바른 길로 함께 가는 길로 가지 못한다.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가고,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는 길로 가자. 

하나님 믿음이 연약한 저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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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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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7:1-9 삼가며 조용하고, 굳게 믿는 것!!

 

아람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연합하여 유다를 치러 왔다 (1절). 하지만 그들은 이기지 못한다 (2절).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거짓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기의 순간이 지나고 나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의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나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4절)

 

그들의 악한 꾀가 있지만 (5-6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7절)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신뢰해야 할 것은 하나님 한 분 이시다. 그것이 언약이 있는 백성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유다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신 것이 아니다. 유다를 통해 약속된 거룩한 씨앗을 위해 유다 백성들을 지켜주시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거룩한 씨앗이 오셔야 하기 때문에 다윗의 왕가가 보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일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이다 (9절). 그 하나님의 약속을, 그 하나님의 성품을, 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한다. 굳게 믿어야 굳게 설 수 있다 (9절). 삼가며 잠잠해야 한다 (4절).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의 자세이다. 사람들이 악한 꾀로 계략을 쓰고, 군대가 나를 치기 위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아도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이다.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9절).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말씀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환경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딱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삼가며 조용하고, 굳게 믿는 것!!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보내기 원한다. 

삼가며 조용하고, 굳게 믿는 하루를 살아내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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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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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6:1-13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우리를 부르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로 표현되는 그 분의 영광을 본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 밖에 없었다. 5절에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라고 말하고,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라고 말한다. 자신도 백성도 부정한 자들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부정한 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 이사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5절 전반부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소망이 무너지고, 이제는 아무런 희망조차 남지 않았을 때 (9-12절)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거룩한 씨’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화로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정결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소망이 없는 우리의 인생에 그 거룩한 씨를 주시는 분도 결국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다 (13절). 우리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조금도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8절) 우리가 무슨 보탬이 된다고 우리를 부르시는 걸까? 시작도 하나님께서 마무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굳이 왜 우리를 부르시는 걸까? 하나님은 그 거룩한 씨앗이 우리를 통해 전해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구원 계획의 시작과 끝, 구원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하나님은 그 구원 계획의 전달자로는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일에 동역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씨앗이 이 땅의 그루터기로 남도록 우리를 가라고 부르셨다. 사명은 틀림없다. 부르신 대로 이 일에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질문은 ‘어디로 나를 부르셨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도대체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가? 

 

오늘 이사야를 부르실 때에도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이 질문에도 어디로가 빠져있다. 자신들의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보내시는 것이지 소위 어떤 ‘장소’의 개념은 빠져 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르심에도 보니 ‘어디로’가 빠져 있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앞으로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물론 아브라함은 창 12:5절에 보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이전 구절을 봐도 하나님이 가나안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다. 다만 12:4절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구하여야 한다.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서 나를 부르셔서 지금 이 곳에 있다면 내가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섬기고 영혼들을 사랑해야 할지 물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면 이제는 그 거룩한 씨앗이 그루터기가 되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더 묻고 들어야 하겠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과 같이 ‘말씀을 따라가는’자가 되어야 하겠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며 묻고 듣는 오늘 하루, 그리고 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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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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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24-30 내 귀에 계속해서 말씀이 들리는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그들의 태도들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었다 (24절).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도 그들은 결코 돌아서지 않았다. 그것이 심판의 경고인지도 몰랐던 그들에게 이제는 흑암과 고난이 찾아오게 된다 (30절). 경고하시는 주된 이유는 돌아오라는 것이다. 죄의 자리에 서 있지 말고 나에게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 경고는 사랑이다. 돌아오라는 사랑의 신호이다. 

 

그들에게 여전히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들리우고 있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말씀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경고도 없다. 그저 심판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사랑의 경고의 말씀이 들리우고 있다. ‘내가 심판하겠다’ 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니느웨 백성들에게 요나를 통해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이 큰 성이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자 심판은 멈췄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곁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우리가 깨어지고, 죄악되고, 넘어지고… 어떠한 모습 속에 있을지라도 돌아가야만 한다. 그게 내 귀에 말씀이 들리는 이유이다. 계속해서 하나님 품에 머물고 싶다. 그 분 안에 거하면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고, 나를 이끄시는 곳에 거하길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움직이는 자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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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13-23 무지함에서 오는 우상숭배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지함이었다 (13절). 그들의 무지함이 그들을 사로잡히게 하였고, 굶주리게 되었고, 목마르게 되었다 (13절).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이었고, 그들 자신에 대한 무지함이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지 못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의지하는 죄를 범했고, 그 죄는 그들을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모르면 망한다. 호세아서 4:6 전반부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라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대충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 한 분만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분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16절).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만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고 할 때,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선악을 아는 존재와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모르고 나도 모를 때 반드시 생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것이 무지함에서 오는 나를 섬기는 ‘나’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나에 대한 무지함에서 벗어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서 판단을 멈추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사랑하고, 그리하여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완전하신 나의 주님 저의 삶을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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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16-4:1 영원을 사모하는 삶

 

어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의지하였던 것이 삶의 실질적인 것들과 권력이었다면 오늘 본문에서 여자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교만 (16절), 그들의 치장, 장식 이었다(18-23절). 이스라엘이 여자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또한 눈에 보이고 화려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람의 속성은 눈에 보이는 것을 쉽게 믿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쉽게 의지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게 영원할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한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영원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진리보다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내 눈을 더 믿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자신의 눈을 하나님보다 더 믿고 있는 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그 영원보다 눈에 보이는 짧은 현재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경고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그 모든 것들을 가졌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시간을 피할 수가 없다. 24절을 보면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할 것이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있다. 보이는 것들은 순간이다. 순간 우리의 삶에 시련이 닥치고, 하나님의 때가 다가오면 언제 그런게 아름다웠었냐는 듯이 다 순식간에 사라질 것들이다.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에서 영원을 품고 살아가자. 눈에 보이고, 눈에서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그의 나라, 절대로 변하지 않는 그 분의 성품에 기대에 살자. 

 

눈에 보이는 것에 하루 하루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하루, 눈 앞에 닥친 그 어떠한 것들 보다도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하루 되기 원한다. 기도하는 제목들이 있는데, 더 하나님만 바라며 기도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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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1-15 하나님 곁으로 더 가까이 인도하시기 위해 버리도록 하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했던 것은 그들에게 익숙하고 실제로 좋은 것들 이었다. 1절과 2절에서는 그것들을 아래와 같이 열거한다.

모든 양식, 물, 용사, 전사, 재판관, 선지자, 복술자, 장로, 오십부장, 귀인, 모사, 정교한 장인, 능란한 요술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지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생존과 사회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1절). 왜냐하면 그 좋은 것들이 절대적이신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삶은 좋은 것들을 의지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삶이어야 한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도 자꾸만 이것 저것 재고 있을 때가 있다. 이 부분은 이것이 좋고, 이 부분은 이것이 나쁘고를 재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지 그 주변의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결정의 이유가 되어야지 다른 것들이 결정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내 삶의 이유가, 삶의 소망이 되셔야지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하면 안된다. 

 

익숙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자.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붙들 때,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실 것이다. 두려워 말자.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다.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시지만 그것은 나를 어렵고 두려운 상황에 밀어 넣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더 하나님 앞으로 가깝게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두려워 말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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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12-22 ‘그 날’이 오늘 임하시도록

 

‘그 날’로 표현된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가짜들은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 (12절). 이 여호와의 날은 세상 곳곳에 임하게 된다. 높은 백향목에도 높은 산에도, 높은 망대에도, 심지어 다시스의 모든 배와 조각물에도 임한다 (13-16절). 그리고 자고하고 교만하였던 자들에게도 임한다 (17절). 

 

하나님 대신 높아져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낮아지고, 오직 여호와만 높아지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그의 위엄과 광대하심이 드러나는 바로 '그 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날’이 되면 더 이상 가짜들이 숨기어지지 못하고 다 드러나고, 다 넘어지고, 다 깨어지게 된다. 그런데 단지 ‘그 날’만일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는 아직 그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고하고, 교만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직 모든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신다. 여전히 영광스러우시고, 광대하시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 날’이 되어 수치를 당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오늘을 ‘그 날’과 같이 살 것인가? 22절은 그런 우리에게 일갈하고 있다.

22. 너희의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우리 코의 숨이 멈추면 다 사라질 존재들이다. 길게 살아야 100년인 존재들이다. 우리 자신을 믿고, 우리의 인생을 맡길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나의 삶에 무슨 선한 것이 있고, 나의 삶에 무슨 깨달음이 있는가? 다 위로부터 오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지금 그 모든 것을 드러내시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지를… 오늘을 ‘그 날’처럼 살아가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만 의지하는 인생으로 살아가자. 호흡이 코에 있는 나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영광의 하나님만 의지하자. 하나님께만 묻고, 하나님께만 듣고, 하나님을 나의 삶의 기묘자로, 모사로 붙들고 그 분이 나를 인도해 가시도록 나를 내어드리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삶에 ‘그 날’이 임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묻고 따라가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 함이니라 합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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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1-11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사용할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열방의 왕으로 등장하신다.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백성들이 회복될 것이다.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여호와의 말씀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3절). 여호와께서 열방 사이에서 판단하시며,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4-5절). 그리고 그 날에는 눈이 높은 자, 교만한 자가 굴복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을 것이다 (10절).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기대했던 정치적인 왕,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만을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구원해주시는 그런 왕이 아니다. 열방의 왕이시다. 열방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판단하실 것이고, 결국은 이 세상은 회복되며 여호와 하나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11절).

 

하나님은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열방을 사랑과 공평으로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이 때때로 나는 그 열방의 하나님을 나만의 하나님으로 낮추고, 나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여 나의 만족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도록 나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할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했지만(때로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랑하고 있는데 나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가? 사용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라'라는 이 말은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사용하는 자가 되서는 안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지금 앞에 많은 생각들과 고민들이 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자. 이것이 내 정체성이고, 내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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