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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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9:16-25 무엇을 향한 불편함인가?

 

나름 그 당시 최고의 권력과 힘을 가졌다는 애굽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16절). 그들은 흔들리고 떨며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애굽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19절을 보면 애굽 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과 기둥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건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20절). 21절에는 여호와를 알게 하실 것이고 22절에서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치시지만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고쳐 주실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시기 때문이다. 인자하시며 노하시기를 더디하시는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끝까지 악인일 수 없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돌보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시다. 내가 뭐라고 그 사랑을 제한할 수 있겠는가? 내가 뭐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요나와 같이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도 그 사랑을 받은 자이거늘… 

 

이 번 주의 계획이 이래저래 다 틀어져 버렸다. 기존에 참석하려고 참가비를 내었던 세미나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비자와 워크퍼밋 등 기타 서류로 인해 더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있다. 하루종일 노동국과 이민국에서 대기중이다. 그러면서 오전 내내 드는 마음은 '이 곳은 왜 이렇게 불편하지?' '이 곳은 왜 이렇게 외국인들을 힘들게 하지?’ 란 마음이었다. 기존에 하지 않아도 되던 일을 갑자기 엄격하게 적용 하면서 오히려 벌금을 물리는 그러한 태도들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벌금도 많았다 ㅜㅜ. 왜 이러한 불편함들을 견뎌야 하는지, 왜 이러한 불합리함을 계속해서 경험하도록 하는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은근히 계속 짜증이 솟아왔다.

 

노동청에서 이민국으로 차를 몰고 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오늘 말씀처럼 이게 다 애굽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게 다 태국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국 때문이었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나그네의 삶은 안정적이지 못하고 늘 뭔가 불편하다. 불편한건 당연한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불편한가?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불편을 감수하고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국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국 때문에 나는 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고치시고 치료하실 태국 때문에 나는 지금 이 불편함 속에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불편함인지를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애굽을 고치실 주님께서 태국도 고치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불편함보다 더 크신 사랑을 이해하고 나니 나의 불편함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거란 생각에 감사하게 되었다. 항상 내가 문제이다. 불평하고, 불만을 가진 내가 항상 문제이다. 무엇을 위한 불편함인가? 주를 위한 불편함이다. 

 

그 불편함 가운데 감사함으로 오늘도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태국을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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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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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5:1-9 부르심을 알고 바로 따라가는 삶

하나님이 모압에 대해 심판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룻밤에 (1절) 모든 도시가 황폐화될 것이다. 그들의 죄는 그렇게 하루에 멸망하는게 마땅할 정도였고, 하나님은 이제 그렇게 하실 계획이시다. 

그런데도 선지자 이사야의 목소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들을 위해 부르짖는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5절 상반부)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어 이제 하룻밤에 망하게 될 그 성읍과 모압을 위해서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명이자, 선지자가 그 멸망해 가는 백성들을 향해 해야 할 슬프지만, 힘들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이사야의 이러한 태도를 보면서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기도하고, 중보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태국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들을 비즈니스 파트너 같이 생각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잘 하면, 잘 도와주면, 잘 따라와주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하고 마음이 어려워지는 시간들의 반복 말이다. 

그들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부르짖던 이사야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상당히 다름을 보면서 내가 어떠한 눈과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 형제, 자매들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으로 왜 부르셨는지를 잊지 말고, 내 사명에 맞는 태도와 마음을 가져야겠다. 

나에게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탄식이 없다면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사야와 같이 탄식하며 중보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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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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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4:24-32 하나님이 반드시 이룰 것이다. 

 

어제 참 머리 아픈 일들이 많았다. 비자 문제를 비롯해서.. 요엘이, 아내 언어 시험, 우리의 다음 스텝, 그리고 이번 주 설교… 등등등… 너무 머리가 아프고 내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어 수요예배를 다녀와서 그냥 잤다. 자고 아침에 언어 수업갔다가 말씀을 폈다. 그런데 첫 말씀이 24절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말씀을 읽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바로 알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 주신 마음이 반드시 되겠구나.. 반드시 이뤄지겠구나.. 나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27절은 이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시는 말씀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하나님이 마음을 주셨은즉 하나님이 이뤄가실게 분명한데 나는 또 상황과 환경에 휩쓸려 머리 아파하고, 마음을 힘들어 한 것이다. 헛된 수고를 하고 있으니 안 힘든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신다는데.. 하나님께서 하신다는데 그 누가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을 더 깊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하나님이 24절과 27절을 통해 나에게 하신 말씀은 ‘두려워 마, 내가 말한대로, 약속한대로 내가 이룰거야’ 라고 옆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와 같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순간 두려워 하는가?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에는 지금이라도 골리앗을 쓰러뜨릴 것 같은 용기와 담력이 있는 듯 하지만 반대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하고 이 상황이 나에게 크게 다가올 때는 그 하나님이 언제 나와 함께 하셨던가? 정도의 믿음으로 이 상황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경영하신 것은 반드시 이룰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내가 할 일은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과 한 걸음 씩 내 딛는 것이다. 두려워 말자.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신뢰하고, 그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을, 그 약속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루실 것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자. 그리고 그 안에 피하자 (32절). 

 

시 118:8-9

8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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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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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4:1-23 내 자리를 지키는 일, 내 자리를 내어 드리는 일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임을 잊어버린 바벨론은 교만하게 되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이 광대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이 넓은 우주에 티끌도 안되는 지구 위에 있는 한 높은 구름 위에 올라가서 한다는 말이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였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렇게 바벨론은 멸망하게 되었다 (22절).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모르니 나를 오해하게 되고, 나를 오해하니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1절). 그 분의 ‘긍휼’하심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게 하는 원동력이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그 어떠함이 아니다. 

역사를 그 분이 주관해 가신다. 내 앞에 펼처진 긴급함, 두려움들을 보며 주눅들지 말자. 내가 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나는 그 분에게 긍휼함을 입은 존재일 뿐이다. 나의 구원도, 나의 사역도, 나의 삶도 그 분의 긍휼함 안에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높아지려고도 하지 말자. 
내 자리를 지키고,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을 사랑하자. 

오늘도 나에게 주어신 일들에, 해야 할 일들에 그 분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자. 내가 하는게 아니다. 그 분이 하시는 일 가운데 기쁨으로 참여하는 오늘이 되기를 원한다. 

*오늘 특별히 기도부탁 드릴 것은 요엘이가 요즈음 몸도 마음도 많이 힘이 든 것 같습니다. 틱이 생겼는데 이전에 비해 무척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요엘이를 보고 있으려니 저희 부부도 마음이 참 어렵습니다. 요엘이와 요엘이의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음이 회복되어서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심을 알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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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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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3:1-22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자

 

바벨론에 대한 경고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직접 하지 않으시고,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먼저 하신다. 바벨론이란 땅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만한 자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일 가운데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1절).

 

17절을 보면 바벨론의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은 메대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들을 충동하여 바벨론을 치게 하신다. 메대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바벨론을 향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란 것을 알아야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내 주제를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이번 주 주일예배 설교이다. 그 어느때 보다 부담이 된다. 언어에 대한 부담 뿐만 아니라 설교 내용에 대한 부담도 크다. 왜냐하면 내 안에 설교를 잘 해서 복음이 나를 통해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내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또한 가득한 것 같다. 전혀 없을 수는 없는 마음이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마음들 때문에 준비에 부담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것도 문제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임을 잊지 말라는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이 부담감들과 내 생각들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냥 준비하는 동안에 주신 마음을 나누면 되는 것인데, 굳이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왜 자꾸만 올라오는 것일까? 내가 하나님의 도구임을 잊지 말고, 도구로써 최선을 다하는 설교가 되기 원한다. 내가 드러나고, 내가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주신 마음을 담담하게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나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이사야처럼 나에게 주신 말씀을 겸손하게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설교 준비가 되기를 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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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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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2:1-6 내 삶이 그 분을 향한 노래가 되기를 

 

이사야서 12장은 우리가 부를 찬송이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소망과 감사의 노래이다. 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이유는 11장에서 말한 내용 때문이다.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새의 뿌리에서 날 그  한싹으로 인해서 우리는 오늘도 노래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고 나의 노래이시고 나의 구원이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2절). 내 상황이 좋기 때문에 찬양하고,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찬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일어난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로 인해서 우리는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그 진노를 돌이키시고 (1절)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긷게 하셨기 때문이다 (3절). 또한 우리를 향해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다 (5절). 도대체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는가? 도대체 내가 나의 행위로 그 분의 영광에 뭘 더하거나 뺄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며 감탄하며 찬송하는 것 밖에 없다. 

 

내 삶에서 일어나게 되는 모든 일이 모두 그 분의 작품이다. 내가 하나도 잘 했거나 바꾸거나 발전시킨 것이 없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실 때에 그 옆에 함께 서 있었던 것 뿐이다.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할수 없다는 것, 그 분이 하신다는 것이 내 삶에 드러나길 원한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더 기도하면서 나아가길 원한다. 무엇인가를 내 뜻대로 하려고 아둥바둥 거리지 말고, 오늘도 내 삶이 그 분을 향한 노래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내 삶에 어떤 새로운 아름다운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자. 5절의 말씀처럼 ‘하셨으니'의 과거형이 아니라 오늘도 현재 진형이다. 하나님이 내 삶에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 새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 기대하자 그리고 찬양하고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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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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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0:16-34 ‘그 날’은 반드시 온다

 

이사야서에서는 항상 ‘그 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날엔 어떻게 어떻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16-19절에서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거룩한 불꽃에 의해 소멸될 것을 이야기 하고 있고, 20절에서는 '그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그 날’은 아마도 메시아께서 오시는 날, 예수께서 오셔서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는 날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사는 우리에게 이 날은 이미 온 것 같기도 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 바로 ‘그 날’이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그 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예언을 듣던 사람들은 아직 ‘그 날’이 아직 임하지 않은 때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미래의 일이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이 예언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 은혜의 때에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완전하게 다 회복되고, 완전하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날’이 도래한 것을 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닌가? 

 

이미와 아직의 때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여야 한다 (20절). 의지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온전하게 그 분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그 분의 정의와 공의가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넘치는 공의(22절)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느끼지 못하고, 나태하고, 대충 살아가지 않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시계는 계속 가고 있다. 내가 대충 살고, 나태하게 살아가도 계속 가고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계속 가고 있다. 헛되이 살며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원한다. 한 영혼이라도 더 사랑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하기를 원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완전한 ‘그 날’을 기다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사이에 있는 은혜의 시간임을 절대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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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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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0:5-15 오해에서 비롯된 교만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경고하시기 위해 사용된 도구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들을 크게, 강하게 만들어주시니 그들은 자고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왜 커졌는지, 왜 강해졌는지 그 이유를 모르니, 자신들의 힘으로 강해진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다른 나라들을 파괴하고 멸절하려고 하였다 (7절). 

 

하나님의 목적은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는데 있었지만, 앗수르의 목적은 그저 다른 나라들을 파괴하는데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지금 내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앗수르의 착각이었다. 결국 교만이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다. 내 힘으로 강해지고, 내 힘으로 부유해졌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상황에 대한 이해,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지혜롭고 더 강하기 때문에 내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교만함을 만든다. 

 

도끼보다, 톱 보다, 막대기 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더 중요한 법이다 (15절). 사용되는 것을 감사해 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고, 마음대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려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내가 누군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앗수르는 스스로의 강함을 본다고 자신을 보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 상황은 왜 이렇게 가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묻고 기록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 위치와 상황에 대해서 자고하지 않고, 오해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원한다. 

 

*제가 어제 운동하다가 허벅지 근육을 다쳐서 지금 잘 걷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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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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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9:8-10:4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기

배가 고픈데 밥이 없으면 빵을 먹을 수 있다. 과일도 먹을 수 있다. 대신할 수 있는 대체품이 있는 경우에 그렇다. 그런데 잠시 몇 번을 임시로 때우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매일은 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성이 무너지면 다시 쌓아야 한다. 벽돌이 무너졌는데, 아무 돌이나 다듬어서 그 성을 유지시킬 수 없다 (10절). 임시로는 가능하지만 계속은 안된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 자리에 이방 나라들을 의지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예배하고 섬기고 의지하려고 한다.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경고를 하셨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음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이방나라를 의지한다.
13.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도다

그 무엇으로도 절대로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는 결국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우월한 태도, 즉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죄에서 나온다. 내가 신뢰할 대상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내가 신뢰할 대상 조차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 내 자아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 (9절)으로 표현하고 있다. 굳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실 내 삶에서 말씀보다 내 생각을 의지하는 때가 많다.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내 생각을 붙든다. 상황과 환경을 붙든다. 오늘 본문처럼 교만하고 완악한 백성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 묵상하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더 하나님을 붙들기 원한다. 내가 지혜가 없음을, 하나님이 가장 지혜롭고 뛰어나신 분임을 기억하고, 내 삶의 하나님 자리를 나로 ‘대신’하지 않기를 원한다. 

정말 깔대기 같이 다 맞아 떨어지지만 오늘도 Not I but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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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1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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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9:1-7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동역자

 

갈릴리는 시골 촌동네였다. 뭐 하나 선한 것이 없었다. 요한복음에서도 나다나엘이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갈릴리가 영화롭게 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1절) 굳이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그 시골을 언급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예언의 시점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으신 바로 그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리울 그 한 분 때문이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2절)

이 갈릴리 사람이 나타나면 일어날 일이다. 그 분은 빛으로 나타나신다. 빛으로 나타나셔서 그 분의 백성들을 흑암에서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구원하신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는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6절)

아기인데 단순한 아기가 아니다. 그를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이름들이 그에게 있다. 곧 그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오시기로 하신 것이다. 거룩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오셔서 정의와 공의가 없던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실 것이다 (7절). 

 

정말로 슈퍼 히어로가 오시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슈퍼 히어로, 하나님께서 직접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조차도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셨다. 그 분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7절).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으로 이 일을 계획하셨고, 이 일을 실행하셨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리울 그 한 분, 하나님으로 이 땅에 이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 구원계획에서 내가 하나도 더하고 뺄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그 분이 직접 나사렛으로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그리고 부활하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는 하나도 더하고 뺄 수 없지만 그 분이 오심을 통해서 이 땅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부분에서, 그 분의 통치하심이 이 땅에 세워지는 부분에 있어서, 그 분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임을 전하는 부분에서는 우리의 삶이 참여할 수 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전하면서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도록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자 밖에 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결국에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이 땅의 정의와 공의를 세워가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명령은 주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아직 잘 모르겠다. 계속해서 더 연구하고, 더 찾아보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흐를 수 있도록 나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인 예수님을 영혼의 구원자로 축소시키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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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