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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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2:11-22 답답함을 넘어 처절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예레미야애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답답하다.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정도까지 그들에게 고개를 돌리셨다면 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잘못인가? 분명 그들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답답하다. 왜 구해주시지 않는지, 왜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지…
하지만 이 애가를 작성하고 있는 화자의 마음은 단순히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는 정말로 슬퍼하고, 정말로 울부짖는다. 18-19절에서 외치는 그의 말은 단순한 텍스트로 들리지 않는다. 
  1.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지 말게 할지어다.
  2.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그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부르짖고, 눈동자를 쉬지 않을 정도로 울라고 했다. 그리고 자녀들의 생명을 위해서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선지자와 자신들의 백성들의 죄를 안타까워하며 그 틈에 서라고 권유하고 있다. 아마도 선지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해야 하는 모습일 것이다. 

지금 태국의 영적인 상황을 보며 나도 그 틈에 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울고 있는가? 
참 알면서도 안되는 힘든 일인 것 같다. 어쩌면 알지 못해서, 제대로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어서 그렇게 못하는 것은 아닌지?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뭘까? 
애가를 보면서도 단순히 답답함만을 느끼는 것이 내가 영적으로 민감하게, 혹은 이 상황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함은 아닌지? 영혼들을 더 돌아보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더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겠다. 애가의 화자처럼 답답함을 넘어선 영적인 움직임이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아직은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조금씩 더 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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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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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2:1-10 예수께 길을 묻고 가는 하루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로 향했다. 잡혀가고, 성전이 무너지고, 원수들의 손에 넘겨졌다. 9절을 보면 그들은 그들을 지켜줄 물리적인 성문과 빗장을 잃었으며, 리더쉽을 (왕과 지도자) 잃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가장 큰 진노라고 느껴졌던 것은 9절 하반부에 나오는 부분이다.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ESV 성경은 her prophets find no vision from the Lord. 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계시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큰 일이다. 하지만 더 무섭게 느껴진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을 때,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은혜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것을 안 사람은 예레미야애가를 기록하고 있는 선지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몰라왔고(예레미야를 참고해보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르고 있다. 길을 잃어버렸고, 여호와께서 더 이상 계시를 주지 않으시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소리에 그냥그냥 사는 것이다.  

‘그냥그냥,’ ‘되는대로,’ ‘사는게 사는거지’ 이 얼마나 무서운 말들인가? 방향도 길도 잃어버리고 그럼에도 그 길을 찾지 않는 삶은 얼마나 무섭고도 두려운 삶인가? 이렇게 길을 잃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I Am the Way’ 라고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이 길과 방향을 잃은 우리에게 내가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을 붙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알고 있는가? 매일 말씀 묵상을 하면서도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내가 원하는 말씀만 추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정말 길과 방향을 매일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으로 부터 듣는가? 아니면 내 자신으로 부터 듣는가? 혹시 요나와 같이 ‘되는대로,’ ‘배가 오는대로’ 타고 가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기도가 부족함을 느낀다. 말씀묵상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이 든다. 오늘은 좀 더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께 듣고, ‘그냥그냥,’ ‘되는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길’로 가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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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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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1:12-22 죄야 나랑 같이 죽자

본문의 화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꺼내어 회개하고 있다. 18절에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20절에는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회개하고 있는 것 같은 화자는 21절에서 갑자기 ‘그러나’로 시작되는 탄원을 한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절에는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라고 탄원하고 있다. 한마디로 같이 죽자는 이야기다. 나도 죄인이라서 내가 이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니, 저 놈들도 죄인이니 저 놈들도 나와 같이 벌을 주소서 라는 탄원이다. 

그들의 죄나 나의 죄나 동일하다. 나의 죄나 너의 죄나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 맞다. 우리는 이 애가의 화자와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나도 죄인, 쟤들도 죄인, 우리 모두 죄인.. 그래서 우리는 그 죄로 인한 고통과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나도, 너도, 우리도 죄인이 이 땅에 그 죄를 자신에게 돌리는 한 분이 나타나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지고 죽으셨다. 눅 23:24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은 나도, 너도, 우리도 죄인인 곳에 오셔서 우리 모두가 죽어야 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셨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죄가 되신 것이다. 

내 삶에 소망이 없다. 죄짓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죄짓는 공장’같은 느낌이다. 잠시도 죄 없는 상태로 살 수 없다. 계속해서 죄를 더할 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나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이름을 믿을 때 나에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주신 그 분 때문에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애가의 저자와 같이 내 인생도 끝장이 나야 마땅하다. 망해야 마땅하고, 죽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나를 살게해주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께서 계시니, 오늘도 다시 힘을 낸다. 죄와 같이 나도 죽기 원한다. 

죄와 같이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그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다. 말은 쉬운데, 죽기가 쉽지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안죽고 싶다. 그래도 죽어야 한다. 그래도 내 자아를 죽여야 한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발견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이 무능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내신 예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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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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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1:1-11 슬프고 힘든 날의 간구

유다는 사로잡혔고, 예루살렘은 무너졌으며 그들은 비웃음 당하였고, 먹을것도 없어진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8절에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그들의 범죄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보통 그렇지 않지만 이 상황은 그들의 죄가 그들의 삶의 고통과 고난을 초래한 케이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계속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다가 9절에 가서야 겨우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11절에는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관계의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통해 즉시로 심판하시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은혜를 주셔서 기다려주신다. 고난과 고통의 대부분은 그저 삶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것 들이다. 하지만 이런 모양이든 저런 모양이든 고난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힘들 수 밖에 없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예레미야 애가의 화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주저주저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붉고, 두려울지라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우리의 잘못을 고하고, 그 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거룩한척, 고상한척 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지만, 쪽팔리지만 그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아이들, 아내 이야기가 큐티에 자주 나와서 좋은 부모, 남편인 것 같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참 부끄러웠다. 너무 안되서, 너무 힘들어서 매번 묵상에 등장하는 것인데, 그걸 보시고 잘하는 것 같다고 하니 더 부끄러울 따름이다. 요즈음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아이들과의 기싸움(?)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에서의 중재와 내가 화를 내지 않는 일이다. 너무 힘이 든다. 진짜 왠수가 따로 없다. 하루 종일 지켰던 마음의 고요와 평안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또한 주님 앞에 내려놓고 구한다. 나는 이걸 해낼 힘이 없고, 나는 죄인이라 매번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다고.. 염치없고 부끄럽지만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자신들의 죄로 날려 먹은 사람들도 주님 앞에 나가지 않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아이들을 날려 먹을 것 같은 나도 주님 앞에 그저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아뢴다. 그들의 진로와 결혼, 그리고 거룩함을 위해 주님 앞에 아뢴다. 아이들 때문에 우리 형제들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더 나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겸손하게 구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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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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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8:1-9 주님의 인자와 성실이 이끌어 가는 인생이 되자.

오늘 첫 텀때 함께 지냈던 태국 형제, 자매들과 오전에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했고, 이것 저것 이야기도 하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식사하고 4년이 지나 다시 식사를 한 것 같다. 다 오진 못했고, 다 함께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교제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하니 예전생각이 났다. 예전에 매일같이 만나며 교제하고 함께 대화하고, 이것, 저것을 함께 나눴던 시간들이 기억이 났다.

3절에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 내 머리속에 나오는 생각들이 내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기억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인자와 성실을 베푸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일도, 그들의 어떠함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베푸신 사랑이었다. 

행복했던 시간들을 마무리짓고 우리 형제, 자매들을 돌려 보내면서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은 주님을 향한 찬양이었다. 그들이 여전히 믿음 안에 굳게 서 있고, 여전히 학업과 일 속에서 씨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주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그들을 보면서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편의 저자처럼 4~6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찬양이었다. 

여전히 어떤 길로 주님을 따르고 섬겨야 할지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형제, 자매들과 만나면서 드는 마음은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삶을 의탁드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섬길까? 무엇을 드릴까? 보다는 지금 나를, 우리 가정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보며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고백하게 된다. 

내가 한 것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그냥 오늘도 그 분의 뒤를 따를 것을 결정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욥1:21 하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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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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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7:1-12 예수님 옆에 껌딱지 되는 하루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다스리신다(1-6절).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는 그 하나님, 온 우주를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7절에 조각한 신상을 섬기고, 허무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의 끝은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만든 혹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무엇인가를 하나님 대신 섬기는 것은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10절은 다시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우리는 여호와를 사랑하면서 또한 악도 사랑할 수 없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우리의 모든 삶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동시에 사랑하거나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된 하나는 오직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매일 매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 하나님과 나머지 것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란 참 쉽지가 않다. 앞 쪽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것을 알면서도 내 맘대로 하고 싶어 한다. 내 결정을 신뢰하려고 하고, 내 감정과 내 상황과 내 환경을 내가 가장 잘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나를 신뢰하려고 한다.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여호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것도 사랑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평생 끝나지 않을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누구와 함께 걸어갈 것인가?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금식을 마치신 후 왔던 사단의 시험에 예수님은 이기셨다. 그런데 나는 못 이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든다. 예수님은 붙들어도 되고, 안 붙들어도 되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무조건 붙들어야 하는 그런 분이다. 나를 바라보며 더 절망할 때 더 예수님을 붙잡는다. 오늘도 나의 죄성을 바라보며 절망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붙든다. 오늘도 그 새로우신 예수님을 더 붙들고 살아가기 원한다. 순간 순간 쉬이 잊어버리기에 내 손에, 내 눈 앞에 말씀을 써 놓으며 그 분을 쫓아가기 원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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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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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6:1-13 날마다 새로운 주님을 새 노래로 찬양합니다.  

1절에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라고 시편이 시작된다. 읽자마자 바로 들었던 질문은 "왜? 왜 새노래야? 이전 노래면 안돼? 예전 찬양이면 안돼?" 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열심히 ESV 성경을 찾아 보았다. 
"새 노래 (참조, 40:3 , 96:1 , 98:1 , 144:9, 149: 1; 사 42:10; 계 5:9 , 14:3) 는 꼭 새로 작곡된 노래톨 의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새 노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한 데서 나온 반응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역시.. 이 새 노래는 단순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운 주님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우리의 반응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읽고 나니 마음이 더욱 어렵다. 내가 정말 새 노래로, 매일 새로운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 주님을 노래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어제의 은혜, 몇 년전의 은혜, 혹 그것도 아니라면 그 이전, 이전의 은혜로 붙들고 살고 있지 않는가? 2절에서는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날마다 똑같은 것을 앵무새같이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오늘 만난 주님, 오늘 받은 은혜, 오늘 새롭게 회복된 내 심령이 주님의 구원을 외처야만 하는 것일 것이다. 선교사로 살아가면서도 오늘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 만난 신선한(?) 주님이 아니라 어제의 주님, 언젠가 만난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매일 새롭게 경험해야만 하는데, 그래서 내가 만난 그 주님을 오늘 이야기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매일 큐티 하는 시간을 더 붙잡기 원한다. 내가 큐티 했다는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려는 면피용 큐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을 만나고, 그 새로운 주님을 경험하고, 내 안에서 그 새로운 주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길 원한다. 그리하여 시인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오심을 진정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내 삶에 이 ‘새 노래’가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태국어 공부를 통해서도, 아이들의 양육을 통해서도, 우리 형제, 자매들과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도 ‘새 노래’가 흘러 나오길 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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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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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큐티를 매일 나누는 이유는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말씀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수 많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어떠한 은혜를 누리는지를 나누고 싶어서 였습니다. 사실 한, 두 달에 한번 보내는 기도편지만으로는 공유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을 통해서는 저의 겉모습만 보고 잘하고 있다고만 하실 것 같아서…(이 것 조차도 오지랍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 사역에 동참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고 싶어서 매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동의를 구하고, 때로는 동의 없이 시작해서 보내고 있는데, 혹시 받으시는게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샬롬 :-)

시 95:1-11 그래도 오늘을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찬양 받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1-5절까지에서는 1, 2절은 찬양을 하자라고 권유하고 3-5절에서는 그 이유를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신 왕이시고, 그 분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6절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하며 7절에서는 그 이유를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고, 그의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찬양을 늘 받고 계신 분이시다. 모든 만물이 주의 아름다우심과 주의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쉬지 않고 외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모든 창조물들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우리가 창조 받았다는 이유 (3-5절) 말고도 7절에서 다른 이유를 말씀해주실까? 
하나님은 우리와 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 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으로 자녀로, 아들로, 딸로 불러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만물보다 더 찬양해야 할 이유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찬양은 우리의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는것이다. 8절에는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우리의 조상들처럼 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멀리한 것과 같은 삶이 아니라 우리는 오늘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음을 열고 찬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기 원한다. 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내가 하고싶은데로, 내가 원하는데로 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고,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여 입으로 그 분을 찬양하고, 내 삶으로 그 분을 찬양하는 하루를 살고 싶다. 
오늘 아침 후회되는 일들을 좀 글로 써 보았다. 사실 인생을 돌아보면 늘상 후회되는 일 투성이다. 하지만 후회되는 일들을 적고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힘을 내어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시란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여전히 내 삶을 통해 찬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다시 힘을 낸다. 늘 내 삶이 하나님께 좋지 않은 모습이고,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걱정과 근심이었겠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삶을 사용해 주시고, 계속해서 내 삶을 통해 영광과 은혜를 누리려고 나를 자녀로 아들로 부르셨으니, 다시 오늘도 살아갈 힘을 낸다. 오늘을 가벼이 살지 않으리라. 후회없이 정성스럽게 살기 원한다. 


*오늘 아침에 쓴 글을 같이 첨부합니다. 마음에 든 생각들을 쓴 글이라 두서가 없지만.. 제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기에…

태국에 다시 돌아와서 이제 3개월을 지나면서 느끼는 세 가지 후회가 있다.

첫 번째는 언어의 흐름이 끊어진 것에 대한 후회이다. 3년 반을 태국에 있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거의 4년을 있다가 나오니 결국 태국어가 다시 바닥으로 간 느낌이다. 뭐 한국에서도 늘 느꼈던 것이지만 제대로 하는 언어가 없다. 한국어, 영어, 태국어 다 엉망이다. 물론 한국 본부 사역과 그간 지낸 시간을 생각하면 감사한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언어의 관점으로만 보면 그렇다.

두 번째는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텀 사역이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었을까? 란 후회이다. 정말 후회를 남기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즈음 돌아보니 후회가 되는 일들이 많다. 내가 마음을 쏟았던 우리 형제, 자매들을 더 만나고 더 교제해야 하는데 아직은 쉽지가 않다. 우리 형제, 자매들과도 4년의 갭이 있는데, 내가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되는 부분일 것이다.

세 번째는 좀 더 지혜롭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다. 늘 너무 지금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앞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항상 모든 힘을 다해 지금을 산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을 열심히 살며 미래도 보고 필요한 준비들을 했었어야 했는데, 조금만 더 앞을 바라보고 예상을 하고 준비를 했었으면 하는 후회이다. 사실 앞을 바라보는 지혜가 없었던 것 같다.

후회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냥 오늘을 다시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오늘만이 아니라 조금 더 미래를 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나가시는지를 함께 보기 원한다.
사실 내가 내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지혜를 구해야겠다. 오직 주님께서 도우시길 간구한다. 가볍게 살지 말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를 발견하고, 오늘도 달려가자. 오늘 하루도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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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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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8-25 기도와 (주님으로 부터, 사람으로 부터) 들음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기 원합니다.

히브리서를 마무리하면서 히브리서 저자의 요청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18절). 기도의 제목은 자신이 더욱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19절).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했다 (20-21절). 성도간의 교제는 만나서 식사를 하고, 삶을 나누고 하는 것과 더불어 기도이다. 자신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또 다른 형제, 자매들을 놓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과 태국선교를 위해 기도로 계속해서 섬겨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 분들에게 더욱 더 기도를 부탁하고, 나 또한 더욱 기도해야겠다. 하나님께서 그 분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축복해 주시고, 그 분들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달라고 말이다.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오늘은 축복하기 원한다. 진심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갚아 주시길 주님의 손에 의탁드린다.

22절에는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게 가장 어렵다. 아내와 다퉜던 일도 사실 아내의 권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였다. 권면의 말, 사랑의 말인데 그게 왜 나를 비난하는 말로 들리고, 공격하는 말로 들리는지... 아마 내 안에 그런 부분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연약함이었기에 잘 듣지 못하고 그 권면에 오히려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것이었다. 인정하기 싫은 나의 모습을 아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런 나의 모습을 포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어느정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으니 이런 모든 감정들이 혼합되어 결국은 분노나 상함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권면의 말을 용납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아내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자. 내가 원했던 방법과 말은 아니었지만 아내만큼 나를 알아주고, 위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내 연약함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주님께서 듣지 못하는 귀와 상한 마음을 만져주시기 원한다.

좀 더 기도하기 원한다. 기도와 (주님으로 부터, 사람으로 부터) 들음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는 내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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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2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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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17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주님을 깊이 바라보자. 

어제 큐티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추구하자였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저녁 이후 아내와 말다툼이 있었고,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내와 거의 싸우지 않는데, 최근 몇년동안 가장 크게 잘못한 것 같다. 무슨 내용으로 다퉜고, 무슨 내용 때문에 화가 났고 보다도 내가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이들이 소리지르는 아빠로 인해 느꼈을 공포감에 참 미안했고, 그리고 묵상한 내용이 삶에 아무런 적용이 없었음에 무력감을 느꼈다. 남편으로써 아빠로써 완전히 실패한 하루였다. 말씀묵상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펴는 것이 두려웠다. 

오늘 본문은 1절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로 시작한다. 1절부터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아내도 아이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지 못하고 실패를 겪고 나서 보는 첫 말씀의 시작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이다. 늘 부족한 사람임을 알고 있지만 나는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 같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바로 ‘나’이다. 나는 언제나 중요하고, 나는 언제나 인정 받아야 하고, 나는 언제나 사랑받아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나에게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그 자신을 내어주심과 같이, 그리고 그 자신을 내어준 그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다시 한번 말씀 앞에 나를 내려놓고, 도우심을 구한다. 나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 내 본성으로도, 내 의지로도 못한다. 그래서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무너진 내 마음을 추스린다. 잠시 잠깐만 사랑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랑하기 원한다. 역시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잠깐 정신줄을 놓으면 다시 내 본성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가게 되어 있다. 

이미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사과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다.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 나가길 원한다. 오늘은 정말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계속할 수 있기를 원한다. 내 힘으로 안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고, 주님께 나를 의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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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