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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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3:15-22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불평할 것인가?

17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이르지 않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용어중에 'common grace’ (일반은총) 라는 용어가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누리는 은혜이다. 햇빛, 물, 가정, 재능, 사랑 등등의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받는 그 무엇인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common grace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아주 자주 그 일반은총 (common grace)을 주신 분은 잊어버리고, 주신 일반은총을 가지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이것이 아마도 여호와를 찬양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17절에서 말하고 있는 '주의 인자하심'이란 단어는 이러한 일반은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곧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결코 누구에게나 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는 자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러한 일반은총 위에서 이 특별한 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이다 (20-22절).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분의 아름다우심을 찬양하는 것, 그 분이 우리에게 일반은총을 허락하셔셔가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그 분의 품 안에 품어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주셨음에 우리는 감사하고 그 분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순간 신자라는 이름으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일반은총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재고, 따지고 드는가? 찬양보다는 원망과 따지고 드는게 더 많은게 나 아닌가?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무지하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이 무지한지는 모르는게 나의 모습이다. 

오늘은 정말 하나님의 그 특별한 은혜에 더 감사하고 그 분의 이름을 높이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단순히 입으로만의 찬양이 아니라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원한다. 이미 내게 주신 수많은 은혜들과 사랑들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원하고, 결코 다른 사람들과도 비교하지 않기를 원한다. 22절 말씀처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 고백이 오늘 하루 흘러 넘치길 원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불평할 것인가? 오늘 하루의 선택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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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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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3:1-14 Apart from You I am nothing. 

참으로 위로와 은혜가 되는 시편이다. 수많은 은혜와 위로의 구절들이 나온다.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8.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3.아버지가 자식을 긍휼이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이 여기시나니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심에 감사한다. 그런데 정작 마음에 감동을 깊이 준 구절은 14절이었다.
14.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이 구절은 “그가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아시며” 로 번역될 수 있고, 이것은 뒤의 먼지라는 구절과 함께 창 2:7절을 기억나게 한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우리의 존재가 사실 그렇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먼지와 같은 존재인데 그 분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셨고, 존재의 유의미함을 주셨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 분이 우리를 만드셨고, 지으셨고, 그 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빚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유의미하고, 존재의 이유가 있지만 우리에게 그 의미를 주신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흙, 먼지가 되고 마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모든 시편의 아름다운 은혜와 위로의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할 때 유의미해지는 말씀들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시키시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우리가 더 이상 진노의 자녀들이 아니라 긍휼의 자녀들이 된 까닭이다.

오늘도 내 존재의 의미를, 내 삶의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찾기 원한다. 
오늘 예전에 들었던 Tim이란 가수가 불렀던 찬양이 생각났다. 제목은 Morning Star였다.
그 첫 단락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Water to my soul (예수님은 내 영혼의 생명수)

Love that makes me whole (예수님은 나를 온전하게 하는 사랑)

Apart from you I am lost (당신에게서 떨어지면 나는 길을 잃습니다)

Your mercy is so deep (당신의 자비는 깊고)

Your sacrifice is complete (당신의 희생은 완전합니다)

Apart from you I am lost (당신에게서 떨어지면 나는 길을 잃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떨어지면 길을 잃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찬양도 무의미해지고, 우리의 삶도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주님이 우리의 전부임을, 우리를 의미있게 하는 유일하신 분임을, 그 분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순간 다른 것들을 통해 나의 의미와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 모두 헛된 시도들이다. 
오직 하나님께 떨어지지 않고, 그 분께 붙어 있는 하루가 되고 싶다.
1절처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이 말씀처럼 하루종일 그 분의 아름다우심을 선포하며,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과 동행하는 하루를 보내길 원한다. 기억하자. 그 분을 떠난 나는 먼지임을… 아무것도 아님을… Apart from you I am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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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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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2:1-28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기도를 하자.

나는 선교사로써 자주 기도를 부탁하는 자의 자리에 있다. 그래서 기도제목이 생길 때마다 자주 기도를 요청한다. 어제도 비자 문제와 분타릭 교회를 위해 기도를 요청했다. 그런데 정작 기도를 자주 부탁하지만 내가 스스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에 있어서는 쉽지 않음을 느끼고, 막상 기도를 시작해도 올곧게 끈질기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오늘 본문의 1절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표제어는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고 되어 있다. 자신의 고난의 시간에 여호와 앞에 간절하게 부르짓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부르짖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13-14절). 하나님은 기도를 돌아보시고,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신다 (17절). 결국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응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한 마디도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기도로 아뢰야 한다. 기도에 관한 말씀들은 여러가지들이 있지만 특별히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는 '쉬지말고 기도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 시인이 고난 중에 기도한 것도 참 귀한데, 더 귀한 것은 쉬지않고 기도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말씀을 여러가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과 막힘없는, 끊임없는 대화(교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분의 눈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요셉이 살아냈던 것과 같은 다윗이 살아냈던 것과 같은 코람데오의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기도라는 것은 관계이고, 기도라는 것은 대화이고, 기도라는 것은 교제이다. 하나님 임재 앞에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걸음이 기도이고, 또한 교제이다. 오늘 나도 더 기도하기 원한다. 내가 필요한 것만 다다다다 쏟아놓고 나오는 기도 말고…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을 더 누릴 수 있는 시간이 그 안에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또한 주님께 필요한 것들을 아뢰기 원한다. 묵상 후 시간을 더 내어서 충분히 주님 안에 머물자.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기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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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2.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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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1:1-8 삶의 주어가 바뀌어야한다. 

이 시는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내가, 혹은 나’ 라는 화자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윗일리 없는 시이다. 왜냐하면 1절에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혹은 메시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인자와 정의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나게 된다. 2절에서도 다윗은 완전한 길과 완전한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어떠한 인간의 길도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아담의 죄 이후 타락한 죄된 본성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정직과 공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내 안에 있는 악한 마음들을 (3-5절),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이 마음들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충성된 누군가를 구별할 수도 없다. 6절에 보면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부의 말이나 우리를 위하는 척 하는 그런 말에도 속고, 넘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 완전한 길을, 완전한 마음은 결코 우리의 것일 수도 없고, 다윗의 것일 수도 없다.

다윗은 오실 그 아름다우신 그 완전한 길을 걸어가실, 완전한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를 통해서 노래한 것이 분명하다. 다윗이 내가, 나 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예언적인 성격의 노래로 볼 수 밖에 없다. 다윗이 노래했듯이 우리의 삶에는 결코 완전한 길도, 완전한 마음도 없다. 우리는 그 완전한 길, 완전한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오늘 시의 화자가 다윗이지만 결코 다윗이 아니었던 것과 같이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행동과 삶의 내용에서 ‘내가’라는 주어가 ‘그가, 혹은 예수님께서’라는 주어로 바뀌어야만 한다.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닌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삶이다. 

삶의 주어가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 아닌가? 아담 이후로 우리는 늘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존재들 아닌가? 이러한 교만함을 내려놓고 내 삶의 주어를 바꾸어야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결코 완전한 길도 완전한 마음도 가질수 없는 사람이다. 내 삶의 주어가 바뀔 때 완전한 길과 완전한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내 삶을 다스리시고, 내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여전히 내가 붙들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많다. 서류가 처리되고 있는 비자문제도 내가 붙들고 있다. 내가 원한 시점에 나오지 않으면 다시 타국으로 비자여행을 다녀와야 하는데 재정도, 상황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지금 교회가 너무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타릭 교회도 내가 붙들고 있다.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고 하면서도 붙들고 마음을 쓰며 답답해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내가 붙들고 내가 힘들고, 내가, 내가, 내가를 하고 있다.  오늘 내 삶의 주어를 바꾸며 이 일들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인데도 붙들고 있는 이 일 속에서… 오늘 시편의 저자 다윗이 메시아를 노래한 것 처럼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내 삶의 어려움들과 모든 일들의 주권을 올려 드린다.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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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2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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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0:1-5 하나님이 주인이시기에 붙잡는 감사

3절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1절, 2절의 행동이다. 즐거운 찬송을 부르며,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우리를 지으신 분이신줄 알아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것이고, 그의 백성이고,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내 삶에서 하나님이신줄, 그리고 내가 그 분의 자녀이고,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알아야 헛된 시도들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알아야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주석을 보니 초기의 영어 번역본들은 우리가 그의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니’ 라고 부정의 의미를 넣었다고 한다. 우리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5절에서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맞다. 정말로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고, 그 분이 하나님이신줄 아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복음은 분명히 기쁜 소식이다.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심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았다면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 분의 그 선하심과 성실하심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는 나에게 잘해주시다가 오늘은 나에게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늘 한결같으시다. 

그런 선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만나서, 그런 아름다우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고 기쁨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복음이다. 사실 내 삶에 감사하지 않을 제목들이 너무 많다. 헤아려보면 너무 많다. 하지만 또 반대로 감사할 제목도 너무 많다. 어느 쪽을 붙잡을 것인가는 내가 결정할 문제이다. 감사하지 못할 것들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지 못하든지, 감사할 것들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든지 내가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나는 분명히 감사할 것들을 붙잡아야 한다. 감사한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은 사실 관점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하루, 찬송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내 눈에 가득한 불평과 불신앙을 벗어버리고 감사가 입에서 흘러 넘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대대에’ 미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이 선하심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로 내가 사용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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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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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3:8-15 복음을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복음 대로 살아내는 것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말한 것은 이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을 굳세게 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일에 힘쓰게 하라고 하였다 (8절). 하지만 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것은 9절에 나오는 것처럼 ‘어리석은 변론’, ‘족보 이야기’, ‘분쟁’, ‘율법에 대한 다툼’이다. 사도바울은 이것들을 피하라고 하였고, 이것은 무익하고 헛된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디도서 앞부분을 참고해보면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굳세게 말하기를 원했고, 복음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피하길 원했다. 

복음은 사람을 세우지만, 복음이 아닌 것들은 사람을 넘어지게 한다. 복음은 사람을 연합하게 만들지만 복음이 아닌 것은 사람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킨다. 내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복음적인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복음을 말한다는 것이 결코 하루종일 예수 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복음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것일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셨고,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는데, 나는 그 담을 다시 세우려하고, 휘장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먼저 복음으로 살아내야 하는데, 사실 너무 어렵다. 복음이 어려운게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 대로 사는 것이 너무 어렵다. 아니 어려운 것도 있지만 때로는 그렇게 복음의 메시지대로 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다. 그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게 하고, 때로는 속상하게 하고, 때로는 양보하게 하고, 때로는 내가 죽어져야지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자주 변론하고, 너무 자주 분쟁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그런 나의 연약함에도 이 복음을 먼저 나에게 주셨고, 우리 가정으로 또 우리 형제, 자매들로 흘러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나에게 먼저 주신 것은 이것들을 굳세게 말하고(8절), 그리고 굳세게 이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신없지만 오늘도 다시 한번 복음과 은혜를 붙든다. 알면서도 죄를 짓고, 싫어하는 척 하면서도 죄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신 그 분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린다. 오늘 하루 복음과 은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내기 위해 변론과 분쟁과 다툼을 피하자. 열매 없는 자가되지 말고(14절) 좋은 일에 배우기를 힘쓰는 자가 되자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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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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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2:11-3:7 나의 백성, 나의 상속자로 불러주신 하나님

오늘 디도에게 바울은 여러가지를 권면한다. 그 권면대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권면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 또한 이야기 하고 있다. 첫 번째는 14절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이유가 우리가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2:7절에는 우리를 상속자 되게 하려 하셨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모든 것을 가지시고 무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자녀, 어마무시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이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이름이 주는 엄청난 권세가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도 때로는 무시되기 쉽상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과거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에서 자녀가, 아들이, 그리고 상속자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된다면 오늘의 삶은 결코 어제와는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아는 것은 쉽고, 당연하지만 또 그만큼 쉽고 당연하게 잊어버린다. 내가 죄인이고, 소망이 없고, 진짜 재수없게 느껴지는 것이 비단 가끔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잊어버리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 어제 친구가 묵상의 피드백을 보내줬다. 내용인즉슨 큐티에 회개도 좋지만 감사하는 내용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내 자신에 실망하고, 낙심되고, 좌절하는 요즈음 추세에서는 내 큐티도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또한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디도에게, 그리고 나에게,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주심을 통해 절망적이고, 소망이 보이지 않는 우리 인생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심지어 우리를 상속자로 삼아 주셨다. 사실 이 은혜가 내 삶에 있다는 것은 절망속에서 발견하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 분이 나를 먼저 찾아와주시지 않았다면, 그 분이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지 않다면 내가 어찌 그 분을 알 수 있고, 어찌 그 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한다. 

이러한 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주의 일에 참여하게 해주시고,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여전히 내 삶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날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은혜를 주심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가 어떠한 인간인지 보게 해주셔서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심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 삶에 대해 어제와 다르게 살기 원하는 마음을 주심도 감사드린다. 여전히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오늘도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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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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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2:1-10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내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노년층을 향해, 장년층을 위해, 그리고 종들을 위해 교훈을 주고 있다. 때로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복음을 얻었고, 복음으로 인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대충 살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회개하면 용서 받는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겠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회개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 분께서 다 용서해주신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바울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준다. 이 교훈은 가벼워보이지 않는다. 1절에는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2절에는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권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 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교훈을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기를 바울은 권하고 있다. 바른 복음을 들었으니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일어나는 모든 기독교에 대한 비방과 비난은 사실 바울이 권한 모습대로 우리가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에게 바울이 권한 것은 “신중”하도록 권면하고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선한 일에 본을 보이고, 단정하고 책망받지 않을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가 지켜내야 할 의무이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인격수양의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7절 하반부에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함이라, 10절에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잘 있다가 갑자기 터져 나오는 화를 억제하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밖에서는 절대 안나온다. 주로 집 안에서… 터져 나온다. 집 안이 가장 다른 사람의 눈도 없고, 상대적으로 나보다 약자들 (아내, 아이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가장 편한 곳이기 때문에 가장 나의 진정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코칭을 통해 배운데로 감정의 에너지를 터트리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에너지를 빼내어 주자. 나의 모든 삶의 행위를 통해서 주님만 빛나시도록 하는 삶을 살고 싶다. 편하다고 내 맘대로 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삶이다. 복음을 받았으니 복음에 합당하게 살수 있도록 매일매일 조금씩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나만의 릴렉스 타이밍과 방법을 만들자. 정갑신 목사님 설교처럼 주님을 위해 살지 말고 주님에 의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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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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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1:10-16 믿음으로 온전하게 하는 꾸짖음

오늘 본문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을 엄히 꾸짖을 것을 디도에게 권하고 있다. 리더로써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꾸짖는 것이 자신의 감정을 담아 감정적으로 해서도 안되고, 단순히 책망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됨을 이야기 하고 있다. 13절에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왜 꾸짖어야 하는가? 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과 다르게 나에게는 많은 순간 옳고 그름만을 가르기 위해 꾸짖음이 사용되는 것을 본다. 

아이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엄히 꾸짖으면서 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바른 길로 가게 하려고 꾸짖기 보다는 내 감정을 실어서 혼내거나, 두 번째는 그들의 태도가 틀렸음을 지적하는데 머무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한 지혜로움은 부족하고, 결국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수치감과 정죄감만 남도록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누가 옳고 그름을 가리느라 아이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꾸짖음은 어때야 하는가? 

오늘 본문이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꾸짖음이 반드시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절)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분명히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데 까지 가기에는 많은 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아이들의 감정을 공감해주고 만져주는 것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데, 나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참 무지함을 많이 깨닫고 많이 배우고 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형제를, 자매를 믿음으로 온전하도록 세우는 방법을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내용들이다. 

중요한 부분이니 좀 더 묵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원한다. 오늘은 정말 아이들에게 형제들에게, 자매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보며 옳고 그름을 가르는 눈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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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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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1:1-9 자녀를 위해서 삶으로 가르치고 기도하는 것이 장로의 자격이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디도에게 장로와 감독의 자격을 설명하고 있다. 장로의 자격에서 마음에 들어오는 부분은 그가 한 아내의 남편이고, 또한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으로써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모습은 그래도 어떻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부분이니 쉬워보인다. (그나마 쉽다는 것이지 절대 쉽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문제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아이들 때문에 요즈음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어서 그래서인지? 이 구절이 더 무거워 보인다.

6절을 보면 장로의 자격은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여야만 한다. 한 마디로 자녀가 믿음 위에 잘 서 있고,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며, 절제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컨트롤 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녀들을 컨트롤 하는 것이다. 사실 최근의 나의 삶은 자녀들을 컨트롤 하다가 나를 어찌하지 못해서 화가 나거나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매일의 일상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절제를 배우려면 결국은 부모가 절제의 모습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줘야만 한다. 사실 지금 가장 힘든 부분이 이 부분이다. 아이들 앞에서 늘 무엇인가를 참다 참다 결국에는 빵 터지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게 나의 모습인데, 오늘 본문의 장로의 조건이 참으로 무겁게 느껴진다. 장로에게 주어진 무게는 단순히 나만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녀 또한 믿음과 사랑으로 반듯하게 키워내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자녀들이 부모들의 거울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왜 그런 조건을 걸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마도 겉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삶을 보기 위해서 였으리라. 감독은 이 장로의 조건위에 또 더 붙는다. 초대교회의 장로와 감독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신실했는지를 볼 수 있다.

선교사로 아이들을 키우며 내가 최근에 느끼는 좌절감은 상당하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든다. 그동안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뭐 도찐개찐이지 라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정말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낀다.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내가 아이들의 모습을 참고 인내하는 것도 내 힘으로 전혀 되질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 은혜를 구해야만 한다. 어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건 ‘은혜’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아이들이 잘 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내가 장로의 자격을 얻기 위해? 내가 선교사로써 아이들을 잘 키웠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수 있도록, 방탕하지 않도록,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기도하는 아빠가 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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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