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5.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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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 1:15-25 바울의 동역자들, 그리고 나의 동역자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환대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를 동역자로 호칭하였고, 그리고 마지막 23절, 24절을 지나며 그 자신의 동역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문안하고 있다. 한마디로 빌레몬 니가 지금 나열된 이 사람들과 같은 동역자라는 것이다. 23절에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에바브라,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동역한 아리스다고, 바울과 함께 동역하다가 세상을 사랑해 데살로니가로 간(아직 가지 않았다..) 데마,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를 열거 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동역자들이었다. 바울이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빌레몬을 대해준다는 의미였고, 빌레몬에게도 그에 걸맞는 순종을 요구했다.

동역자의 관계란 것은 이런 것으로 보여진다. 같이 감옥에 갇히고, 같이 전도여행에 동참하고, 마지막을 지키고, 서로에게 순종과 사랑, 그리고 격려와 안부를 전하는 것이 동역자 관계인 것이다. 내 삶을 돌이켜 볼 때, 나의 삶에도 많은 동역자들이 함께 해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사도바울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닐지라도 연약하고 부족하여도 늘 나와 함께 동역하고, 동행해주고, 순종과 사랑, 격려와 안부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다. **특별히 이 큐티를 받으시는 분들이 나에게 그러한 분들이다.**

부족한 큐티를 보내기로 결정한 동기도, 나와 함께 같이 이 사역을 함께 하시는 분들에게 말씀 묵상을 통해 어떻게 내 삶이 변해가는지(아직 잘 안 변하고 있다 ㅜㅜ), 그리고 하나님께서 태국 선교에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시작했다. 좋은 소식만 보내지 못하고, 자주 연약한 모습을 더 많이 전하지만, 이 분들이 항상 함께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후원해주심으로 오늘 하루도 이 곳에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가끔 보내주시는 ‘오늘은 왜 큐티 안 보내요?’ 라는 질문이 가장 감사하고, 또 가장 두려운 질문이다. 정말 감사드린다. 

오늘은 늦은 밤에 묵상을 하게 되는데, 사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우리 영광교회 형제자매들과 더욱 한 몸이 되고 싶어 11월 초에 치앙마이로 가는 아웃리치에 동참 하기로 했다. 교회의 주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함께 하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고, 결정을 내리고 아웃리치 리더 중 한 형제인 싸네 형제에게 물어보니 감사하게도 허락을 해주었다. 더 감사한 일은 돌아올 때 차량을 운전할 사람이 없어서 고민 중이었는데, 그게 해결이 되었다고 오히려 나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고, 함께 갈 수 있음에 기뻤다.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선교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동역자가 되려고 하는 그 몸들(그게 교회이든 공동체이든..)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 같다. 오늘 바울이 열거한 동역자들과 같은 동역자들이 한국에 태국에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다. 그 분들과 함께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교들을 이뤄나가고 싶다. 그 분들이 나에게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주신 것 처럼, 나도 그 분들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드리고 싶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서 저는 너무나 행복한 선교사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더 좋은 동역자로, 이 하나님의 선교에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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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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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1-14 삶의 여유와 타인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이 주인되실 때에 경험된다.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고 또한 깊은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빌레몬을 향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 라고 1절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빌레몬을 위해 늘 기도했었다. 잘 보면 아마도 빌레몬을 양육하였거나, 빌레몬에게 영적인 스승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8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렇게 명할 수 있는 권위가 빌레몬에게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9절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14절에는 ‘다만 네 승락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이 하고자 한 일은 빌레몬을 도망간 오네시모라는 종을 자신을 섬기는 일로 쓰겠다는 말이었으나, 결코 바울은 자기 편한대로, 자기가 옳다고 느끼는대로 하지 않는다. 그는 동역자와의 관계를 존중하고, 느리더라도 서로 협력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 

많은 순간 효율성을 중시하는 나에게 오늘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귀하다. 어떠한 선한 일도 절대로 억지로 해서는 되지 않는다. 매일 집에서 쉽게 겪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바른 방향으로 양육하고 가르쳐줘도 그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동의가 안되면 그냥 잔소리로 느껴질 뿐인 것이다. 동역의 모습은 어떠한가? 역시 마찬가지로 억지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며 가야 하는 것인데, 마음이 조급하면 이러한 부분들을 보지 못하고 효율성만을 위해 움직이게 되지 않는가? 

효율성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사역에서, 가정에서도 효율성만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인격적이고, 사랑으로 그리고 느리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 것인데,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옳다고, 내가 바라보는 관점이 옳다고 가족들에게 또 우리 형제들과의 모습 속에서 나의 것을 자꾸만 밀어넣으며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급한 성격인 탓에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이해해주는 것이 늘 쉽지 않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인생의 노년에 그것도 감옥안에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 오네시모라는 한 종을 쓰고자 함에도 그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고, 자의로 하지 않았다. 

바울의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서투른 판단과 계획보다도 더 크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쫓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한 길임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시점,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일이 진행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는 시점과 방법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좋아보이는 것, 쉬워보이는 길을 내려놓고 모든 동역자들과 선을 이루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이 늘 이 싸움인 것 같다. 누가 나의 하나님이신가? 나인가? 하나님이신가? 하나님만이 내 삶의 하나님이 되신다면 그 분만이 내 삶의 하나님으로 인정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내가 하나님보다 지혜롭거나 내가 하나님보다 정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에 누가 하나님이신가?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향한 독이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되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독… 오늘도 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하루가 되고 싶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만 하나님 되시는 하루가 되고 싶다. 

다시 내려놓는다. 관계들, 사역들, 내 계획들, 생각들… 하나님만이 온전히 내 삶의 왕이되시길 간구하고 그리고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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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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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5:11-22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은혜로만 할 수 있다는 겸손함

11절부터 17절까지는 우리의 죄 때문에 얼마나 그들이 슬프고 힘든지를 이야기 하며 이 모든 것이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라고 (16절) 고백하고 있다. 사실 우리 삶의 문제들은 정말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허락하시진 않는다 (연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쫓아가다가 주로 당하는 어려움이다. 

그런데 오늘 화자는 21절에서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처음에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햇다. 자기들이 회개하고, 자기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거지 그걸 안하고 하나님께 자신들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신들이 주님께 돌이키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핑계대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사실 우리는 주께로 돌이킬 수 없는 존재들이다. 빛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내 마음속에 ‘내가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었으니 이 말씀이 내 마음에 이해가 될리가 없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신 것인데… 심지어 내가 복음을 듣고, 믿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이것 조차도 주님이 하신 것인데… 내가 무엇인가 했고, 내가 무엇인가에 기여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 한 자매가 나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나누었다. 큐티를 나누는데 그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어서 너무 불편하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보고 이렇게 답을 해줬다. '우리 마음에 그러한 나를 입증하고 싶어하는 존재감이 전혀 없을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거야. 그럼에도 우리가 묵상을 나눌 수 있는건 그런 깨닫는 마음을 주실 때 반응할 수 있는 것 조차도 내가 나를 깨닫게 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깨달은 것이기 때문일거야. 은혜를 아는 자만이 나눌 수 있는 것이니까. 오늘 내가 나누는 말씀도 주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주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은혜를 나누는 거니까…’ 

답을 이렇게 해주고 나서 큐티를 하면서도 화자가 고백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고백이 이상하게 들린 것이다. 결국 나도 이 자매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감’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어떠한 것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가득하니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감'을 큐티를 통해서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말이다. 

오늘 이 시편의 화자와 같이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은혜로 받을 것을 은혜로 나누는 겸손함이 내 삶에 흘러나기를 원한다. 교만하지 않기를 원하나 자꾸만 행위를 의지하고, 행위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찾는 이러한 비복음적인 삶을 끊어내고 싶다. 주님이 나의 전부 되시며, 그는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는 겸손함을 배우는 하루 되길!!

Romans 8:36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glory forever. Amen.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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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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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5:1-10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하루

6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8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9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오늘 본문의 화자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아닌것들을 통해 그들의 배를 채우고자 한 것이다. 언제나 풍족하신 아버지를 멀리하고, 쥐엄열매를 먹고자 한 둘째 아들과 같았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담이었다. 

아담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신 풍족하신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죄를 지었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었다. 애가의 화자가 이야기 하는 고난이 참 비슷하다. 그들도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였고, 이제는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구할 수 있고, 굶주림의 열기로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게 되었다. 

죄와 타협한 결과는 언제나 처참하다. 죄는 언제나 우리에게 달콤함을 먼저 보여준다. 마치 하나님같이 될 것 같고, 배부를 것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죄는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더 깊은 정죄와 더 비참한 삶으로 우리를 떨어뜨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죄의 결과보다는 죄의 달콤함이 먼저 보이는 사람들이다. 아담이 그랬던 것은 우리 모두가 그러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죄를 이길 힘은 결코 내 안에서 나올 수가 없다. 죄를 안지어야지 한다고 안지을수도 없다. 우리의 몸은 사망의 몸이고, 우리는 곤고한 사람들(롬 7:24)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죄를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결코 아무것도 선한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곤고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우리가 가망성이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내 마음으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이 모든 죄의 뿌리인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이 나를 자꾸만 휘젓는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타이밍, 내가 원하는 방법,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이뤄지길 바라며 하나님께도 자꾸만 그렇게만 기도한다. 시간, 방법, 장소까지도 내려놓는 내가 되기 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절망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기를 다짐한다. 다짐으로 결코 되지 않는다. 의지한다. 자꾸만 내 얼굴의 가면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만 나아간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다른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 놓는다. 신실한 선교사가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신실한 선교사라는 주변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를 올려드린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그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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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1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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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4:11-22 묵상과 삶이 일치되는 삶이 되지 아니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죄는 여호와의 명령과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13절에 보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주던 의인들의 그들은 그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 죽였다. 그들이 받는 보응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직시하는 대신 헛된 도움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나라들을 통해 기대했다 (17절). 한마디로 죄는 자기들이 짓고, 원망은 하나님께 하며,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를 위해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을 쳐다보는 아무런   소득없는 일들을 하고 있어 보인다. 그들이 했어야 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핵심은 보지 못하고 곁다리만 긁고 있었다.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나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면서도 다른 의지할 것들을 늘 쳐다보고 있지는 않은가? 아침마다 묵상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그 묵상의 내용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보다는 자꾸만 다른 것을 찾는다. 헛된 곳들을 바라보며, 헛된 도움들을 찾는 것 같이 말이다. 말씀보다도 다른 책이나 다른 중요한 만남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도 발견한다. 말씀을 붙드는 것 같기는 한데, 핵심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도들을 계속 하고 있다. 묵상만 한다 뿐이지 삶의 열매가 없으면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도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들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었던가? 

말씀이 묵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로 넘어오길 원한다. 엊그제 아내가 내가 묵상한 것을 보면서 '오빠 오늘 묵상한 것과 다르게 살았네’라고 말하는데 마음에 분이 솟아 올랐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었기 때문에 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방어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 말이 맞았다. 묵상과 삶이 일치되지 못하면 참 부질없는 삶이 되고 만다. 말씀을 가졌으되, 예수를 부인했던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다시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내 삶을 내어 드리자. 

말씀이 오늘 내 삶 가운데 온 종일 나를 붙드시도록… 그리하여 내가 그 분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그 분이 내 삶의 주인되신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요셉의 삶을 보면서 주변에서 모두가 하나님을 본 것 처럼… 물론 쉽지 않지만, 말씀에 나를 내어드린다. 목소리를 낮추고, 분을 낮추고, 기도하자.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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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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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4:1-10 내 백성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은 몰락하였다. 더 이상 손 쓸 여지도 없이.. 그들은 몰락하였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그들의 궁핍과 쇠약, 그리고 멸망할 때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화자(하나님)는 여전히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죄를 행하였어도, 비참해졌어도, 더 이상 무엇인가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백성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어떠함과 상관없이 여전하다. 무관심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이다. 마치 아이들이 잘못을 해서 부모에게 혼을 나서 매를 맞은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자녀들이 매를 맞아서 아프고, 쓰라리고, 너무너무 슬프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그 분께서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임은 변함이 없다. 마치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매를 대더라도 변함없는 것 처럼 말이다. 매는 사랑의 도구요, 징계를 통해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자녀를 혼낸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다. 자녀들을 혼내고 난 아버지는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자녀들이 옳은 길로 가도록 때로는 그 감정을 넘어서서 가르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녀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끝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의미한다. 나를 향한 사랑, 형제, 자매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시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 어려움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자. 고난과 두려움이 있을 때 의심하지 말자.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아버지가 되어주자. 아이들이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참 큰일이다. 사랑받는 자로써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유없이 받은 사랑을 나눠줌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할 이유를 찾지 않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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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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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55-66 내 삶에 남아 있는 그 분의 신실하심의 흔적

오늘 본문에서 애가의 화자의 고백은 단순하다. 55-58절까지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고백하고, 59-62절까지는 보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모든 시제는 과거로 쓰여져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다시 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63절부터는 이제 현재형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 처럼 이제 그들에게 보응해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하고 있다. 언제나 변함없으신, 언제나 신실하신 그 분께서 지금껏 자신의 삶에 개입하신 것과 같이 지금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개입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나의 삶을 돌아본다. 1993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2009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벌써 2018년이 되었다. 그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인도해주신 내용들은 수도 없다. 그 분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그 분은 언제나 한결같이 야곱과 같은 나를 선한 길로 이끄셨다. 내가 보통 기도하는 제목들이 이 애가의 화자와 별로 다를게 없어 보인다. '지금 위태하니, 지금 어려우니, 지금 답답하니 나를 좀 도와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늘 선한 계획으로 나의 삶을 그 분의 시기와 그 분의 타이밍에 인도해주셨다. 

오늘 애가의 화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멸절시켜 달라고 한다. 원수들이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 동일한 사건은 없다. 나에겐 저정도로 꼴보기 싫은 사람은 없다. 다만 오늘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얼마나 신실하게 인도하셨는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도하시는지.. 그것들은 내 삶에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내 삶을 돌아볼 때, 어떠한 물건을 볼때, 상황을 볼때, 다 기억이 나기 마련이다. 어마어마한 출애굽을 보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늘은 내 삶에 남아 있는 그 분의 흔적들을 보며 감사하고, 다시 한번 그 분과의 관계를 점검하기 원한다.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에 감사하며, 그 분과의 시간을 가지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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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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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40-54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돌아가자. 

  1.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2.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잘못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조사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손만 들어서는 안된다. 마음도 들어야만 한다. 

손만 드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을 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버리고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오늘도 손만 들고 싶은 마음.. 때로는 손도 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억누르고, 주님께 손과 마음을 든다. 항복한다.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길, 고쳐주시길 원하는 마음에 나를 내어 드린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내 마음을 내어 드린다. 내가 주인인 삶도 내어 드린다. 내어 드린다고 쓰고 있는 지금도 내어 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다시  하나님께 이러한 연약한 마음도 올려 드린다. 주님 주님께로 돌아가니 불쌍히 여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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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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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9-39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시기에,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내 마음에 고난과 슬픔을 담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22-23절 때문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가장 깊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지금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분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때문이다. 

자신들의 죄악들로 인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정말 그 어느 것 하나 선한 것이 없어 보이는 그 때에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징계를 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것 이외에는 답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징계를 받는 것이 맞다. 죄의 결과이니까… 하지만 죄로 인한 징계 혹은 우리가 겪고 있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분의 인자와 긍휼, 성실하심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되고, 다시 하나님과의 은혜의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지금 당장 갑갑하고 답답해도 그 분의 성품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이 정답이다.

이것을 25-26절에서 다시 이야기 하고 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보이지 아니하는 막막함, 답답함,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
그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의지할 것은 언제나 선하시고, 언제나 자비하시며, 우리의 어려움과 슬픔을 모두 체율하신 예수님 한 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이해하신다. 예수님이 나를 도우신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시는 것이다 (24절). 한글성경에는 그래서 내가 그를 바라리라 라고 24절의 뒷부분을 번역하지만 ‘바라리라’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뜻을 찾아보니 소망을 가지다, 기다리다 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ESV는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이라고 번역했다. 여호와가 나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에 내가 오늘도 소망이 있는 것이고, 이 어려움과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근거 있는 소망과 근거 있는 기다림으로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를 원한다. 삶의 막막함과 답답함 속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가장 선하시고, 가장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이 되어 주심에 오늘을 또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 

내 삶에서 더욱더 주를 바라보기 원한다. 내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기 원한다. 오늘은 주님이 나의 기업이심이 좀 더 삶에서 드러나기를 원한다.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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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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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18 NIBC, Not I but Christ

우리의 삶은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막막한 순간에 마주치게 된다. 오늘 시인의 모습이 그렇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해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점이다. 18절에는 그래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시를 읽고 있는데도 답답한데 실제로 이 상황 속에 있어야만 했고, 이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힘이 들었을까? 심지어 그는 1-6절에서 이 상황이 그에게 전적으로 닥친 고난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레미야로 볼 경우 그가 얼마나 많은 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가? ‘눈물의 선지자’가 그의 별명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닥친 재앙을 그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예레미야가 정말 무엇을 잘못 했는가? 잘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지 않았는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늘 본문의 저자는 그 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이 받고 있음을, 그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자신’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1절). 

18절의 그가 고백한 그의 상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외쳤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매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잘못 한 것이 없는데도, 묵묵히 이 상황을 받아내고, 감내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인 것이다. 복음이란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그리스도께도 좋은 소식인가? 아니었다. 그 분께는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 되는 고난이고 고통이었다. 그럼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다. 

오늘 시인의 저자가 자신에게 그 모든 고난을 돌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는 ‘기쁜 소식(복음)'을 향한 부족한 표현이다. 물론 이것을 완성시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오늘 시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였다.  

그렇다면 선교사에게, 리더에게 복음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복음이란 어쩌면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과 같은 고난의 시간이고, 해산의 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도 복음을 먼저 거져 받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용서받았고, 용납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가신 것과 같이 그 고통을 감내하고, 억울함을 감내하고, 그들을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억울함을 수없이 만나게 되고, 내가 무슨 낙을 보려고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수 없이 고민해야 되고, 손해봐야 하며, 때로는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태국 사람들의 속이 보이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묵상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이렇게 글로 쓰는 것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는 것이다. 소리 지르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져야만 이기는 싸움에 참여한 이상한 왕을 쫓아가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인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내 힘으로 살지 않기를,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말이다. 
롬 8: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도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골 3:1-2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희생과 자기부인이다. 져야만 이기는 이 싸움에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오늘도 겸손하게 이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결국은 NIBC이다. Not I but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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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