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1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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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7:20-28 율법은 할 수 없는데, 복음이 할 수 있는 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율법적인 관점으로 누군가를 보는 것일 것이다. 율법적인 잣대를 대고 잘한다, 못한다를 구분하고...
어떠한 어려움이 발생했을때 너무나도 쉽게 저렇게 했기 때문에 저런일이 생겼을거라 너무 빨리 짐작하게 된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율법도 사람(제사장)을 세울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율법이 세우는 것은 흠이 많은 것이다. 율법은 절대로 그 누구도 온전하게 할 수 없다. 하지만 말씀으로(복음으로)는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으로 세워진 아들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율법이 기준이 되면 안된다. 
나는 매우 율법적인 사람인 것 같다. 아이들을 대할 때에도, 우리 태국의 형제들을 대할 때에도 내 머리 속에 그 기준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은혜와 복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인 잣대가 먼저 튀어나온다. 율법은 결코 아이들을 형제들을 세우지 못한다. 필요한 기준은 말씀으로 세워진 예수님이시다.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의 기준으로 모두를 봐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나 까지도 말이다. 자주 힘든 이유는 복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율법이 무용하며,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율법과 아들(복음)이 부딪칠 때는 당연히 율법을 버리고 아들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약점을 가진 제사장만을 세울 따름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잘하고, 잘 지키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서 내 눈이 더 가고, 내 마음이 편한 것은 율법적인 접근이다. 

아들의 접근(복음적인 접근)은 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잘하든 못하든, 잘 지키든 못 지키든, 문제가 생기든 안생기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생명의 관계는 아들을 세우고, 아들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 어떻게 복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인가?

어제 영어수업에 한 자매가 나오지 않았다. 벌써 두 번째이다. 이유가 분명히 있는데, 그 이유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아 벌써 내 마음에 판단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순종과 불순종’의 기준을 아이들에게 대며 다그치기 시작한다. 
내가 복음으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강요하고 있다. 오늘은 이러한 나의 마음을 다시 붙잡기 원한다.
율법으로 사람을 세우지 않고, 율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복음으로, 아들로 그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내가 먼저 아들에게 푹 잠겨서, 아들로 생각하고, 아들로 말하고, 아들로 행동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 자신부터 보며, 아이들과 형제들을 또 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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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9. 1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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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7:11-19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오늘 본문을 굳이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굳이 필요없는 일을 하실 리가 없다.’ 정도가 될 것 같다.
죄인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이 율법으로 가능했다면, 아론의 제사장 반열이 가능했다면 굳이 메시아가 오실 필요가 없다.
하지만 굳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예수께서 오셔야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더 좋은 소망인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19절).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담 한 사람으로 비롯된 모든 악을 깨끗하게 씼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이 우리에게 새 소망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거룩이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회복시켜주셨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꼭 필요하셨기 때문에 보내셨다. 보내도 되고, 안 보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했기 때문에 보내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존재들이 되었다. 이제는 멀리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더 좋은 소망을 누리지 못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마치 카드한도가 무한대인 카드를 들고도 쓸 줄을 몰라 배를 굶고 있는 바보와 같지 않은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동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그저 내가 쥐고 있는 것만 붙들고 아웅다웅하고 있진 않은가? 

하나님 찬스, 예수님 찬스 이 땅에서 쓰는 내가 되자.
예수님 찬스가 내 삶에 어떤 신비와 기적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행복한 동행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절의 오늘 내 삶의 하루 모토가 되기를 원한다.

복이라
주님과 함께 하는것이 복이라 주님의 마음 아는것이 축복이라 주님과 함께 걷는것이 복이라 주님의 사랑 노래함이 행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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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7:1-10 족보를 갈아탄 우리들

오늘 본문에는 족보가 없는 자가 나온다. 그의 이름은 멜기세덱이고 풀자면 멜렉=왕, 체덱크=의(Righteousness), 곧 의의 왕이다.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절). 그 뿐 아니라 그는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족보가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니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3절). 한마디로 신비로운 존재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왜 족보가 중요했는가? 족보는 그들의 신분이 누구인지, 그들이 누구의 자손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디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임을, 그들이 선택받은 민족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지표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족보는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즈음 핫한 드라마인 ‘미스터 션샤인’과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 뉘집 자식인지가 매우 중요하고, 그 뉘집 자식인지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종의 자식이나 백정의 자식은 그 족보가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유대인들도 이러한 족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신의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린 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존재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는 십일조를 받은 후에 아브라함을 축복한다. 축복은 항상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축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 어떤 존재라고 보기도 한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여기서 보고 싶은 사실은 바로 우리가 역시 족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족보가 없다 못해 개 취급 받았던 이방인이 바로 우리란 것이다. 우리는 이 족보 없는 존재인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은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인 것이다. 원래는 우리가 죄의 자식들이요, 죽음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임이 우리의 족보를 통해서 결정된 자들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죽음으로 달려갈 존재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족보가 필요 없는 아들을 족보가 없어서 미래가 안보이는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족보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는 죄의 자식이었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을 통해 구원하신바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간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족보를 갈아탄 자가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죄의 자식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과 같이 우리의 족보를 자랑하고, 그것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신분과 삶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종에서 양반의 족보로, 즉 우리의 족보를 예수님의 족보로 갈아탔으니 이제는 양반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것이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내가 뉘집 자식인지 기억하기 원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피로 족보를 갈아탄 자이다. 예수님으로 살고, 예수님으로 죽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큰 일에서 죽는 것은 쉽지만(상대적으로), 사실 일상에서 작은 일에서 죽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내 삶의 작은 영역에서 부터 나타나기 원한다.
상냥한 말과 사랑의 눈빛, 내 뜻과 생각과 다를지라도 순종하는 모습
그리고 복음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몸짓...
오늘 하루도 복음이 내 삶을 휘감아서 내가 복음을 삶으로 가족들에게 태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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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6:9-20 약속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을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다. 

맹세는 맹세를 자신이 어길 때 그것을 대신 지켜줄 수 있는, 즉 자기보다 더 힘이 센 그 누군가를 언급하며 맹세를 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맹세를 다른 이름으로 하실 수가 없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분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맹세하셨다.
그보다 더 크신 분이 없고, 그 보다 더 능력 있으신 분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 맹세를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을 주셨음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시 17절부터는 그 맹세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히브리서를 읽게되는 사람들은 지금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핍박과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이 편지를 읽게 되는데, 저자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꺼내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분이 약속을 절대로 어길 수 없으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그 분의 성품 그 자체가 약속을 어길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이 다시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그 약속 또한 유효한 것이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금 당장 귀에 들리지 않아도, 지금 당장 느껴지지 않아도, 그 약속은 유효한 것이고,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 처럼, 예수의 부활과 다시 오심은 없을 것 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회로 보여진다. 우리도 잠시만 마음을 놓치면 예수님의 재림은 멀어보이고, 현실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연약함은 더욱 더 크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없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것 처럼 살아가지만 보여지는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 약속을 신뢰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시고 가신 약속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도 그 약속 위에서 현실을 살아내는 삶이어야만 한다. 예수님이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 조금 불편하고, 지금 조금 고생스럽고, 지금 조금 애매해도 괜찮은 것이다. 주님께서 나중에 채워주실거다.. 이러한 것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다시 오실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그 분과 지금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고 싶은 것이다.

물론 현실이 대부분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이는게 사실이다. 삶의 대부분의 순간 하나님은 작아 보이고, 현실은 커 보인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현실은 나에게 어떠한 맹세도 약속도 해주지 않는다. 약속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두렵지만 소망을 가진다. 그 소망을 주신 분이 진짜이시기에, 그 소망을 허락하신 분이 분명히 이루실 것이기에...

오늘도 주님만 붙든다. 작은 일에서부터 주님을 붙든다. 그리고 그 소망을 다 잡는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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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5:11-6:8 그리스도께로 자라는 성장과 성숙을 멈춘 것은 죽은 믿음이다. 

오늘 본문은 전체가 영적성숙에 대한 이야기이다.
5:11-14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 여지 때문에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 멜기세댁에 대해서 늘 궁금한게 많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면서 그들의 신앙의 미성숙에 대해서 꾸짖는다 (12-14절). 우리의 신앙은 늘 성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장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외적으로 쭉쭉 자라나는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이것은 성장일수도 성숙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날마다 자라가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외적인 방향으로든, 내적인 방향으로든... 아주 자주, 우리는(나는) 자라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있는 것 같이 살아갈 때가 많다. 성장과 성숙을 멈춘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30대 중반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제 내 몸의 어떠한 부분도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제 내 삶이 성장이 아니라 죽어가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몸의 어떠한 부분도 더 좋아지거나 성장할 수 없고, 점점 나빠져만 갈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제부터는 천천히 나빠지도록 열심히 관리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고장나는 일 뿐이라는 것이다. 슬픈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팩트였다. 이 땅에서의 우리 몸은 성장이 멈추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영적인 부분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영적인 성숙은 죽기 직전이 가장 성숙하고, 가장 성장된 상태이고, 가장 성숙한 상태에서 주님께 가는 것이어야만 한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히브리서를 받는 저자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꾸짖고 있다. 꾸짖는 이유는 혼만 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는 것을 멈춰있는 상태를 끊어내고 이제는 다시 그리스도로 자라가라는 권면일 것이다. 지금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나는 지금 그리스도께로 자라가고 있는지를 물어보게 된다. 나는 지금 죽은 것 같이 멈춰있고, 정체해 있는 삶이 아닌지? 혹은 과거의 영광, 이전에 빨아먹었던 단물을 우려먹으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라기를, 성장하기를 성숙하기를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마음으로 그냥 오늘을 보내고 잇는 것은 아닌지? 
위기감이 느껴진다. 정체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평생 그리스도께로 자라기를 쉬지 않는 내가 되어야 하는데.. 상황이 너무 많다. 마라가 아파서.. 모임이 생겨서.. 어딜 가야되서.. 뭘 해야되서.. 상황인가? 핑계인가?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6:1에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2절 후반부에서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권면하고 있다. 성장과 성숙을 멈춘 것에 대해 책망하다가 너네 그렇게 멈춰있지 말고 성장해야지.. 성숙해야지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큰 목표를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주고 있다. ‘완전한 곳’ 아마도 그것이 완성된 그 어떠한 것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신앙의 초보를 멈추고, 버리고, 성숙으로 들어가라는 것일 것이다. ‘완전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고 성장과 성숙의 핑계를 대지 않기 원한다. 가장 성숙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대하며 나를 점검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살펴본다. 나의 동기와 이유, 목적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 원한다.
내가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고, 예수를 전하면서도 성장과 성숙이 멈춰있는 불쌍한 내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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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4-5:10 예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순종의 비결이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모든 시험과 두려움, 절망, 연약함을 모두 겪어 보셨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어야만 할 모든 고난들을 감내하신 것이다 (15절). 
그래서 그 분께서는 우리를 이해 하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께 나아가야만 한다. 

어제 참된 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묵상했다.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이해하시는 그 분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서 쉴 수 있겠는가?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쉬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분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16절). 그래서 우리는 그 분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왜 담대함이 필요한가? 우리는 연약할 뿐더러 죄가 가득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매일을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그 우리의 연약함을 체율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실 것을 굳게 믿고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아야 하지만, 죄를 지었을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 앞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고,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 

8절에는 좀 놀라운 표현이 나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7절에 보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그리고 또한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아들이신 그 분 조차도... 눈물과 기도와 간구와 고난으로 배우신게 순종인데...
물론 순종했던 그 일의 클라스가 다르긴 하지만...
예수님이 저 정도로 하셔서 순종하셨는데 내가 순종하는건 불가능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맞다. 사실 불가능하다. 내 수준을 아는데 어딜....

그래서 나는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길 원한다.
내 수준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만 의지하기 원한다. 예수님만 간절히 바라보기 원한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 선한 것이 없으니 당연히 순종도 할 수 없다. 내 힘으로 순종하려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 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 뿐이다. 

오늘도 그 분 앞에 나아가는 내가 되기 원한다.
기도로, 말씀으로, 삶으로... 예수님과 분리되지 않고, 그 분과 연합하는 삶을 살아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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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13 참된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의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셨다. 우리도 그 안식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참된 안식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참된 안식이라는 것이 있는가?
1-5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이 안식에 참여한다고 이야기 한다.
6-11절에서는 우리가 순종으로 이 안식에 참여한다고 한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순종해야 하는가?

8절에 여호수아는 참된 안식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오신 여호수아, 예수님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단어이다) 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 안에서 참된 안식을 허락하셨다.
1-5절에서 말한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시다.
마찬가지로 6-11절의 순종의 대상 또한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과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함으로 인해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안식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들은 모두 헛되다.
알면서도 자꾸만 다른 곳에서 안식을 찾으려 한다.
쉬는 시간, 잠, 휴식, 영화, 편안한 곳에서의 커피 한잔 등등등....
그리고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에 하나는 아마도 사람에게서 인 것 같다. 
아내들에게서 아이들에게서.. 그리고 만나는 친구, 현지의 형제, 자매들....
아닌 것 같지만 가장 그들에게서 만족을 누리려고 하고, 그들에게서 누리는 만족을 통해서 쉬려고 한다.
그러니 더 피곤할 뿐이다.
더 피곤한데도 포기하지 못하니 더 피곤해지는 악순환의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제도 그랬다. 예준이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만 기대는 오늘이 되고 싶다.
나의 참된 쉼과 안식이 오직 예수께만 있는 것을 알고, 아닌 것들을 의지하지 않기 원한다.
사람은 절대로 나의 안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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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3:7-19 마음이 완악하지 않아야 순종할 수 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7, 15절) 우리는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없다 (10절).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8, 15절). 완고한 마음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여 미혹되게 한다.
아침마다 묵상을 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하지만 매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확신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날마다 말씀 앞에 나를 내려 놓으며, 주시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듣는 것일 뿐...

마음이 완고했던 자들은 광야에서 다 엎드려졌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순종하지 않았다 (18절).
마음이 완고한 자들은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이 들려도 결국은 불순종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이 마음이 완고한 자의 마지막이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결국 그들을 불순종으로 인도하게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결국 첫 단추는 잘 듣는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저 말씀 앞에 오늘도 나를 꺼내어 놓으며 들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말씀 앞에 겸손하게 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말씀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것을 순종하려면 내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 욕심도 버리고 내 생각도 버리고, 말씀이 말하는 바를 쫓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아도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듣는 귀가 움직이는 다리가 그리고 순종하는 내 마음이 부드럽기 원한다. 
그것이 주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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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10-3:6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10절에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라고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다.
그 분은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은, 또 그 분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러한 분께서 18절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신실한 대제사장 (17절)이 된 것이다. 이 하나님이신 아들 예수께서는 자기를 세우신 분을 위해 신실하셨다. (3:2). 그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즉 집을 지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말이다. 그 분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써 신실하셨다 (3:6). 

왜 신실하셨는가? 아들로써 그 집 (모든 창조세계) 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이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이 땅의 무너짐을 한 아들께서 신실하게 순종하심을 통해 이 모든 피조물의 탄식을 거두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오게 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셨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안에 바로 우리도 존재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로써...

예수님께서 신실하셨기 때문에 이 땅과 모든 우주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그 원형대로 회복될 것이다. 
우리도 역시 예수님께서 하신 신실함처럼 지금 우리 자리에서 신실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했던 이 땅의 회복과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신실하려면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신실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신실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그럴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신실하려거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3:1). 그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아들 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음을 (2:18)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큰 실패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할 때에만 가능하다.
나는 예수를 깊이 바라보고 있는가? 그 분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가? 
예수 안에서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는가? (3:6)

나를 바라볼 때 절망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어찌 신실할 수 있는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아름다움심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다보면 내 삶이 변화할 것이다. 
오늘도 아침 묵상을 한다. 이 묵상과 나눔이 일이 되지 않기를... 사람들에게 나누기 위해서 하는 묵상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이 묵상이 내가 주님을 바라보는 귀한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하루 되길 원한다.
순간 순간, 고민의 시점에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원한다. 
하루종일 묵상의 말씀이 내 마음에 거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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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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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4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실 의지할 만한 다른 것은 참 많다. 
가끔은 우리의 믿음을 의지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우리의 행위를 의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3절이 잘 요약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국 아들이 하시는 일이다. 그 아들이 하나님이시고, 그 아들이 다시 오실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아들이 누구인신지, 그 아들이 어떠한 능력의 하나님이신지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이시며 (4절), 그 어느 누구도 받을 수 없었던 하나님 아들 (5절) 이라 불리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공의 (8절)이시며, 그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하나님 (11절) 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13절).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이 아들,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 우리는 그의 안에만 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능력이 끝이 없으시고 영원한 하나님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짜들과 바꾸는가?
이 아들을 의지하기 보다는 내 자신을 의지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매일의 순간순간이 '이 아들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의지할 것인가?' 이 싸움 아닌가?
내 삶의 이 아들이 아닌 다른 가짜들을 바라보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 아마도 지금 내 삶에 유혹이 가장 심한 가장 큰 가짜는 ‘인정의 욕구’인 것 같다. 매우 자주 이 ‘인정의 욕구’를 예배하고, 이것이 채워지고 안채워지고가 내 삶에서 내가 귀한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 같다. 복음이 내 삶에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 아니라 이 ‘인정의 욕구’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한낱 ‘인정의 욕구’가 나를 붙들어가고 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다.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연약함을 깨뜨리고 내 삶 가운데 임재하여 주시길 구한다. 더 이상 사람들로 부터 받는 인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보여주신 그 사랑이 나의 존재가치가 되기를 원한다.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 귀한 하루가 되고 싶다. 
시편의 기자의 고백처럼 시84:4-5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 말씀이 오늘 내 삶에서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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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