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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1-14 사람이 먼저이다

1.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부터 승천하신 날 까지의 기록이다 (2절).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며 가르치셨다.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3절)

2.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 모임 중에 제자들은 예수께 묻는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그럴만도 한게 예수님께서 이제 올라가시면 뭔가 일이 생길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제자들의 관심은 때이고 시간이었다. 

3. 언제 예루살렘이 회복되는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지가 그들의 관심이었다. 예수님으로부터 3년을 배우고, 마지막 40일을 배운 그들의 관심이 여전히 때에 있다는 것은 아쉽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에 방점이 있는 것 같다.

4.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7-8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정한 때를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5. 제자들을 통해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자동적으로 끝이 오기 때문이었다. 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아무리 때를 이야기 해도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그 때는 지켜질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면 덜 중요한 것은 자동적으로 해결되기 마련이다.

6. 예수님이 집중하신 것 처럼 ‘사람’이 언제 주님이 오시는지 보다 더 중요하다. 가끔 이단들이 나타나서 언제 ‘예수님이 재림한다’라고 말하여도 속을 이유가 없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해서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셨지 때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7. 나는 오늘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사람인가? 아니면 그 보다 덜 중요한 그 무엇인가인가? 코로나로 인해 답답함을 호소하고, 어려움을 호소하게 되는 이 때에 사람에 집중하지 못하면 안된다. 다른 환경들이 다 닫혔으니 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물론 대면으로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8. 예수님처럼 언제나 사람에게 집중하기 원한다. 시선이 사람에게 향해있고, 그들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과 언제나 함께 하려는 그런 선교사로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 능 형제로부터 코로나 환자와의 직접접촉이 있었음을 들었다. 능 형제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기를.. 그래서 줌을 통해 다시 시작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더 뜨거운 마음이 생기기를.. 그리고 나 또한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 처럼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를…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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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3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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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말과 병거가 아니라 하나님

 

1. 우리 자신이 우리를 구원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구원할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나를 조금도 변화시킬  없는  자신을 내가 신이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나 자신이 신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부인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개발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 모든 것이 가능할  처럼 우리에게 말한다. 그것은 일정부분은 맞아 보인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우리는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3. 하지만 이러한 현대인의 삶은 오늘 본문 7절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의지하고 있는 대상은 변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자신이 잘 하는 것, 즉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4. 하지만 같은 7절에서 시편기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여호와 우리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오늘 다윗의 고백은 나는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5. 눈에 보이는 우월하고 능력있고, 권위 있어 보이는  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전쟁에서가장 중요한 병력의 규모보다 무기의 힘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순간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평소의 삶의 궤도와 태도에서 비롯되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6. 평소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사람이 전쟁   하나님을 의지할  있겠는가? 평소에 돈을 따라가고, 사람을 따라가던 사람이 갑자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하나님만 의지할  있겠는가? 다윗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고백할  있었던것 같다. 

 

7. 오늘 나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질문하게 된다. 돈인가? 물질인가? 사람인가? 사역인가? 가족인가? 나의 정체성을 놓고 있는  무엇인가는 과연 하나님  분이신가? 그것이 사라진다면  정체성도 사라져버릴 그것은 무엇인가? 

 

8.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그 분께 정체성을 두어야만 나의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분이 가장 능력있으시기에 그분께 나의 의지와 능력을 두어야만 실패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점검하며 일상의 낼 삶에서 그 분께만 내 의지와 신뢰를 두기 원한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온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그 분을 붙들기 원한다. 

 

9. 병거,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만 부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10. 부족하지만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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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2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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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4:2-9 팀사역의 연결의 끈은 기도이다

1.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먼저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이야기 한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해서 기도하되, 그 기도 속에서 자신을 위한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2.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의 이런 권고와는 달리 나의 기도는 대부분 “주시옵소서”의 기도이다. 주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하기 보다는 지금 필요한 것들을 자꾸만 달라고 한다. 

3. 없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까 감사가 흘러나오기 보다는 불평이 흘러나오기 쉽고, 없는 것을 구하다 보니까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낙심하기 쉽다. 바울의 말처럼 기도하되 감사함을 붙잡는 것은 기도 생활을 매우 다르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감사를 붙들고 기도하기 원한다.

4. 그리고 바울이 또한 기도를 부탁한 것은 3절이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바울이 자신들의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였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선교사들은 도구로 사용된다. 

5. 하지만 언제나 직접 나가는 선교사 이면에는 바울의 기도의 부탁처럼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 기도가 우리 선교사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한다. 사실 나의 사역만 해도 그렇다. 내가 잘한 게 없는데, 내가 뛰어나서 진행된게 없는데 어느 날 보면 되어가고 있다. 그럴 때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6. 하나님의 은혜 뿐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기도의 덕분이기도 하다. 쌓여진 기도들이 나의 사역에 남들이 보기에는 어쩌면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은혜를 얻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기에 골로새 성도들에게 스스로를 위해서 감사로 기도하고, 또한 선교사인 바울을 위해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길 기도해달라고 하였다.

7. 선교는 팀워크이다. 팀사역이다. 내가 지금 태국 현지에서 태국 전도사님 가정과 미국 선교사 가정과 팀사역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을 위해서 물질로, 기도로 후원하시는 모든 분들과의 팀사역이다. 이 팀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끈은 기도이다. 기도가 없이는 팀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다. 

8. 후원자 한 분, 한 분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느냐?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는 못하다. 하지만 아침마다 말씀묵상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한 분, 한 분을 인도해주시길,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길 복음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길 기도한다. 특별한 기도의 제목을 보내주시는 분들은 또한 그 제목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러한 팀 사역이 지금 태국에서 열매맺고 있고, 그것이 수쿰빛 언약교회라고 생각한다.

9. 나 또한 바울의 권면처럼 나를 위해 기도하고, 또 복음의 문을 위해, 또 물질과 기도의 후원자들을 위해서 감사함을 붙들고 기도하기 원한다. 이 팀사역이 더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서 태국의 영혼들이 더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그리고 늘 저희 가정의 사역에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 기도의 열매를 매일 큐티로, 격달의 기도편지로 작게나마 전해드리지만 우리가 함께 기도의 끈을 통해 동역하여 함께 수고하고 애쓴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격려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11. 그리스도 안에서 늘 감사드리며…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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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23.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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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12-4:1 정체성으로 살아가다

1.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의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의 연장선 상에 있다. 12-15절의 말씀에서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특별히 13절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 “누구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한다. 내 힘으로 하고, 내 관대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용서 받았기에, 내가 용납 받았기에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다.”

3. 우리의 정체성도 우리 삶의 선한 것도 다 복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사랑을 알았을 것이며,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분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용서할 생각 혹은 시도를 했겠는가? 결국은 나의 선한 행동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나의 정체성에서 나온다.

4. 그리고 나의 정체성의 기초는 항상 나를 먼저 찾아오시고,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먼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에 기반하여 있는가? 매일 넘어질 나의 삶인가? 아주 조금 보여지는 나의 의인가? 아니면 온전하신 그리스도이신가? 

5. 하지만 나의 정체성을 이해했다고 해서 나의 삶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은 결코 아니다.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라고 말씀하시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 풍성히 넘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없이는 변화의 능력도 없을 수 밖에 없다. 

6. 그리고 17절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데 대충할 수 있겠는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데 거짓으로 속임으로 할 수 있겠는가? 

7. 우리는 주의 대사들이다. 런닝맨이라는 프로에서 나오는 것 처럼 주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삶 위에, 나의 등 뒤에 붙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정직하게, 성실하게, 거룩하게, 신실하게 행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이다. 

8. 매순간을 복음으로 나의 정체성을 살펴보고, 말씀으로 삶을 채우며, 내 뒤에 붙은 주 예수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며 예수를 따라가는 자로 태국에서의 오늘을 또 보낸다. 

9. 오늘은 태국에 재귀임한지 3년째 되는 날이다. 3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들이 스친다. 지난 3년동안 말씀을 묵상하고, 보내며 오늘 말씀과 같이 살아가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물론 너무나도 부족하고 연약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언제나 그 사랑으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 분의 사랑이, 신실함이 태국의 영혼들을 살리고 계신 것임을 잊지 말자. 나는 그저 통로에 불과하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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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23.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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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1-11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나의 존재의 변화

1.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전제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1절) 살리심을 받으려면 이미 죽었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이는 3절에서도 다시 언급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3절)

2. 우리 믿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또 그가 부활하실 때에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1절)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 까지 가게 된다 (9-10절). 

3.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함으로 인해서 더 이상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2절)

4.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는 명령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다는 존재적 변화이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도 헛된 말일 수 밖에 없다. 내가 그런사람이 아닌데 어찌 명령만으로 할 수 있겠는가?

5.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단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도, 우리도 그 분과 같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6. 나는 오늘 새 사람을 입었는가? 나는 오늘 나의 존재가 변하였는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새 사람을 이미 입었으나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성화의 과정 속에 있으며, 여전히 넘어지고 또 일어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완전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완전해져 가는 것이다. 

7. 기독교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존재가 변하지 않은 기독교인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여전히 개인구원에만 머물러 있고, 내가 구원받았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들이 있다. 나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을 갈망하기 보다는, 지금 받았다고 여겨지는 천국행 티켓에 만족하게 된다.

8.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위의 것을 찾아야 하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하고(5절),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것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의 존재는 변하고 있는가? 천국행 티켓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나의 존재로 살아가는가? 

9. 오늘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저 먼 20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다시 새롭게 일어나는 일이 되기 원한다. 그리하여 새 사람으로 태국의 형제, 자매들을 더욱 더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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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1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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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24-29 부르심, 부르심의 이유, 그리고 목적

1. 사도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직분을 따라서 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5절)

2.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섬기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량을 따라 섬기는 것이고, 섬김의 모든 영역은 내 육신의 만족이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다. 

3. 바울은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부르심의 목적도 분명히 알았는데 28절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4. 결국은 바울과 우리의 섬김은 사람을 세우는 것인데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을까? 

5. 그 답은 No, but Yes 일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자이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또한 Yes인 까닭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그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새 사람’이 된 것이다.   

6.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 모든 완전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것을 이루어가고,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이룰 것이다.

7.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오늘도 빚어 가신다. 바울은 이를 29절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가시기 위해 오늘도 역사하시는 것 처럼 사도 바울도, 또한 나도 다른 이들을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8. 오늘도 나는 힘을 다하여 수고 하고 있는가?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영혼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 그 힘을 다한 수고가 내 안에 있기를 원한다. 바울과 같이 나의 부르심과 부르심의 이유, 목적을 깨달아 힘을 다한 수고를 하는 인생으로 오늘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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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1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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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1-8 믿음의 부모

1. 바울과 디모데가 감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었다. 순간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하는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2. 하지만 바울과 디모데는 그들의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4절)을 듣고 감사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사람이 단순한 복음 증거자가 아니라 ‘믿음의 부모’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실제로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자주 감사를 하게 된다.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 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는것은 어쩌면 당연한거고, 아이들이 부모들이 먹여주고 키워주고 하는 것에 더 감사해야 하는데 실상은 부모들이 더 감사하게 된다. 

4.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모습이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믿음으로 양육한 믿음의 부모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오늘 바울과 디모데가 골로새 교인들을 보는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5. 나는 부모인가? 아니면 그저 그들과 관계있는 어떤 사람인가? 부모라면 그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받기를 원하기 보다는 주기를 원하고, 그들의 성장만으로도 그간의 수고는 다 잊혀지는 그런 사람이다. 

6. 하지만 부모가 아니라면 기대하게 된다. 그들이 나에게 해주는 감사를 당연하게 느끼게 되고, 그들이 나를 위해 특별히 해주는 그 무엇인가도 내가 받을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느끼게 된다. 

7. 부모가 아니라면 그들의 성장도 나의 리더십을 위협하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든지 그들이 복음 안에서 어떠한 소망을 가지든지, 어떠한 열매를 맺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8. 나는 부모인가? 태국의 영혼들에게 진정 부모인가? 아니면 부모가 아니라 자꾸만 무엇인가를 받기 원하고, 얻기 원하는 자인가? 부모의 마음과 부모의 심정으로 이들을 계속 양육하고, 섬기기를 원한다. 바울과 디모데가 한 것 처럼 그들의 성장을 기뻐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감이 나의 행복이 되기를 원한다.

9.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 혹시 내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답받지 못할 지라도, 그들이 혹시 내가 한 것을 잊을지라도 믿음의 부모로써 수쿰빛 언약교회의 성도들을 대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부모의 자리를 잃지 않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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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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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5:20-27 교만하지 않으려면…

1. 하나님 앞에서 승승장구하던 요시야 왕을 넘어 뜨린 것은 ‘듣지 않으려는 마음’ 즉 교만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 잘 나갔던 것일까? 그는 어느새 교만해져서 듣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2. 22절은 그러한 요시야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3. 그는 게을러졌고, 듣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권위를 둔다는 것이다. 그 분이 나의 길을 더 잘 아시고, 그 분이 내 삶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이다. 듣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주인은 나이고,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4. 요시야의 모습 속에서 혹시 나의 모습이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나는 승승장구(?)해 본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잘되는 일이 있고, 그것이 지속되어 가는 것 같은 경우에는 어김없이 교만이 찾아온다. 

5.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찾아오는 것이 교만이다. 요시아 왕이라고 자신이 교만할 것을 예상이나 했겠는가? 중요한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매일 나를 점검하고, 매일 말씀에 비추어 나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고, 죄악이 가득차 있고, 듣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잘 못 가지 않으려면 한 번에 방향을 전환하려고 운전대를 꺾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방향이 바뀌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다. 

7. 오늘도 말씀을 통해 나를 점검한다. 점검해도 점검해도 쉽게 방향이 죄의 길로 향한다. 이러한 나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나를 점검함과 그 분의 도우심이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8.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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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1. 6. 1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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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5:1-19 자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

1. 요시아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한다. “왕이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하고”(2절) 제사장들에게 맡기고 그들을 격려한다. 

2. 그리고 이제 유월절 제물을 준비 한다.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 (7절) 요시아 왕은 자신의 것들을 백성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다.

3. 그러고 나니 8-9절에 다른 자들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려…” 왕의 모범을 본 후에 다른 방백들도 즐거이 드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여호와께 드린 제물은 풍부했고, 또한 즐거이 드렸다. 

4. 오늘 묵상을 하면서 어제 연락 온 한 자매가 떠올랐다. 20살에 교회팀으로 태국 단기선교를 왔었고, 알바를 하면서 공부도 하는 늘 열심히 사는 친구였다. 그런데 어제 다른 한 친구(이 친구는 캄보디아 팀이였다)와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가정이 생각이 났고, 헌금을 조금 보냈다고 연락이 왔다.

5. 말씀묵상을 계속해서 나누긴 했지만 개인적인 연락은 따로 하지 않았는데 생각이 나서 헌금을 했다는 카톡을 받으면서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항상 나보다 어린 형제, 자매들로부터 받는 후원은 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한국적 문화 때문인건지.. 형인, 오빠인 내가 밥을 사줘야 하는데.. 동생들이 후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이 참 많다. 그리고 코로나가 장기화되는 이 시기에 자신의 것을 챙기기도 부족할텐데… 태국 선교지가 생각나서 헌금했다고 하는 그 마음이 너무 귀해 보였다.

6. 또 다른 생각은 그들이 이렇게 즐거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나도 풍부하게 즐거이 드리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물론 교회나 선교사역에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거나 인색하게 쓰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또한 '기쁨으로 즐거이 드렸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얼마를 썼느냐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어땠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7. 어떤 달은 심하게 계산을 많이 하기도 하였고, 어떤 달은 겉으로는 잘 사용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까워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귀한 헌금이기에 잘 사용해야하지만 오늘 요시아왕과 방백들처럼, 그리고 어제 한 자매와 형제처럼 기쁨으로 즐거이 주를 위해 드리고,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즐거이 드릴 수 있게 되를 소원한다.

8. 핵심은 “즐거이” 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지 않는가? 결과론적으로는 똑같이 섬길지라도 그 마음에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이나, 우리의 헌신보다 우리의 마음을 가장 원하시기 때문이다. 요시아왕과 방백들, 그리고 자매와 형제로 인해 하나님은 참 기쁘셨을 것 같다. 내 삶도 주님께 그런 기쁨이 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자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그 분께 내 삶과 내 시간 그리고 가진 모든 것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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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4:14-33 정확한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1. 어떠한 것이라도 선하고, 악한 것을 구분하려면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없이는 어떠한 것도 서로 다르다고 구별할 수 없다. 

2. 우리 믿는 자들의 삶에서는 이거싱 바로 말씀이다. 말씀이 없이는 사사기 때 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 오늘 요시야 왕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다 (14절) 그리고 그 책을 읽으매 (18절) 자신의 옷을 찢게 된다 (19절). 

3. 자신의 옷을 찢은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말씀이라는 기준을 통해 발견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비추어 보니 자신들은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5절)

4. 그들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읽어주고 (30절) 백성들을 언약의 말씀에 참여하게 하고 (32절) 가증한 것들을 다 제하여 버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33절). 이 모든 것이 기준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5.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갈 것인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기준이 없다면 아무런 구분을 못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만약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간 우상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6. 나는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내 생각과 내 기준인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이라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내 생각과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7. 요시야 왕과 같이 말씀으로 기준을 삼고 말씀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의 배경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말씀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8. 요즈음 말씀을 오독하거나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가? 기준은 있는데, 그 기준을 내 마음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절대로 그 기준대로 살아갈 수 없다. 목사가 할 일이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전달하는 것일텐데.. 공부하지 않는 목사들이 많고, 나도 그런 자로 선교지에서 말씀을 전할까 두렵다. 

9. 다시 말씀 앞으로 나아가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요시야 왕 처럼 율법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로 쓰임받고 싶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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