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고전 16:1-12 복음 앞에 설 때, 하나님만 드러나신다

1.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장려하고, 준비하면서도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고린도 교회가 연보한 헌금을 고린도 교회가 인정한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한다. 그가 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드러나기 보다는 자신은 같이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가겠다고 말한다 (4절). 
2.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나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나 그것이 내가 드러나고, 내가 높아질 수 있는 길이라면? 사도 바울은 헌금을 독려했고, 그 헌금을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로 가지고 갈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얼마나 칭송하고 높였겠는가?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3. 사도 바울과 같이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시고, 이해하시고, 숨겨진 의도를 모두 알고 계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일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이해할 때만이 나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4.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가득할 때에는 결코 나를 드러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자요, 오직 복음만이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복음이 나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서서 내 삶에 역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서 나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5.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 앞에 서야 한다. 그 복음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인지, 얼마나 절망적인 사람인지를 알아야만 우리는 그제서야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누리려고 하는 것들, 내가 높아지려고 하는 것들, 내가 드러나려고 하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 
6. 결국 복음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절망적인 존재인 것을 잊지 말자. 내가 먼가 잘 할 수 있다고 깝쭉거리는 일도 그만하자. 이것 조차도 참 절망적이다. 이제 그만하자. 
7. 오늘도 복음 안에서 살기 원한다. 나를 드러내고, 내 자신이 나타나려고 하는 것 말고, 입으로만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말고, 정말로 내 삶에 하나님만 드러나시길 원한다. 
8. 이번 여름 두 번째 단기팀이 오늘까지 사역이 마무리되고, 내일은 방콕으로 가게 된다. 끝까지 내가 드러나려 하지 말고, 하나님만 드러나기 원한다.
9. 오늘 아내와 아이들이 태국으로 돌아온다. 아내가 세 아이와 짐을 가지고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린다.
10. 오늘도 샬롬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7. 31. 11:04
728x90
반응형

고전 15:50-58 주님과 동행함을 기쁨으로 삼아 헛되지 않은 수고를 할 수 있는 하루를 살아내자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키게 되고,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나게 한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부활은 반드시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우리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게 될 것이다 (54절). 사망이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망을 이길 것이고, 마지막 승리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틀린 길이 아니며, 우리가 수고하고 있는 이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왜? 우리는 결국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게 되는 것이다 (53-54절). 

 

우리는 원래 죽을 것이었고, 우리는 원래 썩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이전 것이 아니고 새 것이 되었다. 모두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부활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우리가 그 분을 믿을 때, 그 분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할 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을 몸도 썩을 몸도 아닌 새로운 몸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의 수고와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부활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부활만이 이유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주님과 단절되어 내가 왕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오늘도 그 주님과 동행함을 기쁨으로 삼아 헛되지 않은 수고를 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잊지 말고, 동행함으로, 수고함으로 부활을 기다리는 내가 되자. 

 

거의 한 달의 단기팀 일정이다. 첫 번째 단기팀은 잘 마쳤고, 두 번째 단기팀 일정이 중반으로 접어 들었고, 다음 주는 바로 세번째 단기팀이 온다. 단기팀 일정이 참 바쁘고, 피곤하기도 하다. 그리고 단기팀과 함께 지방에 있어서 내일 아내가 세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와야 하는데 공항으로도 나가지 못한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나 대신 공항으로 나갈 친구가 있어서 참 감사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로 인해 피곤하고 낙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수고로 부활을 기다리는 일이 되기를 원한다.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내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오늘 바로 내 삶에서 그 부활이 실제가 되어 오늘 하루를 살 수 있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7. 31. 11:04
728x90
반응형

고전 15:35-49 나는 부활에 속한 자이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다. 우리의 지금 몸은 육의 몸으로 심겨졌으나, 곧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44절).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신령한 몸이 있고, 영원한 삶이 있는데, 단순히 육신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니면 그러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부활이 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부활이 없으면 신령한 몸도 없다. 

부활이 없으면 영원도 없다.

부활이 없으면 지금의 모든 삶도 헛되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도 이미 죽었다. 

 

하지만 그 분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와 많은 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예수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처음 전했던 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아니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였다.

오늘 그 분이 부활하신 것이 내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 육의 몸으로 살아가지만 영원과 신령한 몸을 위해 나는 나의 삶을 의미있게 사용해야 한다. 

부활은 반드시 있다.

 

49절이 마음을 흔든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처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완전한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을 입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지금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그 분과 동행하며 영원한 삶 속에서 그 분의 온전한 형상을 입게 되는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자.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견딜 수 있다. 눈물 나고,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이 땅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오늘도 부활이 내 삶에서 의미를 가지기 원한다. 말에서 행동에서, 내가 영원한 삶에 속한 자임이 드러나기 원한다. 

아이들에게도, 함께 섬기고 있는 장로님, 권사님들께도 내가 영원한 삶에 속한 자임이 나타나기 원한다. 

무엇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이 드러나기 원한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께 속한 자이다. 

아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7. 19. 12:24
728x90
반응형

고전 11:2-16 서로에 대한 이해, 그 이후 바른 가르침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의 이야기이다. 왜 바울은 여자는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거나 예언하지 말라고 했을까? (5절) 왜 바울은 남자의 긴 머리나 여자의 짧은 머리에 대해 부끄러움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일까? (14, 15절) 오늘 큐티 해설을 보니 이것은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해서 이야기 한 것이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머리를 기르는 남자는 호색가로, 머리를 짧게 자르는 여자는 창기로 여겨졌고,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머리에 두른 수건을 벗는 것은 성적 유혹을 나타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두 문화가 혼재하는 고린도 교회의 공적 예배에 참석할 때 남자는 머리를 단정히 하고,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헬라 문화와 유대 문화가 혼재되어 있고, 사람마다 보는 관점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오해하거나 덕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 여자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관점, 즉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돕는 베필로) 지어졌음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11절을 보면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그 둘 사이에 어떤 우열의 점이 없는 것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성경적인 관점 (문화를 뛰어 넘는)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무조건 성경이 이렇다 라고 제시하는 것은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너희들이 가진 관점이 이러 이러한데,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니까 라고 설명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때 우리는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나눠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원리이다. 순서가 바뀌어서도 안되고, 순서를 무시해서도 안된다. 

 

요엘이를 생각하며 내가 요엘이의 관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제 만 7살인 아들을 내가 얼마나 이해하려고 했을까? 요엘이가 가진 생각,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했을까? 나는 너무 성경적인 관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만 가르치지 않았는가? 내가 공감과 이해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요엘이의 마음을, 요엘이의 생각을, 왜 그런 분노가 생겨났는지를 조금 더 이해해주려는 노력을 더 기울이기 원한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지 않기 원한다.

 

단기팀 시즌이다. 당장 내일 예수향남교회 팀이 온다. 파송교회이고,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이들에게도 그저 이렇게 해야된다. 혹은 이게 맞다는 식의 태도가 아니라 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지,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덕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들의 귀한 시간과 재정이 복음을 위해 잘 사용될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마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이번 사역들이 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힘내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7. 18. 10:56
728x90
반응형

고전 10:23-11:1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어제 밤에 태국으로 홀자서 돌아왔다. 태국은 여전히 더웠지만, 반가웠다. 홀로 오게 된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감사했다. 그렇게 돌아와서 말씀을 펴니 바로 오늘 말씀이었다.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나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31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모든 것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말, 그리고 보이지 아니하는 생각조차도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밥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요엘이를 위해 병원을 다니며 상담을 받는 것도…

그 목적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목적을 잊지 않아야겠다. 목적을 잃으면 모든 일을 나를 위해 하게 된다.

이민국에 가서 신고하는 일도, 단기팀을 준비하는 일도, 영적으로 보이는 일이나 그렇지 않은 일이나.. 모든 일을

오직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는 내가 되고 싶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말씀을 붙들고 따라가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7. 11. 23:22
728x90
반응형

고전 7:8-24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이 내 삶을 부르신 그대로… 오늘 본문에서는 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라는 표현이 17절, 20절, 24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할례를 받았다면 굳이 무할례자가 될 필요가 없고,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내가 종이라면 종으로써, 자유인이라면 자유인으로써..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대로 우리는 그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내 부르심이 무엇인가?’ 이다. 

내 부르심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부르심 받은 그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깨닫자.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부르심을 부러워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할례자로, 어떤 사람은 무할례자로, 어떤 사람은 종으로, 어떤 사람은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도 가장 선하고 확실하다. 다른 사람의 부르심을 부러워말고, 나를 불러주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오늘을 살아가자. 

 

오늘 한센인들을 위해 부르심 받은 양병화 선교사님을 20년이 넘게 후원한 온누리선교회의 회의에 다녀왔다 (온누리교회와 아무런 상관없는 조직이다). 여기에 오시는 장로님, 권사님, 목사님들을 만나면 늘 부끄럽고, 늘 은혜가 된다. 많은 분들이 한센인 출신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삶이 환우들과 그 자녀들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여기기에 자신의 삶의 많은 시간과 재정을 한센인들 선교에 헌신하신 분들이다. 나는 양병화 선교사님 이 하시던 한센인들 자녀를 섬기는 샬롬하우스를 섬기며 이 선교회의 협력선교사가 되었고, 지금은 한센인 사역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를 협력선교사로 섬겨주고 계신다. 

 

이 분들의 삶은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내가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헌신과 희생,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타이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삶이 중요하지…).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의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신 분들인 것 같다. 지금은 많이 소천하셨고, 이제 다들 나이가 많으셔서 건강이 나빠지셔서 모임에 못 나오시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이 분들을 통해서 보고, 듣고, 배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살아 가는 삶은 나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24절의 말씀처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하였는데… 나도 온누리선교회의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그리고 목사님들을 닮아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싶다. 참 감사하고, 참 부끄러운 하루이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7. 10. 21:15
728x90
반응형

고전 7:1-7 진정한 남편, 그리스도께 나를 내어 드리기

 

결혼을 했다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한다. 우리의 배우자가 바로 우리의 몸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이다 (4절).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우리의 배우자에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배우자가 주장하는데로 살아가야 한다.

 

내 몸은? 내 삶은 누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 자로써, 즉 우리의 진정한 남편되시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진정한 신랑되시고, 우리 각 성전(우리의 몸 혹은 교회)는 신랑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 몸도, 성전도, 교회도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한다. 진정한 남편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들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그 어떠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도록 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하고, 내 권리, 내 생각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오늘 본문은 육적인 음행을 피하기 위한 일을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원리는 똑같다. 영적인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는 오늘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성경을 읽고, 내 삶에 적용해야 한다. 내 생각, 내 마음, 내 권리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주장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려야 한다. 

 

하지만 염려하지 말자. 두려워 하지 말자.

나를 주장하실 분은 선하신 목자이시다. 나를 힘든 곳으로,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평화의 사랑의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만 믿고 나를 내어 드린다. 오늘도 나를 주장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묵상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먼저 듣고 순종하기 원한다. 

요엘이의 일도, 아버지의 일도, 나의 사역의 일도… 나를 내어 드리기 원한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말씀 그대로 적용하자. 내 몸을 아내가 주장하게 하자. 힘들더라도 더 움직이고, 더 움직이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고전 1:1-17 사명따라 묵묵히 가는 이 길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자신이 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함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항상 자신이 해야할 사명을 놓치지 않았다. 상황에 움직이지 않고, 사명에 움직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말의 유창함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자신의 말로 그 십자가를 가리우지 않는 방식으로 전하였다. 역시 사명이었다. 내가 들어날 수 있는 것들은 차단하고, 주님만 들어나시게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다.

 

이렇게 사명을 우직하게 따라 갔던 사도 바울을 보며 한 사람이 생각났다. 한동대학교 초대 총장님이셨던 김영길 전 총장님셨고, 어제 (6월 30일)에 소천하셨다. 그 분의 삶도 한국 땅에서 하나님의 대학을 세우기 위한 사명으로 한 평생을 사셨던 분이셨다. 그가 세우려고 했던 ‘하나님의 대학’이라는 비전은 그를 감옥에 갇히게도 하고, 많은 모함과 오해에도 시달리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우직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이 길을 걸어갔고, 이제 그 걸음을 완주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 드러난 모습은 다르지만 사도 바울이 보여줬던 자신의 사명을 쫓아갔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면 나는?

사도 바울도. 김영길 전 총장님도 모두 사명을 쫓아갔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 다른 것들은 심플하게 줄이고, 오직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달음질 하였다. 이제 남은 우리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쫓을 것인가? 사명인가? 아니면 고린도 교회처럼 내가 옳다고 믿는 그 어떠한 신념인가? 오늘도 나에게 주신 사명을 돌아본다. 한 영혼이라도 사랑하고, 그 영혼을 세우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비록 어떠한 모양으로 어떻게 섬기게 될지는 모르더라도 나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며, 믿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강건케 하는 것이다. 나도 오늘 더 우직하게 이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해 본다.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가 없을지라도, 인정과 격려가 없을지라도… 이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앞서 걸어갔던 그 분들이 보여주셨던 본을 따라서…

한국에서의 지금의 시간들이 참 감사하다. 인정과 격려가 없어도 이 길을 가야 하지만 오히려 많은 분들의 기도와 격려를 경험하고 있다. 그저 복음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사랑이 과분하다. 돌아가서 더 열심으로 태국의 영혼들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많은 일 속에서 내 사명이 무엇인지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고 또한 아버지로 나를 불러주신 그 소명 또한 잊지 않기 원한다.

요엘이를 더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아빠로 요엘이를 더 사랑해주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29. 11:26
728x90
반응형

갈 6:1-10 오늘, 성령을 위해 심는 자

 

우리의 삶은 무엇이든 항상 심고 있는 삶이다. 

우리의 말로써 심기도 하고, 우리의 행동으로 심기도 하고, 우리가 아는 중에 심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엇인가를 심고 있다.

이 무엇인가 심기우는 것은 우리의 짧은 오늘 하루에 심기도 하고, 우리의 성격에 심기도 하고, 우리의 인생 전체에 심기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심은 그것은 반드시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 (7절).

 

이것은 우리가 농부가 아니라도 아는 진리인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반드시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원리는 항상 그렇다. 심고 있으면 반드시 거둬짐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심은게 없으면 당연히 거둬진게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게 되는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에 뿌려진 씨앗들은 언젠가는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심고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어디로 부터 나와서 무엇을 위해 심기우는지의 문제이다. 

육체를 위해 육의 것을 심든지 아니면 성령을 위해 성령의 것을 심든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7절을 보면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반드시 거둘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오늘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떠한 것들을 심고 있는가?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체를 위한 것과 성령을 위한 것이 단순하게 우리 몸을 위한 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육체는 우리 몸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욕심, 죄를 쫓아 행하는 삶이고, 성령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원을 위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떠한 것을 심고 있는가?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엘이가 광야를 지나고 있다. 요엘이만 지나는게 아니다. 온 가족이 함께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하루 하루 요엘이를 위해 나는 부모로써, 동역자로써 어떠한 것을 심고 있는가? 나도 모르게 욱하여서육체의 것을 요엘이에게 심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기회 있는대로 요엘이에게 착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요엘이에게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심었을터인데… 그 열매를 지금 함께 거두는 것 같아 두렵다. 

 

더욱 더 기회 있는대로 요엘이에게 성령을 위한 것을 심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선교 사역에 있어서도 더 힘을 내어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위한 것을 심게 되기를 원한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9절)” 아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24. 10:53
728x90
반응형

갈 4:1-11 좀 더 가까이, 좀 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분이 계속해서 아들임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아들의 특권을 가진 자들이다. 특별한 요엘이를 계속해서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인내하는 시간을 지나면서 이 아들의 특권에 대해서 좀 더 묵상하게 된다. 아들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아들이기 때문에 비빌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특별한 특권이 요엘이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빠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냥 비비는 정도가 아니라 7절에 유업을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특권, 우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특권 (9절)… 이 모든 특권이 다 내 손 안에 있다. 그런데 어찌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종으로 다시 돌아가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들로,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사는게 아버지가 바라는 삶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야 그것이 아버지에게 기쁨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기쁘게 순종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다. 

아들이 아버지가 주시는 사랑을 충분히 누리는게 아버지가 바라는 모습이다. 

 

나는 오늘 아들의 특권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께 좀 더 비벼대는 아들이 되고 싶다. 너무 체면만 차리고, 하나님과 약간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가까이 가는 아들이 되고 싶다. 그리고 특권을 누리려고 할 뿐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리는 아들이 되고 싶다. 나를 위해 이렇게 해주세요!! 만 외치며 있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분을 위해 조금 더 내 삶을 내어 드리는 아들이 되고 싶다. 조금 더 철저히 주님께 묻고, 주님께 듣고 가는 아들,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내가 움직이는 그런 아들이 되고 싶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