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21. 14:21
728x90
반응형

갈 3:1-9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구원도 신앙생활도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모든 놀라운 일들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교만함, 즉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이 그들을 넘어지게 하였다.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내가 그 주인되신 분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그 주인을 믿지 못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갈라디아 사람과 대비되는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100세까지 아이를 갖지 못한 자신의 부부가 자신의 힘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음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한 아브라함은 100세에 가진 아들조차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셨을 때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어차피 아이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다시 주실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믿음으로 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 힘으로 (율법의 행위) 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말씀 붙들고 오늘까지 왔다. 그 말씀이 인도하시는대로 가는 이 걸음이 때로는 두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잘 알지 않는가? 어차피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 힘으로 어떤 길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사람이 내가 아닌가?

 

열리면 들어가고, 닫히면 거기서 멈추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아닌가? 두려워할게 뭐가 있는가? 나를 위해 열어주신 문 안으로 그 분을 신뢰함으로 들어가기 원한다. 보여주시는 만큼 보고, 열어주시는 만큼 들어가는 믿음을 걸음을 걷도록 하자. 그게 믿음이고, 그게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길이다. 

 

9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오늘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과 그 샬롬, 그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17. 10:38
728x90
반응형

갈 1:1-10 흔들리지 않는 부르심과 복음안의 삶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셨다. 사람들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었다 (1절). 바울을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 나의 부르심이, 지금 내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가 누구로 부터 난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지금 서 있는 이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다. 사람이 불렀다면,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았다면 나를 부른 그 사람이 변하면, 그 사람이 흔들리면 나도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지금 내 삶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나를 흔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불러주신 분이 나를 지금 이 상황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 이시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내 삶에 나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인하고, 그 확증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이 모습으로 부르신 분은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나를 부르신 아버지께서 주신 복음은 하나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6-9절). 이 하나의 복음을 정확히 알고, 그 안에 온전히 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다른 복음들이 전해지고 있는가? 얼마나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들이 복음의 탈을 쓰고 전해지고 있는가? 내가 먼저 정확한 복음을 알고 그 안에 거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자. 말씀을 연구하고, 읽고, 묵상하는데 게으르지 말자. 그리고 정체되지 말자. 이만하면 되었다, 혹은 이쯤하면 충분하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자. 

 

말씀뿐만 아니라 삶도 인격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멈추지 말자. 요엘이에게 화내고, 짜증내고 빈정거리지 말고 오직 사랑과 사랑으로 대하자. 아내에게도 자꾸 농담으로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가장 친절한 말과 가장 사랑의 말로 대화하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15. 12:08
728x90
반응형

사 30:18-26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하나님은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긍휼히 여기신다 (18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 보다 앞서서 가거나 혹은 뒷쳐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그 분이 말씀하실 때 움직이며, 혹시 아직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면 그 분이 말씀하실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승을 숨기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는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환난과 고생을 감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인생에 어려움과 힘든 일들은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길을 잃고 방황하지는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스승을 통해서 우리 뒤에서 바른 길을 말씀해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 분의 인도하심을 쫓아 걸어갈 수 있게 된 인생이 된 것이다. 이 선생은 말씀되시는 예수님이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시다.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일 것이다.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섬겨야 할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선생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기 위해서 몸부림 치면서 이 말씀의 인도하심을 쫓아 지금 이 자리 까지 왔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인도하시는대로 간다면 주님이 하실 것이다. 그리고 온전하신 일곱의 일곱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스승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은 두렵고,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실 것을 기대한다. 그때까지 이 스승을 열심히 쫓아가기 원한다. 그리고 19절의 말씀처럼 부르짖는 소리라 주님을 찾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두려워 하지 말고 주시는 말씀따라 신나게 따라가자.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그 분과 함께 가는 이 길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요?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13. 07:47
728x90
반응형

사 29:15-24 하나님께 맡기는 걸음 

 

15절은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의 계획을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분은 완전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고전 1:25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 보다 뛰어나다 혹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아담이 했던 것 처럼 말이다. 아담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그들의 벗은 것을 알게 되어 여호와를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 3:8).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숨으면 그 분의 눈에서 자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계획을 숨기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토기장이에 대해 대적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렇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계획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걸어가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잠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오늘도 주님께 묻는다. 큰 걸음 뿐만 아니라 세세한 걸음까지 묻기 원한다. 물을 때 듣게 되고, 듣게 될 때 순종하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내 계획을 내어놓고, 오히려 놀랍도록 인도하시는 여호와의 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6. 12. 13:58
728x90
반응형

사 29:1-14 사랑한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중요한 것은 입술도 아니고, 계명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의 문제이다. 지금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한국에 돌아와서 몇 일 지내다 보니 이 일상적인 상황들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할머니와 함께 티비를 보는 일, 아버지 항암 치료를 받으러 입원하신 병원에 가서 아이들과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손을 잡아 드리는 일, 편의점에 들어가서 너무나 많은 한국 식품들과 과자들, 그리고 싼 가격 (태국은 한국 제품이 비싸다)에 놀라게 되고… 아이들은 한국이 너무 좋다고 계속 이야기 하고… 한국말로 나오는 티비, 한국말로 편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모든 장소… 한국이 참 좋은 곳임을 다시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태국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선교사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 일상적인 편안함에 있는가? 아니면 영혼들에 가 있는가? 
선교사로써 이런 일상의 기쁨을 누리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이 감사한 일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과 관계없이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주님이 주신 이 좋은 기회들에 감사하고, 입술로만 선교사의 모습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곳의 영혼들에 가 있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입술로만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하나님 사랑하고, 입으로만 선교사의 삶을 살아내는 자가 되지 말자. 

오늘도 한국에서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태국어 성경을 읽으며 그 곳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사 27:2-13 누가 내 삶의 포도나무이고, 누가 내 삶의 포도원지기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포도원지기가 되신다. 그 분께서 포도원을 우리를 위해 경영하신다. 물을 주고, 밤낮으로 간수하며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3절).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말씀보다 더 확실하다. 우리는 예수라는 포도나무의 접붙임 받은 가지이다. 예수라는 포도나무가 뿌리를 내려있는 포도원을 경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내 힘으로 자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저 접붙임 받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께 딱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우리가 붙어 있는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이 사실 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사실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또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염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하나님께서 하는 일에 우리는 가지로, 아주 작은 포션으로 참여하는 자들인 것이다. 오늘 오전에 오랫동안 주 안에서 교제하던 한 누나를 만나며 나눈 내용도 그렇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는 그냥 뒤를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가지는 뿌리로 부터 모든 영양분을 받는다. 가지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 나무에서 꺾여 나가면 죽는다. 그런데 그 나무는 예수님이다. 

그리고 그 나무를 아껴주고, 물을 주고, 간수하는 하나님이 그 나무를 키우신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우라? 

 

내가 한다는 생각, 내가 돕는다는 생각, 내가 변화시킨다는 생각만 버리면 된다. 

내가 접붙임 받아 있는 나무가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 이 나무를 키우는 분이 누구이신지 (하나님)를 알면 충분하다. 

한국에 와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만나야 할 사람, 나눠야 할 것들,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요엘이 상담과 치료, 아버지의 항암치료 및 양쪽 가정 방문 등…

하나 하나 생각하면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없다.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포도원을 경영하는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신뢰한다. 

두려워하지 않고, 그 분이 일하심을 보기 원한다.

누가 포도나무인지, 누가 포도원지기인지 확실하게 보는, 경험하는 오늘이 되기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사 24:14-23 선지자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심판을 당하는 자, 그리고 그 심판을 피하게 된 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심판을 당하는 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들 자신을 의지했던 자들 이었지만 심판을 면한 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붙들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만 의지했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만은…

 

두 가지 모습이 보인다. 

그 남은 자들의 찬송 속에서 자신에게 화가 있다고 말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모습과…

땅의 왕들을 벌하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고 말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모습…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나는 구절처럼 보인다.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사랑치 못하여 그들의 죄로 인해 결국에는 심판을 당하는 그들을 보며 자신에게 화를 돌리는 선지자 이사야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역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려 십자가에 죽으신 그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예수의 그 모습이 오늘 이사야의 모습에서 보인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온전한 공의를 드러내시며, 온 세상의 왕으로 좌정하시는 그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온전하신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그 지점이 보인다. 오늘 나는 이사야와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죄악을 슬퍼하며 회개하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을 기뻐하고 있는가? 이사야를 보면서 선지자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동일하진 않겠지만 선교사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형제, 자매들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낮추어 보거나 비하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연약함을 보듬어 주되,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선교사의 자세를 잊지 말자. 

 

특별히 오늘 밤 한국으로 돌아간다. 양가 부모님의 병환 등 좋은 일들 때문에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마음에 부담도 크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 많다. 하지만 선교지를 잠시 떠나 있어도 영혼들을 사랑하는 이 마음을 잊지 말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잊지 않고,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준비가 되어서 곧 돌아오게 되기를 원한다. 한국에서의 시간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고 내가 그런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사 24:1-13 끝까지 남을 것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 날에는 우리가 가진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지위도, 재물도 그 어떤 것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도움이 될 수 없다. 2절은 그것을 설명한다.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비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된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의 마지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마지막을 만나게 된다. 그 때에는 재물도, 지위도,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인도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없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 내 삶은 그 마지막의 모습과는 다르게 많은 것을 붙들려고 하고 있다. 마지막에 남을 것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도 남지 않을 썩을 것들을 붙들 때가 참 많다. 나는 마지막을 붙들고 가는 사람이다. 그 마지막이 어떤지를 알기에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다른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서 하나님만 붙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이나 한가? 

 

예수만 붙든다. 예수만이 힘이다. 예수만이 능력이다. 예수만이 소망이다.

다른데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그 분만 붙든다. 오직 그 분만 전한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다가와서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대도 여전히 남아 있을 그 예수님만 사랑하기 원한다. 

내 삶이 오늘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728x90
반응형

 사 23:1-18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두로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고, 두로는 황폐화되게 된다 (1-6절). 그런데 이 일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일이라 반드시 이루어진다 (9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로를 다시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신다 (17절). 하나님께서 ‘두로를 돌아보시시리’ 라고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고, 실제로 심판이 임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또한 그들을 돌아보신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두로는 변하지 않는다. 두로는 여전히 악을 행한다. 17절 하반부에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심판받았고, 회복받았지만 두로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다 아시면서도 회복시키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무역의 소산물을 그냥 두시지 않으신다. 18절을 ESV 번역으로 보면 그들의 무역품들과 그들의 임금이 여호와께 거룩해 질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들의 무역품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음식과 좋은 옷을 공급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범죄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결국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살아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해 쓰실 수 있는 분이시다. 두로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왔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다. 하지만 두로처럼 악을 저지르고,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전심으로 쓰임받을 것인가? 이 부분은 나의 선택의 몫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 일에 동참하기 원한다. 가능하면 나의 실수나 범죄함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과 사랑으로 동참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일들에 대해 깊이 기도해보자. 그리고 듣자. 그리고 순종하자.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5. 30. 11:58
728x90
반응형

사 20:1-6 누구를 위한 불편함인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구스든 애굽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5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 때, 강성해 보이고, 잘나가 보이는 그 어떠한 것들도 결국에는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세상이다.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어리고 건강하고, 지금은 아무 문제 없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쇠하여지고, 약해질 때가 온다. 오늘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옷과 신을 벗고 벗은 몸으로 다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2절) 결국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가짜들을(우상들을) 벗어 버리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지금 당장 우리를 보호해 줄 것 같고, 우리를 좀 더 멋져 보이는,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그 옷, 그 신발을 벗으란 것이다. 그것이 좋아보이는 것이든, 있어 보이는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벗으란 것이다. 사라져 버릴 것이고, 영원할 수 없는 그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다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징조와 예표였다 (3절). 

 

어제는 무엇을 위한 불편함인지를 묵상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사야 입장에서는 이 징조와 예표는 누구를 위한 불편함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벗으라 하셨다. 좋다. 벗고 다닌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3년을 벗은 몸으로 다녀야만 하는가? 이 부끄러움과 불편함은 누구의 몫인가? 분명코 이 행동은 이사야 자신이 원해서 한 자신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불편한 행동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 때문에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었다. 

 

태국에서의 불편함은 결국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 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 임을 안다면, 그 분의 사랑 때문인 것을 안다면 이 불편함을 좀 더 기쁨으로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이사야도 그렇게 3년을 견뎌내지 않았을까? 이사야는 3년동안 하나님 탓을 한적도 하나님께 불평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았기에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벗고 지내라는 뭔가 비합리적인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더 불편해질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하고, 해보지 않은 것들을 점점 더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기쁨으로 감수하기를 원한다. 보이지 않는 이 믿음의 길을 내가 주를 위해, 태국의 영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가길 원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벗고 다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불편함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향한 것이 되기를 원하며, 기쁨으로 이 길을 걷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