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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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11-17 오늘 사랑하고, 오늘 선을 행하자. 

1.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굳이 할 필요도 없지만 그게 사실이다. 14절은 이를 매우 강조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2. 우리의 인생이 안개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가 안개와 같이 순식간에 없어질 존재임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 처럼, 마치 영원히 이 땅에서 누릴 것 처럼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3. 15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순식간에 없어질 존재들이 마치 영원히 살 것 처럼 주님의 뜻을 이야기 하고, 무엇을 하겠다고 계획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며 이익을 보리라” 라고 알지도 못하는 주의 뜻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선을 행하는 것' (17절)이다.

5. 주의 계획은 쉬이 알기 어려워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선인지 무엇을 행하면 악인지를 이미 분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 선을 행해야 한다.

6. 내일 하겠다, 나중에 하겠다, 짬나면 하겠다, 시간이 나면 하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7. 선을 행함에 있어서 사랑을 행함에 있어서 망설이지 말자. 오늘 하자. 

8. 안개와 같은 우리의 존재가 내일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 하자. 

9. 오늘 사랑하고, 오늘 섬기고, 오늘 대화하고, 오늘 시간을 보내자. 오늘 하자. 오늘 하자. 내일은 늦으리…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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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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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1-10 정욕의 소리(상향성)가 아니라 말씀의 소리(하향성)를 듣자

1. 다툼은 정욕으로부터 난다 (1절). 욕심과 정욕 때문에 우리는 다투고 싸운다 (2절).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3절). 

2. 결국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니라 땅으로부터 나오는 정욕이 우리의 삶을 망친다. 그것은 ‘죄’라고도 부른다. 죄는 우리를 세상과 벗이 되도록 부추긴다. 이 땅이 전부인 것 처럼,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우리를 부추긴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일지라도…

3. 아담이 그것에 넘어갔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를 원했고, 그의 이 정욕은 그를 죄와 벗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았다. 그 결과는 4절의 말씀처럼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이 되었다. 그는 정욕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죄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4. 7절은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우리는 우리의 정욕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 그것에 복종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을 수 있다. 

5. 세상의 소리는 상향성의 소리이다. 올라가야 하고, 높아져야 하고,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도 상향성이다. 하지만 상향성이 적용되는 방법은 그 반대이다. 9절, 10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6. 세상의 소리는 나 스스로가 나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고, 그렇게 해야만 내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반대이다. 내가 할일은 나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나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7. 억울하고, 힘들고, 속상하고, 원통해도 내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고 해서는 안된다. 내 정욕이 나에게 말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8. 내가 할 일은 낮아지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주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낮은 자의 길을 택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높여 주셨다. 

9. 오늘도 낮아지기 원한다. 오늘도 나는 쇠하기를 원한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내 정욕의 목소리가 아니라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원한다. 내 본성과 다른 길이기에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순종하기 원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나는 못한다고 말하기 원한다. 세상의 벗이 아니라 하나님의 벗이 되기를 원한다. 하향성의 삶이 내 안에 자리잡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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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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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13-18 위로부터의 지혜가 땅으로부터 오는 정욕을 이기는 삶

1. 오늘 본문에서는 위의 것과 땅의 것을 구분하고 있다. 지혜와 선행의 행함 그리고 정욕과 귀신의 것, 즉 모든 악한 일을 대조하고 있다.

2. 선한 일과 악한 일의 대조는 뭐 당연한 것이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혜와 정욕의 대조는 신선하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는 자는 그 지혜로 말미암아 선행의 행함을 보이지만 (13절), 땅 위의 정욕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그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시기와 다툼,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지혜는 누가 우리의 창조자이신지, 누가 이 땅의 모든 질서를 만드셨는지, 그 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보게 해주지만, 정욕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에 나의 필요와 나의 생각, 욕구의 만족을 위해서 다른 질서들을 깨뜨린다. 그래서 이 땅의 정욕을 취하는 사람으로부터는 시기, 다툼, 혼란,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4. 나는 어떤 사람인가?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는 자인가? 아니면 땅으로부터 온 정욕만 가득한 사람인가? 사실 삶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18절도 이와 같이 말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나는 무엇을 심어 무엇을 거두는가? 

5. 의의 열매를 17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한글로 봐도 이게 그게 그거 같은 단어들이 쭉 나열된다. ESV로 보면 조금 더 이해가 쉽다.  "But the wisdom from above is first pure, then peaceable, gentle, open to reason, 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impartial and sincere.” 위로부터 온 지혜는 첫째로 순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합리적이고, 자비가 넘치며, 좋은 열매를 맺고, 차별과 편견이 없고 참되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6. 결국 우리 삶의 좋은 것들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온다. 우리 삶의 참 지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삶의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내 삶의 주인이 계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을 내 뜻대로 이끌어 가려고 하고,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법,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위로부터 오는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욕망의 출처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정욕에서 나오며, 그 정욕의 끝은 시기, 다툼, 혼란이다. 

7. 어제는 온종일 힘이 들었다. 아내도 나도 힘이 들었고, 우리의 삶에 선한 열매들이 맺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다시 결정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나를 지으시고, 나를 이 곳으로 보내신 분임을 깊이 묵상한다. 그리하여 선한 열매들이 내 삶에 맺혀지기 원한다. 

8. 위로부터의 지혜가 땅으로부터 오는 정욕을 이기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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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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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1-12 (큐티 책 펴기 무서운 날) 한 입에서 찬송과 축복이 나오기를…

1. 큐티를 하기가 무서워지는 날이 있다. 오늘과 같은 날인데, 정말로 지금 오늘 있을 일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주실 때가 있다. 너무나도 적절하고 오늘의 상황에 맞는 말이라서 묵상 책을 펴다가 놀란다.

2. 오늘은 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8절에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혀는 작은 기관이지만 가장 훈련이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3. 오늘 본문에서는 10절에서는 또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11절에서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다.

4. 찬송할거면 찬송만 하고, 저주할거면 저주만 해야 한다. 때로는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때로는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 (9절). 

5. 내 혀에서 쉬지 아니하는 악이, 죽이는 독이 가득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말들에 재갈을 물려서라도 말이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이 나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6. 서두에 너무 적절한 말씀이 주어졌다고 쓴 이유는 오늘 좀 어려운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뭔가 오해가 생긴 분들을 만나야 하는데, 나를 오해하고 있는 까닭에 나의 마음도 쉽지 않았다. 쓴뿌리도 올라오고, 정말 내 입에서 찬송과 쓴 말이 동시에 나오는 상황이었다. 

7.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나의 혀에 재갈을 물리라는 것이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동시에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축복하라는 것이다. 

8. 항상 오해나 억측을 경험하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것 조차도 축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고 싶지 않은데, 이 말씀이 딱 오늘 주어지니 큐티하기가 무서울 수 밖에…

9. 하지만 큐티는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니 오늘도 순종하기 원한다. 억울한 마음은 감추고, 사랑으로 대화하고, 너무 많이 해명하려 하지 말고, 축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내 혀가 많은 것을 불사르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주님 저를 지키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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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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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9-27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1.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실제'가 되어야 한다. 말씀이 말씀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온 것 처럼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제가 되어야 한다. 

2. 말씀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 (22절). 큐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이 내 삶에서 행함과 실천이 없으면 나를 속이는 것이 된다. 

3. 그렇기 때문에 바른 경건은 행함과 실천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바른 경건은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26절).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봐야 한다 (27절). 그리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해야 한다 (27절).

4. 근엄한 목소리와 예배 중에 손을 드는 행위와 같은 외적인 경건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삶에서 복음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5. 우리가 이렇게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랑을 먼저 아무런 댓가 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을 우리 예수께서는 그저 사랑해주셨다. 그리고 죄에서 건져 주셨고, 이제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게 하셨다. 그저 받았기에 내 삶에서 그 분의 사랑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이 경건이다. 

6. 또한 참된 경건의 모습을 그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들을 알고 있다. 매인 자들에게, 묶인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고, 가난한 자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 분은 자신의 정결함을 지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정결하지 않는 자들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 오셨다. 하지만 자신의 정결함을 결코 잃지 않으셨다. 

7. 참된 경건은 예수를 사랑함에서 나온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눈과 우리를 사랑하신 손을 우리의 삶에서 흉내냄에서 나온다. 예수는 결코 아프고, 힘든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입으로만 사랑하지도 않으셨다. 언제나 긍휼의 눈과 사랑의 손으로 도우셨다. 

8. 예수님의 긍휼한 눈과 사랑의 손을 따라가는 삶이 바로 참된 경건이다. 문제는 입으로는 머리로는 예수님의 눈과 손을 따라가는데 삶으로는 그렇지 못한데서 있다. 참된 경건이란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9. 예수 그리스도의 눈과 손이 내 삶의 실제가 되는 것, 내가 그리스도의 눈으로 영혼들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손이 되어 그들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참된 경건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눈과 손으로 바라보아야 할 영혼들이 내 옆에 많이 있다. 주님의 긍휼한 눈과 손으로… 먼저 기도하자. 그리고 또한 복음을 이야기 하자. 참된 경건의 삶을 살아내자.

10. 추석 귀경 잘 하셨는지요?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원합니다.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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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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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11 인내는 누가 내 삶의 주인인지를 분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1. 새로운 묵상 야고보서의 시작이다. 야고보는 1절에서 문안 인사를 하자마자 황급히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 시절의 일반적인 편지의 양식과도 맞지 않을 정도로 급하다. 그 정도로 급한 일이 있었나보다. 

2. 바로 시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수신자들의 삶에 특별히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를 격려하려고 한 것으로 보여진다.

3. 그런데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라거나, 혹은 시험을 피할 길을 찾으라는 조언이 아니라 오히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라고 말하고 있다.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4. 야고보가 시험을 기뻐하라고 한 이유는 바로 그 시험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3-4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5. 언제 인내할 수 있는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인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타이밍,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이 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을 때라야 우리는 인내할 수 있다. 

6. 결국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순간에 우리는 인내하고,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다. 

7. 우리의 삶에 시험이 없는 순간, 어려움이 없는 순간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아이를 키우면서 절실히 느낀다. 이 고비만 넘기면 뭔가 힘든 일이 다 끝날 것 같은데.. 날로 날로 새롭다. 안아주기가 버거워 걷기만 하면 살 것 같은데… 걸으면 넘어지고, 미운 네 살이 지나가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고, 그게 끝나면 사춘기이고, 그게 끝나면 대학가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만 한정해도 늘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다.

8. 이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도 야고보의 조언과 같이 ‘인내’하는 것이다. 내가 내 방식으로 조금도 바꾸거나 변화시키거나 나아지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인내’를 통해서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9. ‘인내’는 힘들고 어렵다. 좁은 길이다. 하지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 삶을 망치는 일’보다는 훨씬 더 쉽고, 넓은 길이다. 지금 쉬워보이고 넓어 보이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어렵고 좁아 보이지만 ‘인내’하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길로 갈 것인가? 

10.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고 의지하여 (5절) 그 좁은 길로,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한다. 내가 결정해놓고 내 뜻대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멈추고, 오늘도 인내하고, 오늘도 기다리고, 오늘도 사랑하자.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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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9. 9. 1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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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8:5-14 희생으로 온전해지는 사랑

1. 사랑은 강하다. 남녀간의 사랑도 강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 그들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는다. 엄마의 사랑은 어떠한가? 마라가 '요게벳의 노래'를 좋아해서 자주 듣는데, 들을 때 마다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아기 모세를 떠나 보내는 엄마의 그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고,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한다.

2. 오늘 가가서 본문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라고 6절에서 표현하고 있고, 7절에서는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3. 그렇다 모든 사랑은 강하다. 그리고 뜨겁다. 그런데 사랑이 강하려면 그 사랑에는 뜨거움 외에 희생이 필요하다. 강하기 위해 더 많이 희생해야 하는 것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간 사랑의 뜨거움과 강함에 집중하기 때문에 더 많이 해야 하는 희생은 보지 못한다. 

4.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해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져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움직여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내려 놓아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뜨거움 넘어에 있는 사랑의 본질이다. 

5. 오늘 아가서는 두 사람이 사랑함으로 함께 달려감으로 마친다. 뜨거웠던 그들 역시 이제 현실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저렇게 뜨거웠던 아가서의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도 결국 우리와 같은 현실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향한 희생을 통해 강해지는 사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6. 현실에서의 사랑이란 결국 희생과 헌신이다. 내 시간을 포기해야 하고, 내 할 일을 포기해야 하고, 내 성질을 내려놓아야 하고, 아내나 아이들을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고, 귀찮은 일을 해야 한다. 또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7. 희생하지 않는 사랑은 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반쪽 짜리 뜨거움만 있는 사랑은 결코 강할 수 없다. 사랑은 희생으로 온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셨다. 말씀으로만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가장 큰 대가를 희생하셨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인해 그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 

8.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아픈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시는 사랑이었다. 죽음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끄지 못할 사랑을 하셨지만, 또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뜨거움과 희생으로 온전한 사랑을 우리를 위해 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 

9. 나는 사실 뜨거운 사랑을 늘 하고 싶은 것 같다. 희생은 적게 하지만 폼 나는 사랑, 덜 아프게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프더라도 힘들더라도 희생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내 삶에서 하고 싶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태국 형제, 자매들에게… 

10. 폼 나지 않더라도, 있어 보이지 않더라도, 행복하기만 하지 않더라도…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의 사랑을 하고 싶다. 뜨겁고도 아픈 그 사랑… 그 사랑을 하고 싶다. 요엘이를 더 많이 받아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싶다.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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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7:10-8:4 사랑이란 함께 하는 것

1.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것, 즉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을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신부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2. 자신이 그에게 속하였다고 말한다 (10절),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한다 (11절), 그리고 입맞추고 싶다고 말한다 (8장 1절). 이 모든 것이 사랑하고 있을 때 하고 싶은 것들이다. 

3.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할 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함께 있고 싶고, 입맞추고 싶고, 그가 내게, 내가 그에게 속했다고 말하려고 한다.

4. 그런데 홀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이 신부와 같이 말씀하여 주신다. 나는 포도나무고, 너는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거라고 말씀하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고 싶으셔서 인간이 되어 이 땅으로 오셨다.

6. 사랑 때문이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마누엘로 오셨고,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7. 사랑을 받은 존재로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 인간의 세계에서도 짝사랑은 늘 힘들다. 그가 그녀가 나를 쳐다봐주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면 힘든 것이 우리 인간사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면?

8. 나는 사랑받고 있는데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그렇게 속하고 싶고, 함께 하고 싶고, 입맞추고 싶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 조차도 내 이기적인 사랑의 희생양으로 남도록 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사랑하고 있는가? 

9. 잠시 묵상하고, 잠시 기도하고, 잠시 말씀 보는걸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땡' 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사랑하는 함께 하는 것이고, 사랑은 동행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순간순간 동행하는가? 그래서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가?

10.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는데, 그 사랑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 원한다. 큐티하고, 기도하고, 말씀보는 걸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이, 내 생각이, 내 행동이 주 안에 속하길 원한다. 

11. 비자를 위해서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푸켓에 가서 형제교단 대표를 만나서 이야기 나눴고, 계속해서 선교사 비자를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하시는데 여러분의 기도를 사용하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더 집중해서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 저희도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 안에 속하는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

13.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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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4:1-16 사랑은 제 눈에 안경, 하나님 눈에는 예수 안경

1. 사랑은 제 눈에 맞는 안경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뻐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모든 하는 행동이 좋아 보인다. 

2. 오늘 아가서의 화자도 그렇다. 아주 빠져들었다. 좋은 수식어는 다 가져다 붙인다. 자신의 눈에 맞는 안경을 쓰고 그 사람을 바라보니 싫을게 없다. 7절에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3. 흠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사랑은 그 흠 조차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보신다. 흠 투성이에, 죄 투성이인 우리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라고 불러 주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는 안경을 쓰고 말이다. 

5.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멀었다’ 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의와 공의, 그리고 용서와 사랑이 맞닿는 안경을 쓰고 우리를 보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 안경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흠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안경을 벗게 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흠을 그대로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밖에 없다. 

6.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어떠함이라는게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나의 의? 그런게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흠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7. 내가 노력해서 조금도 나의 의를 더하거나 내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내 존재가 더 나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를 그리스도 예수의 안경으로 바라봐 주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8. 무엇인가를 잘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애쓰자. 잘하여도 못하여도 그 안에 있기를 힘쓰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가 피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여 질 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어여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9. 나만 그런존재인가? 내 옆에 있는 아내, 아이들, 사랑하는 태국 형제, 자매들, 나와 상관없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군가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내가 받은 복음으로 용납하고, 내가 받은 복음으로 사랑하자.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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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11 예수의 사랑이  안에 먼저 흘러넘치기를...

 

1. 사랑하는 자를 애타게 찾는 마음, 1절에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녀는  안을 돌아다니고, 거리에서나  길에서나  사랑하는 자를 찾고 있다. 

 

2. 그녀의 간절함이 나타난다. 예전에 아내가 아이들을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잊어버린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야기를 아내가 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마라를  팔에 앉고(마라는 무겁다 -.-;;) 미친 여자처럼 뛰어다녔다고 이야기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3.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를 뛰게 만든다. 사랑은 부끄러움을 감춘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랑이다. 

 

4. 오늘  여인의 사랑을 보며 나의 사랑은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사랑은 지금 나를 뛰게 만들고 있는가? 나의 사랑은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는가? 나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뛰게 만들고 있는가? 아내를 향한  사랑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오늘 어떠한가?

 

5. 죄를 향해 뛰어가는 발걸음이 훨씬  빠른  같고, 나의 욕구는 사랑보다도  나를 간절하게 만들고 있지는않은가? 

 

6. 그런데 우리가 누구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가? 없다. 일시적으로 가능하지만 지속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변함없는 사랑은 주님만이 우리에게만 주실 수 있는 사랑이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아야,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흉내낼 수 있는 것이다. 

 

7. “이 바보야, 문제는 결국 사랑이야”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용납 받았음을,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지금 호흡하고 있음을,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오늘도 요엘이에게 사랑을 말하고 기다릴수 있음을,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오늘도 선교사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8. 주님과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주님과 동역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의 마음을 아는 주님의 비서인가? 아니면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려는 어줍짢은 사기꾼인가? 

 

9. 먼저 이 간절한 사랑을 배우기 원한다. 충분히 누리고, 충분히 알아서, 충분히 베풀어 주고 싶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 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사랑이 충분히 채워져서 내 안에서 흘러 넘치는 (overflowing)  경험을하기 원한다. 

 

10. 하나님의 사랑이  안에 충분히 채워짐을 경험하지 못해서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음을 요엘이한테 사과하자. 아내에게 사과하자. 그리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누리도록 예수 안에 거하자. 

 

11.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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