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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1-12 인과관계가 다른 하나님의 사랑

1. 욥은 요즘말로 말하면 사기캐(스펙이 너무 뛰어난 말도 안되는 캐릭터) 이다. 엄청난 부자라는 것에 더하여 그에 대한 평가는 더욱 더 엄청나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절)

2. 이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또 나온다.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3절 하반부).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성경의 평가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평가도 엄청 후하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따는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8절)

3. 이 사람은 심지어 자신들이 아이들이 하나님께 범죄할까봐 제사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것도 가끔도 아니고 항상 그랬다. 

4. 이런 욥에 대해 사탄은 참소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9절) 사탄에게는 사랑이란 조건적이다. 흔히 말하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결과이다. 하나님이 잘 해주니까, 부자로 만들어 주시고, 자녀도 많고 등등등 감사의 이유가 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5. 사탄이 이해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 대신 자신이 모든 피조물로 부터 경배받기 위해 사탄은 처음부터 하와에게 거래하지 않았는가? “너 안죽어, 너 지혜롭게 될거야, 너 하나님 처럼 될꺼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따위에 순종하지 말고 선악과 먹어도 괜찮아!!”

6. 사탄과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은 인과관계가 다르다. 사탄은 사랑을 받으려면, 무엇인가 좋은 것을 얻으려면 네가 무엇인가를 하라고 내 놓으라고 말한다. 종교적인 행위의 모습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아야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말과 행동이 사랑받을 만해야 한다. 거래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하신다. 죄인 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가 죽어달라고 요청하시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하든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유를 묻는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묻는 것 처럼 말이다. 

8. 욥을 향한 사탄의 참소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왜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여전히 그냥 두시는지 (내 삶도 여전히 악하지만…), 왜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한 그 인간을 망하게 하시지 않는지, 왜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을 그냥 두시는지 까닭을 묻는다. 죄인 된 나를 향한 일방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 계속 묻는다. “하나님 왜 그러세요?” 그 까닭이 꼭 내가 이해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참으심이 꼭 내가 이해되는 이유로 설명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잘해주시니까 그 인간들이 여전히 그렇잖아요?” 이런 나의 참소가 사탄의 욥을 향한 참소와 무엇이 다른가? 

9.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죄인 된 나는 나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존재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8:4의 경이가 삶에 있어야 한다. 거래하려고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세상의 방식과 인과관계가 다른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태국 사람들을 위한, 또 내 주변의 가족들과 이웃을 위한 사랑,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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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3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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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13-23 사랑하는 자의 자리

1. 율법은 항상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모 아니면 도 이다.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 율법의 정신은 사람에게 향해 있었지만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율법 그 자체만 남았기 때문이다. 

2. 오늘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은 놓치고 율법 그 자체만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6절)

3. 안식일 계명을 범하였으니 사람을 구하였더라도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는 사람을 구하기 보다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자였다. 

4.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안식일의 정신은 지키셨지만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맹인을 안식일에 고치셨다. 복음은 항상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판단하는 자의 자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리에 서 계셨다. 

5. 바리새인들의 컨셉, 즉 판단하는 자의 자리는 쉽다. 어떤 상황도 관계없고, 어떤 예외도 없다.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율법 그 자체일 뿐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도 율법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보다 귀한가?

6.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율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한 것일 수 없다. 그 우선순위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위해 사람을 희생하게 만들게 된다. 

7. 올해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하되 나의 몸과 나의 지체와 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혹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있는가? 아님 판단하는 자의 자리에 있는가? 

8. 2024년의 1월이 벌써 마무리 되어 간다. 2024년이 처음 시작될 때 가졌던 그 마음들을 잘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길 원한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지 말자.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헛된 시도일 뿐이다. 판단하려 하지 말고 사랑하려 하자. 이것이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2024년에 내가 많은 것들을 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했던 일들만 남을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자.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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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29.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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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1-12 복음으로 생각하기

1.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다가 날 때 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1절)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살짝 이상하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 자기이니까 그의 부모니이까?” (2절)

2. 그들의 사고에서는 나면서 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군가의 죄로 인함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질문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 시대에는 가능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3. 그러나 이 질문은 무척이나 율법적인 질문이다.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범하면 벌을 받는다는 컨셉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율법적인 질문을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께 물은 것이었다. 

4.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역시 제 3의 대답이었다. 복음은 항상 율법적인 Yes와 No의 문제에 갇히지 않는다. 3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5.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작은 사고 즉, “잘했냐, 못했냐, 맞냐, 틀리냐”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만든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택,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에 조금도 더하거나 뺄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의 경직된 사고를 넘어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능력이다. 

6. 결국 이 날 때 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오늘 눈을 뜨게 된다 (6절).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누구의 죄인지의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면 여전히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것을 얻어내려고 계속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7. 그러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생각에 조금도 선한 것이 없으며, 율법적인 사고를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8. 복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복음이다.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이다. 그러나 그 진리로 논쟁을 하기 보다는 생명이 살아나는 일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Egeiro Club을 3:30-6:00까지 운영중이다. 커피숍 운영시간을 3:30 으로 단축시켜가며 까지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그 학생들 중에 5명이 어제 예배에 참석했다. 보통은 예배 끝날 때 즈음에 오는데 어제는 일찍 와서 처음 예배부터 참석하였다. 아직 이 친구들이 어떤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위해 베풀고, 나누고, 사랑할 때 그들이 뭔가 느끼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9. 이 아이들에게도 복음의 길, 사랑의 길을 계속 나누고 싶다. 지금은 껄렁껄렁 와서 놀다가 가고, 게임하다 가고 하지만 우리가 이들을 판단하지 않으며 우리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복음으로 살아가며, 복음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을 보여줄 때 이 친구들이 복음으로 변화될 것을 믿는다. 

10. 오늘도 샬롬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이들 사진을 못 찍었습니다. 사진에 동그라미 안에 있는 친구들이 어제 예배에 나왔던 5명 중에서 세 친구들 입니다. 사진은 Egeiro Club때 모습입니다. 계속 잘 관계를 맺어가며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제 저의 생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리고, 한 살 더 먹은 만큼 더 진중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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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2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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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12-20 나는 스스로 빛나는 별이 아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선언하셨다.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인 “I am…” 이라는 표현이다.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시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2절).

2.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고 스스로 하신 선언은 이 땅이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과 예수님 이외에는 그 어둠을 밝힐 빛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스스로 핵융합을 통해서 빛을 내는 존재를 별이라고 하고, 지구와 같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받은 빛을 반사하는 것들을 행성이라고 부른다. 

3.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이 없으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바로 종말을 맞게 된다. 지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빛나는 별이 필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 없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생명은 있더라도 생명의 의미는 없는 존재가 된다. 호흡은 하지만 그 호흡이 무엇을 위해 하게 되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4. 우리는 그 누구도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4절)

5. 그러나 어둠 속에 있는 존재들은 이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무시한다.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삶에서도 늘상 일어나는 사건이다. 

6.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내 삶을 비추시지 않으신다면 나의 삶 또한 여전히 어둠 속에, 여전히 거짓과 죄악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빛이 내 삶에 비춰야만 한다. 나는 믿으니까, 나는 선교사니까 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매일 매순간 나의 삶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야 한다. 

7. 나는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별이 아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빛 되신 주님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의 빛이 필요하고, 오늘 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도움과 사랑의 빛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춰주신 그 빛으로 나 혼자 잘 지내고,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비춰주신 그 빛을 반사하기 원한다. 

8. 눈 자매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교회가 힘을 내어서 함께 일어서려고 목양팀이 어제 밤에 서로를 격려하며 모임을 가졌다. 모임 중에 계속 든 생각은 눈 자매의 삶이 한 알의 밀알로 심겨져 썪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 같았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눈 자매 역시 연약함도 많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통해 선을 이뤄가신 느낌이었다. 결국 교회가 세워지려면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 기도와 수고가 있어야 함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의지로 가능하지 않다. 내가 결정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하고, 그 빛을 반사시키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없는 사역, 그리스도 없는 섬김, 그리스도 없는 헌신,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다. 

9. 빛 되신 그리스도를 더욱 더 붙들기 원한다. 오늘도 그 빛이 내 삶에 비치도록 말씀이신 그 분을 더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내 삶에 채우기 원한다. 내 존재가 그 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하고, 내 존재를 그 분께 기대자. 주님 내 삶에 주님의 빛을 비춰주소서.

10. 오늘도 샬롬 

*사진은 저희 목양팀 사진입니다. 아내 김신애 선교사는 아이들로 인해서 사진에서 빠져 있습니다. 저희 목양팀이 한 마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심고, 주님의 교회를 잘 세워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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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2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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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53-8:11 복음의 길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하다가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 군중들 사이에 세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3-4절).

2.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만약 율법을 지켜 여자에게 돌을 던지게 한다면 이는 로마가 법으로 금한 유대인이 판결을 내려 살인을 하는 것을 동조하는 것이 되는 것으로 로마의 범죄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자를 놓아주라고 하신다면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어떤 것을 선택하셔도 엄청난 리스크를 질 수 밖에 없는 사안에 예수님을 몰아놓고 (여자를 모든 사람들 앞에 세웠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지혜로우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복음의 정신을 따라 제 3의 길로 행동하셨기 때문이다. 

4. 율법은 항상 이분법 적이다. 모 아니면 도이다. 율법을 지켰는냐, 혹은 지키지 않았느냐, 또한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복을 받느냐 아니면 못 지켰기 때문에 벌을 받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것을 무 자르듯 두동강 내지 않는다. 에수님은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제 3의 길, 복음의 길을 선택하셨다.

5.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7절) 복음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이 구절이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6. 그 누구도 다른 이를 쉽게 율법으로 정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판단의 자리에 앉아서는 아니되고 사랑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돌로 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언제나 우리에게 Yes, 혹은 No 만을 이야기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이야기 한다. 내가 사랑받았음을 이야기 하고, 내가 용납받았음을 이야기 하신다. 그러기에 나도 사랑하고 용납하라고 또한 말씀하신다.  

7.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Yes 나 No 의 결정이 아니라 제 3의 길인 사랑 안에서의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이 진리를 가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복음은 오히려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결정하고 경험하게 되는 일은 진리에 관한 일이라기 보다는 사랑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자녀를 양육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진리를 내세울 일 보다는 사랑으로 결정해야 할 일들일 훨씬 더 많을 것이다. 

8. 때로는 사랑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도 자존심이라는게 나타나면 엉뚱하게 진리의 문제로 번지기 시작한다. 월요일에 아내와도 그런 일이 있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자존심이라는게 나오니 결국은 뭐가 맞느냐의 문제로 넘어갔고, 결국은 서로 마음이 상했었다. 항상 제 3의 길, 복음의 길, 사랑의 길로 걸어가야만 한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은 율법적이다. 결국은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고, 진리(라고 쓰고 내 자존심으로 읽을 수 밖에 없는 일)을 위해 논쟁하게 되고, 결국은 Yes 냐 No 냐의 문제로 결론내리게 된다. 오늘 간음한 여인을 군중들 앞에 세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도 결국 예수보다 자신들이 더 옳고 더 나은 선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자존심의 문제가 율법의 문제로 넘어간 사례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9. 나는 복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복음의 길로 걸어야 한다.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려면 복음의 길로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간 길을 걸으려면 복음적으로 제 3의 길로 걸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Yes도 No도 중요하지 않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할 뿐이다.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길 소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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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2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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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37-52 선입견이 깨어져야 그리스도가 보이게 된다

1. 예수께서 외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7절 하반부, 38절). 그리스도의 이 말은 참 말이었고, 이를 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난다 (42절)

2. 논쟁의 주된 내용은 예수가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가 확실한가? 였다. 이러한 논쟁이 생긴 까닭은 그가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1-42절)

3. 어쩌면 그들의 논쟁은 정당한 논쟁이었다. 선지자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는 것이 당연하고, 그 출신이 성경에 언급된 곳이 아니라면 의심하는 것이 맞다. 지금도 수 많은 거짓 선지자, 자칭 선지자들이 많지 않은가? 그들을 보면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 밖에 없다. 

4. 하지만 그들은 게을렀다. 열심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았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이전에 자칭 선지자들과 달랐다는 것을 말이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 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6절)

5. 청중들은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임을 깨달았으나, 예수님의 출신이 갈릴리라는 이유로 그 말씀을 무시했다. 열심히 이 말씀을 전하시는 분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갈릴리 사람이 되셨는지를 몰랐다. 

6. “갈릴리 출신"이라는 선입견이 다른 차원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깨지지 않았다. 그 선입견이 결국 자신들을 매는 올무가 되고 말았다. 나에게는 어떤 선입견과 깨지지 않는 생각들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우선되거나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혹시 있지는 않은가? 

7. 태국 사람들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국 사람과 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컨셉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신앙적인 분위기도 다르고, 그러한 분위기가 형성된 문화도 너무 다르다. 그럴 때 때로는 나는 선교사이고, 그들은 복음을 들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컨셉이 맞다고 생각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바꾸려고도 했었던 것 같다. 

8.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문화라는 옷을 입으며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 외에는 여러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문화적으로 다른 한국에서 온 나는 (아시아권이라는 유사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태국 사람들의 마음을 100%이해할 수도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잣대로 그들을 평가해서도 틀렸다고 말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는다. 물론 실제로 복음으로 새롭게 되어야 할 연약한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문화적인 부분에서 비롯된 다름과 내가 그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9. 예전에 교회에 왔었던 랩퍼 무 형제가 주일에 교회를 나왔다. 랩퍼이기에 뭔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고, 주일에도 일을 하기 때문에 오랫만에 교회를 나왔다. 예배를 드리다가 복음을 영접하겠다고 했다. 복음에 대해 조금 듣긴 했지만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영접기도를 하고 오히려 그 이후에 복음에 대해 확실하게 다시 설명했다. 이런 상황이 잘 이해는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나 내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복음은 이렇게 전해져야만 하고, 순서는 이래야 해’ 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성령님께서 일하는 방식에 내 몸을 실어야 한다. 나는 태국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외국인 형제일 뿐이다. 내 기준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기준을 취해야 한다. 부지런히 태국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오렌지 색 모자를 쓴 형제가 주일에 예수님을 영접한 래퍼 무 형제입니다. 독특한(?) 방법 (이것도 제 선입견이지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는데 믿음이 계속 자라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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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2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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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1-13 묻는 자가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

1.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은 다른 선생들과 달랐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야기 하시는 바람에 유대인의 표적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1절)

2. 이에 예수의 형제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자신들도 위험해질 것을 생각했던 것인지 예수님께 권한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은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3절)

3. 형제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에 놀라면서도 여전히 예수를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가득한 유대로 가라고 권한다. 그 이유는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5절)

4. 예수님이 유대로 가시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다. 죽음을 삶의 목적으로 태어나신 분이 죽음이 뭐가 두려웠겠는가? 예수께서는 아직 자기의 때가 이르지 않음을 아셨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8절)

5.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분별하셨다. 언제 사역을 시작하셔야 하는지, 언제 유대로 올라가야 하는지, 언제 제자들이 자기를 떠나고, 언제 가롯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지, 그리고 언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지도 아셨다. 

6. 자신의 때(사실은 아버지의 때)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언제 나아가고, 언제 뒤로 물러나야 할 지를 알 때, 우리는 교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된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때를 잘 분별하셨을까? 먼저 다윗의 삶을 보면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물었다. 묻고 하나님께서 답을 하시는대로 행동했다. 

7. 예수님도 새벽 미명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아버지께 물으시고, 아버지께 들으셨다. 그 결과는 자신의 뜻과 자신이 생각하는 타이밍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때를 알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때에 맞게 움직이신 것이다. 

8. 하나님의 때를 알기 위해서는 묻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묻더라도 스스로에게 물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때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얻게 한다. 계속 물어야 한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거일거야 라고 추측해서도 안된다. 하나님께 묻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길일 수도 있다. 지금은 지지 받지 못하는 길일 수도 있다. 순종하고 싶지 않은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것이 믿음이다. 오늘도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9. 어제 눈 자매의 추모예배가 있었다. 눈 자매의 추모예배에 참석하면서 여전히 하나님께 질문이 많았다. 그러나 어제 산과 눈 자매 부부가 그간 케어하던 Youth 친구들이 와서 특송을 하는 것을 보며, 또 아직 예수님을 잘 모르지만 추모예배에 참석한 고등학교 친구들을 보며 뭔가 마음이 뭉클했다. 나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짧았던 눈 자매의 삶을 단순한 시간의 길이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사실과 한 알의 씨앗이 땅에 심기운 사건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아프지만 나의 삶도 한 알의 밀알로 심겨지기를 소망하게 된다. 나 또한 눈 자매와 같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수쿰빛 언약교회의 남은 자들이 또한 눈 자매와 같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길 소망한다. 

10. 오늘도 샬롬

*눈 자매의 추모예배가 감사하게도 잘 마쳤습니다. 오늘은 한국 시간으로 5시부터 랑싯 감리교회에서 예배와 화장이 있습니다. 특별히 장례에 참석한 가족들과 친구들 중에도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눈 자매가 걸어간 길과 복음의 열매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사진은 특송을 했던 친구들입니다. 맨 왼쪽의 자매를 제외하고는 눈 자매와 저희 교회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한 친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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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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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41-59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

1.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8절) 이 생명의 떡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2. 어제 본문 마지막 구절이 아마도 이 먹고 마신다는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일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0절)

3.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나는 믿습니다"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뢰함과 의지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5-56절) 나의 모든 삶의 행동과 생각들이 그 분을 온전히 의지함으로 나는 그 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고, 거룩하시며 참 된 그 분이 또한 내 안에 거하시기에 나는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으로 그 분을 의식하고, 그 분의 방향에 맞추는 그런 삶이 바로 믿는다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일 것이다. 

5. 물론 우리에게 영원한 삶, 영원한 천국은 죽음 이후에 반드시 주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믿는다는 것은(믿음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 천국을 위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필요조건 같은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 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살아가며, 그 분의 걸어가시는 방향으로 그 분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나의 삶의 방향도 맞추어지고, 그 분을 따라가며 동행의 기쁨을 누리는 삶일 것이다. 

6. 즉, 찬송가 가사와 같이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삶일 것이다. 여기까지 묵상하며 지금 나의 걸음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오늘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7. 무엇을 믿고 있는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누리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이 나의 목표인가?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의 가치들을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단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천국에 가기만 소망하는 그런 삶은 아닌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1-2)

8. 매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그 분의 방향으로 걸을 수 없다. 잠시라도 방심하고, 교만하면 순간 무너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오늘도 묵상하고 있는가? 바쁘다고 핑계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하게 대하고 있지 않는가? 그 분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것을 단순히 성찬식으로 축소시키지 말자. 매일의 삶에서 그 분의 말씀을 대하고, 그 분을 예배하고, 그 분께 기도하는 것이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고,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를 누리며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원한 삶을 맛보는 방법이다. 육의 양식을 갈급해 하는 것처럼, 탐내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갈급해 하는 자가 되자. 그리고 잠시도 방심하거나 교만하지 말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더 기억하자. 

9. 오늘도 샬롬

*그간 눈 자매를 위해서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 자매의 장례 예배가 내일 저녁 7:30에 있고, 토요일 3시에는 화장 전에 예배를 드리고 4시에 화장을 하게 됩니다. 산 형제는 힘들어도 이 시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잘 보내고 있고, 오히려 부활의 신앙 속에서 슬퍼하는 저희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에 찬양팀에 서서 “주님은 주시며, 주님은 찾으시네" 라는 가사로 고백을 하는데 그게 얼마나 큰 슬픔과 동시에 큰 감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눈 자매가 삶으로 보여준 신실한 믿음의 유산들이 저희 수쿰빛 언약교회와 태국 땅에 흘러갈 수 있도록 장례 예배와 화장을 하는 모든 시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마칠 수 있도록 끝까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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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1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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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27-42 변화는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께 들음으로 시작된다

1.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났다. 영원한 생명수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은 완전하게 변하였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삶과 만나지 못한 자의 삶은 너무나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사마리아 여자의 말과 같다. “와서 보라" Come and See!! (27절 중)

2. 영원한 생명수를 만났기에 우리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수를 만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변화된 삶은 가장 놀라운 복음 전도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수단이 된다. 

3. 우리의 변화된 삶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변하게 되는 계기는 우리의 변화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부터 말씀을 직접 듣게 되면서 부터다. 

4. 41-4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5. 사람들은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교회로 나아오지만 결국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리게 될 때, 그들이 비록 반신반의 하며 우리의 변화된 삶에 관심만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더라도 그 말씀을 듣게 되면 그들이 믿게 된다. 

6. 그러므로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와서 보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삶이 복음으로 인해 변해야만 한다. 크리스챤은 예수쟁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대충 알고 대충 믿어서는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 진짜로 예수쟁이가 되어야 한다. 예수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7. 충분히 신뢰를 쌓고, 사랑을 쌓아 그들로 복음을 듣게 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사랑을 쏟아야 한다. 특별히 교회에 대해 적대시 하는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전도가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러나 전도가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달랐기에 복음은 전해졌다. 

8. 나의 삶은 태국의 영혼들에게 정말 “와서 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인가? 나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중심에 있는가? 나는 예수쟁이인가? 결국 나의 삶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역도, 복음 전도도..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이 세대의 기준이 아니라 성경의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야 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한다. 

9. 죄인 된 나의 삶은 내 힘으로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께 들어야 한다. 매일, 매 순간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께 들을 때 우리의 삶이 말씀으로 인해 또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변화 받게 된다. 오늘 또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께 듣기 원한다. 그리하여 내 삶에 그리스도만 남기를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눈 자매는 감사하게도 심장은 스스로 뛰고 있지만 현재 인공 호흡기 없이 자가 호흡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부은 뇌가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고, 심장에 부정맥 현상이 자꾸 일어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AICD라는 심장에 전기적 자극을 주는 기계를 수술로 심장에 부착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직도 의식이 없는  상황이라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뇌 손상 없이 잘 깨어 날수 있도록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기도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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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1. 1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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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15-26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눈 자매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주세요)

1. 드디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자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인정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5절)

2. 여인이 아무도 물을 긷기 위해 오지 않는 가장 더운 시간(이스라엘 시간 여섯시는 정오임)에 이 곳에 오는 이유는 아마도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물을 긷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스라엘의 문화적인 기준으로 정결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 하심으로 그녀가 진정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우상)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신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남편)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총 5번의 결혼을 했고, 지금도 한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4. 사마리아 여인의 삶의 모습은 사실 특별하지 않다. 우리 크리스챤들에게서도 일상적으로 발견되는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사랑하는가?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듣기 보다는 인터넷의 정보로부터, 유튜브로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 멀리 계신 하나님보다는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5. 이러한 태도는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믿는 태도인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보다도 더 신뢰할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내 삶을 통제하고,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도 이와 동일한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고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보다도 먹어도 괜찮고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했던 것이었다. 

6. 2024년 나는 누구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며, 모든 빛 보다 더 빛나는 영광이시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 인가? 아니면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아 답답해 하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내 머리와 내 생각을 신뢰하며 살아갈 것인가? 

7. 대답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서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이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내가 5명의 남편이 이미 있었고, 지금도 다른 남자를 의지하고 있는 중이라는 현실이 직시가 되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내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나의 죄성도 나의 악함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여인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과 마주하지 않았는가? 

8. 태국에 다시 돌아오기 전이었으니 2016 혹은 2017년부터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보내기 시작했다. 묵상하고 정리하고 그것을 카톡으로 한 사람씩 보내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1-2시간은 걸린다. 그래서 때로는 귀찮게 느껴진다. 그만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 묵상이 내 삶을 지켜주고, 지탱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큐티를 몇 일 안 보내면 꼭 한두 사람씩 물어본다. “선교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바쁘세요? 아프세요? 큐티가 안와서요…” 그런 질문들이 나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만든다. 어쩌면 내가 보내는 묵상이 디지털 쓰레기 같지 않을까? 카톡 스팸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9. 그러나 내가 보낸 묵상과 기도의 제목을 읽고 안 읽고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그 삶의 자세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 이기에 묵상하는 것이다. 그거면 됐다. 올해도 열심히 묵상하고 보내기로 다시 결정한다. 

10. 오늘도 샬롬

*어제 아침에 묵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회 리더인 눈 자매가 호흡이 안되어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구급차를 부르고 실려가면서 30분을 CPR을 했는데도 2분 정도 호흡이 멈췄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고, 감사하게도 심장이 다시 스스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장 박동과 혈압을 정상으로 올리기 위해 약을 먹고 있으며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처음에 병원에서는 살 수 있는 확률이 50%라고 했으나 지금은 조금 더 소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함께 기도하고 격려했습니다. 눈 자매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심장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도록, 뇌 손상 없이 의식이 잘 돌아오도록, 그리고 원인이 잘 발견되어 치료되도록!! 저희가 할 수 있는게 기도 밖에 없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지만 그 기도가 가장 큰 능력임을 믿습니다. 함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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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