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2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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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7:1-8 영생의 신비

1. 예수께서 자신의 때와 영화롭게 되심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1절).

2. 때가 이르렀다는 말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은 결국 한 가지 동일한 사건을 가르키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 처절한 십자가를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영화(glorify)롭게 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3. 십자가는 모든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께서 영화롭게 되시는 것임을 표현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살아갈 때, 경험하게 되는 신비일 것이다. 

4. 그러기에 영생은 이 신비를 경험하는 매일의 삶일 것이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아래에서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삶,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아감을 경험하는 신비의 순간이 영생일 것이다. 

5. 그래서 성경은 이야기 한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생명이 있는 동안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묻고, 대화하고, 그 분께 듣고 걸어가는 삶이 더 놀라운 신비인 것이다. 

6. 죽어서 가는 천국 만이 전부라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는게 더 좋은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우리의 삶은 의미와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그 분과 매 순간을 교제하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어야만 한다. 

7. 그래서 우리 영생을 누리는 자의 삶은 반드시 달라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는 기준과 기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과 뜻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8.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신비를 누리고 싶다. 나이가 들 수록 내 생각이 더 강해지고,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가지려면 결국은 그리스도께 들어야만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항상 물었다. 묻고, 들은대로 그는 순종했다. 그는 날마다의 삶에서 영생의 신비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생각에 함몰되어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건 때였다. 더 이상 하나님께 묻고 듣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욕망대로 행동했고,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던 그 모든 신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의 삶에서 영생을 누릴 것인가? 오늘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신비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욕망과 내 생각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9. 오늘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영생을 누리길 원한다. 오늘의 삶에서 욕망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수쿰빛언약교회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공간이 좁아져서 더 큰 공간을 위해 기도하고 알아보는 중입니다. 감사하게도 지난 주 가본 정부기관인 '과학교육센터'에 공간이 있어서 (BTS 에까마이 역 근처러 가깝습니다) 알아보는 중입니다. 감사하게도 주일만 렌트를 할 수 있고, 비용도 4시간에 3천바트 정도로 싼 편입니다. 다만 매주 예약을 해야 하고, 악기나 음향장비를 매번 옮겨야 하고, 식사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 80명 가량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고, 지금 커피숍을 유지하면서 렌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잘 논의가 되어서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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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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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1-15 그들 안의 성령님을 신뢰하는가?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를 4절은 설명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경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마치 마태복음 9:14-17에서 금식 논쟁이 있었을 때 하셨던 말씀과 비슷하다. 요한의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 9:15).

3.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더 기뻐하고, 그 분의 말씀을 더 깊이 듣고, 그 분과 사랑의 관계를 더 깊이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찾아오고, 신랑 되신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가실 날이 분명히 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시간도 준비해주셨다. 

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7절).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사명을 감당하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예수님을 대신해 우리 안에 내주하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다. 

5.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다 듣지 못하고, 다 깨닫지 못하고, 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들을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실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3절). 

6. 우리는 고아와 같이 홀로 남겨진 존재들이 아니다. 이 땅에서 혼자 분투하고, 홀로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지도 않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신 것이다. 

7. 때로는 나의 자녀들이 염려가 될 때가 있다. 얘들이 잘 배우고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믿음은 성장하고 있는지.. 그 때 마다 내 힘으로는 이 아이들을 조금도 잘 돌보거나 성장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 안에 계신 성령님을 (나보다도 더 이 아이들을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신뢰하기에 아이들과 늘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안심할 수 있다. 

8. 어제 오랜만에 링 자매를 만났다. 태국에 다시 돌아와서 처음으로 샬롬 기숙사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삶을 나누며 지속적으로 교제를 가졌던 친구들 중에 한 명이다. 이 친구는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연락이 와서 만나는데, 이제 대학을 막 마쳤고, 고향인 치앙마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지내면서 일을 할 거라고 말을 하며 치앙마이로 가기 전에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어제 만나게 되었다. 어제 만나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 하는데, 이 자매가 자신의 계획이 변경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콕 영광교회(첫 텀과 교회 개척전까지 섬겼던 교회)에서 아이들 캠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르치신 부분이 있어서 방콕에서 일을 알아보고, 영광교회를 계속 섬기겠다고 말하였다. 너무나도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고향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 묻고 들어서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에서 이 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9. 그래도 그간 자매를 만나면서 함께 교제하고 멘토링 해줬던 시간들을 돌아았더니 정말 내가 한게 아무것도 없고, 성령님께서 링 자매 안에서 일하시고 계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이러한 결정이 될 수 있었을까? 선교사로써 태국 사람들을 보면서 조급해지거나, 불안한 이유는 ‘내가 그들 안에 계신 성령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디더라도, 돌아가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들 안에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는 확신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하게 든다. 그게 동역이고, 그게 사랑이다. 간섭하고, 명령하고, 내 생각대로 이끌어 가려는 한 그들은 성장하지 못한다. 내 생각과 계획이 아니라 여전히 일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성령님을 신뢰하는 선교사로 살아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링 자매와 찍은 사진입니다. 링 자매가 교대과정을 마쳐서 방콕에서 초등학교 선생님 자리를 알아보고, 방콕 영광교회를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 동안 힘든 시간도 많았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과 성장, 그리고 성숙이 계속 있도록, 또 적절한 학교와 교사 자리를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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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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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15-24 사랑에는 성령충만함이 요구된다

1. 오늘 본문은 진리의 영, 성령에 대한 본문이다. 평소에도 그렇게 묵상하고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피다 보니 오히려 예수께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 15절이 이렇게 시작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 예수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게 되고, 그 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우리를 돕는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결함을 입어야 하는데, 그것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이다. 

3.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7절 하반부) 그런데 성령님을 잠깐 이렇게 소개하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성령에 대한 소개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에 대해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4.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1절)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 예수님은 강조하신다. 23절 하반부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말씀하신다. 

5.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23절 상반부).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계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계명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결국 이 계명의 핵심은 사랑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 주신 계명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또 반대로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계명이 순환되고 있고,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이다. 

6. 사랑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을 거룩함을 쫓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분은 우리를 고아처럼 두시지 아니하시고 계속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7. 즉, 사랑은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내 노력만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함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에 있어서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든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의 도움이 너무나도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인 것이다. 

8. 그 동안 사랑하려고, 용서하려고,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들을 해왔었다. 그런데 그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것들을 많이 경험했다. 계속해서 내 안에서 분노가 올라오거나 억울한 마음이 올라오는 경험들이 있었다. 내 힘으로 사랑 하려고 할 때 느껴지는 한계들이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려는 노력을 포기 하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께 계속해서 구해야 함을 배우게 된다. 내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을 늘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 없음을 도우시길 기도해야만 한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영이 내 안에 거하시기에 내 안에 사랑이 흘러 나오도록 구해야 한다. 사랑이 내 안에서 나올 거라는 착각을 버리고, 내 힘과 노력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빠져 나오자.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충만함을 더 구하자. 

9. 오늘 저녁에도 형제, 자매들과 에게이로 케어그룹 모임이 있다. 입에만 발린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간구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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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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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31-38 사랑=제자

1. 가롯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후에…” (31절) 가롯 유다에게 애찬을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 그 자체이다.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았지만 그를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대하지 않으셨다. 여전히 사랑하셨고, 여전히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가롯 유다는 배신할 놈이니 발을 씻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항상 일치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3.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4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다. 우리에게 그저 너희들이 열심을 다해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가롯 유다를 끝까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너희를 미워하고 배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4. 제자는 스승을 카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스승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서 하고, 스승이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헬라어 단어의 영어 단어는 imitate이다. 

5. 우리는 현대의 컨텍스트에서는 이 ‘이미테이션’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쓰는데, 한국어로는 곧잘 짝퉁이라고 표현한다. 명품제품들을 모방하여 아주 똑같이 만들어 파는 것을 우리는 이미테이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용 용법과 상관없이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선명하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는 것을 우리는 모방해야만 한다. 

6. 주님께서 사랑하셨으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으면,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5절)

7. 세상 사람들이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우리를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제자란 예수께서 하신 말, 예수께서 하신 행동을 모방하는 자이고, 예수로 살아가면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8. 결국 다시 34절 말씀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쉽지 않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오죽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 받은 자라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 쉽지 않아도 사랑을 선택해야 하고, 힘들어도 사랑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는 일은 칼과 총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한동대학교의 슬로건이 있다. Why not change the world? 그러나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을 바꾸며, 무엇으로 세상이 하나님을 보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오직 사랑 뿐이다. NIBC의 정신도 그래서 사랑인 것이다. 

9. 오늘도 사랑하기 원한다. 사랑하기 힘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더욱 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만나고 알아야 한다. 나를 변화시킨 사랑 안에 더 깊이 거할 때,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깨달을 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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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3. 1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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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21-30 가롯 유다만 죄인인가? 

1. 유다는 예수님을 팔 모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실제로 아직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을 만나서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마치 브레이크가 터진 자동차 처럼 말이다. 

2.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너무 괴로워하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21절) 죄로 향해 달려가는 유다의 마음은 예수님의 이 긍휼한 말씀도 들리지 않았다. 

3. 자칭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이 묻는다. “주여 누구이니이까?” (2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6절) 본문의 내용을 통해 유추하자면 유다는 이 대화를 듣지 못했던 것 같다. 

4. 그러나 이 때 유다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근거렸을까? 한 때 자신이 사랑했던 주님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마음은 예수를 죽이려는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떡을 포도주에 찍어서 주신다. 어디서 본듯 한 장면이 아닌가? 교회에서 하는 애찬식의 모습이다. 즉 애찬의 떡을 떼어서 자신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이다. 

5. 자신은 예수를 증오하고, 예수의 효용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예수를 죽이려는 결정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애찬의 떡을 주시며 자신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가롯 유다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6. 어릴 때 성경을 보면서는 늘 가롯 유다의 어리석음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가롯 유다와 같지 않다고, 예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나는 죄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만 사랑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유다라고 그리스도를 항상 배신하려고만 했겠는가? 그도 한 때는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었던 제자 아니었던가? 

7.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공존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보다는 죄를 사랑하여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가롯 유다도 사랑하셨다.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8.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를 혹시 의롭다고, 괜찮다고, 선교사니까, 목사니까, 사역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가롯 유다 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고,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자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죄도 사랑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나의 이익을 찾는 나같은 사람도 주님이 여전히 사랑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믿고, 따라가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내가 지금 부끄럽지만 부족하지만 내 삶은 여전히 죄로 가득차 있더라도 주의 은혜로 목사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9. 가롯 유다의 배신은 우리의 죄성의 모델이다. 그만 특별히 악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중 누구라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배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여전히 애찬의 떡을 주시고, 사랑해주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여전히 애찬의 떡을 주시고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오늘을 은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으로 조금이라도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길 원하며, 삶의 한 모퉁이라도 그 분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내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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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45-57 내가 중요한 사람들이 해야 할 고백

1. 나사로를 부활시킨 예수님의 기적을 본 유대인들은 두 부류로 나눠진다. 아이러니 하게도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자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로 나눠진다. 

2. 왜 똑같은 기적을 보고서 두 그룹으로 나눠지는가? 두 부류는 각각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보았기 보다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볼 때 어떤 것이 더 이익인지에 따라서 나눠졌다고 볼 수 있다. 

3. 믿은 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만의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순수하게 믿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후의 본문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리스도를 구약 이사야의 예언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유대인들 만의 메시아로 소망했던 것 같다. 

4.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무리들은 로마로 부터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보호받았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민란을 두려워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8절) 민란이 발생하여 가진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대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5. 이 두 그룹을 보면서 베드로에게 던졌던 예수님의 질문이 생각났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나는 어떤 그룹에 속한 사람일까? 첫 번째 그룹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나만의 하나님이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램프의 지니처럼 나를 위한 하나님이셔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지는 않은가? 

6. 아니라면 두 번째 그룹의 모습 처럼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은 희생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 분이 메시아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나의 권력과 자리일 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잘 되는 것, 내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 이기에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7. 두 그룹 모두 그리스도 보다 내가 더 중요한 사람들 이었다. 내가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그 누구보다도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나의 욕망만이 중요하고, 나의 욕망이 채워져야 하고, 결국은 나의 욕망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야만 한다. 나에게 이 두 그룹 속의 유대인들의 모습이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8. 이러한 우리의 존재의 가벼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고백할 수 있게 된다. “Not I, but Christ”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나의 욕망보다 그리스도께서 더 귀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위해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는 유대인 두 그룹이 예수님을 대했던 것과 같은 나의 태도에서 절망을 보아야만 한다. 나에게 이 두 그룹 속의 유대인들처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음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 약속대로 죽어주셨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크심을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죽고 예수로 살 수 있다.  

9. 오늘 나는 어떤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욕망을 뒤로 하고 “Not I, but Christ” 를 외치며 그리스도를 따라 한 걸음을 내딛기 원한다. 누구를 위한 사역이며,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다 욕망일 뿐이다. 내 안에 사역을 잘 하는 선교사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스도만 전하는 선교사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도 “Not I, but Christ” 로 살아가기 원한다. 욕망이 아니라 복음이 나를 이끌어 가기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붐 형제(어제 사진에 보셨던 테오 형제 동생)와 1:1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한 달 즈음 전에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냐고 질문을 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믿음은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인도 이야기 하기를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한 번도 양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하여 1:1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동안 힘든 일들도 많았고, 무엇인가를 잘해내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줄 거라고 믿으면서 부담도 많이 컸던 것 같습니다. 양육을 통해 붐 형제가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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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17-27 예수님을 보는 시선, 마리아 vs 마르다

1. 나사로가 죽었다. 11장 전반부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음에도 예수님은 슬퍼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위한 다른 계획(그를 부활하게 하실)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2. 나사로의 누이 두 사람이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이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예수님 발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는 나오지 않았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0절).

3. 뭔가 마리아답지 않은 모습이다. 아마도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실망해서 하나님께 말하고 싶지 않고, 그 앞에 나아가고 싶지 않을 때 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2절) 

5. 또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그저 자신의 사랑하는 오빠의 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주 (주님, 주인)’라고 불렀다. 그녀가 그리스도를 부르는 호칭, 그녀가 그리스도께 구하는 22절의 내용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오빠를 사랑하는 한 친구로 대하고 있지 않다. 

6. 그녀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대하고 있다. 마리아는 오빠가 이미 죽었기에 실망감에 예수님께서 오셔도 나와보지도 않았지만 마르다는 이미 늦었더라도 예수께서 하나님께 구하면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믿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믿었던 예수님보다 마르다가 믿었던 예수님이 훨씬 더 크고 놀라우신 분이셨다. 

7.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느냐를 두 자매의 반응을 통해 생각해보게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게 만든다. 죽음이 예수님보다 더 크다고 믿었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러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보다도 더 크신 분으로 믿었던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오빠를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된다. 

8.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는가?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인가?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하나님이신가? 나는 그 분을 작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마리아와 같이 때로는 이미 ‘하나님은 못하실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으셔'라고 전제하며 하나님을 배제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을 내가 어디까지 신뢰하느냐의 문제이다. 부활을 믿으려면, 부활이 실제가 되려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셔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나는 마리아의 시선으로 주님을 보고 있는가? 마르다의 시선으로 주님을 보고 있는가? 

9. 예수님을 작게 보는 우를 범하지 않기 원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 주님과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원한다. 주님의 크심이, 주님의 광대하심이 나의 삶을 오늘도 이끌어가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테오, 임 부부가 교회멤버로 등록했습니다. 남편 테오 형제는 10년을 넘게 베트남의 NIBC회사와 함께 일해오던 형제이고, 주로 우본에서 생활을 했었습니다. 아내 임 자매는 작년 말에 스위스에서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마히돈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1월 초에 결혼을 했고, 저희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정하고 식사 교제를 가졌습니다. 이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세워지길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희 교회에 마히돈 대학 교수가 2명이 있게 되었는데 (그동안 기도해주신 좁 형제까지..) 하나님께서 뭔가 하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과정을 잘 분별하고, 순종함으로 마히돈 대학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하고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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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2. 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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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2:1-20 나는 그리스도의 편지인가? 

1.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 핵심 논지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2절 상반부)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2. 사실 엘리바스의 말은 맞다. 우리 인생은 악하고, 또 악하다. 그 누가 하나님께 유익할 수 있으며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경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티끌이며,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는 악한자일 따름이다. 

3. 13-14절에 엘리바스는 다시 이야기 한다.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도, 생각도, 마음의 의도도 조금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다. 모든 것이 그 분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들이다. 

4. 이런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악하며 죄를 짓는 존재들이기에, 우리의 모든 허물과 연약함, 드러난 모든 죄를 감추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하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아신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셨고,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대속함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6. 영원한 죄를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이 지옥이 아닌가? 그 죄를 멈출 수가 없고,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이 바로 절망의 끝일 것이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고발한 그런 악독한 존재인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것을 용서받고 모든 관계가 회복된 존재가 된 것이다. 

7. 그렇기에 복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모든 끊어진 관계, 모든 절망, 모든 연약함이 회복되는 지점이 바로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한 기독교라는 종교로 머물 수 없다. 복음은 삶이고, 복음은 변화이며, 복음은 나의 정체성이며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된다. 

8. 나는 이런 놀라운 복음을 가진 사람이며, 이 놀라운 복음을 태국 사람들에게 전하러 온 사람이다. 복음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나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은 바울이 이야기 한 것 처럼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3:3)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용납함이 내 삶을 통해서 읽혀지고, 전해져야 한다.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을 수 없다면 나의 모든 사역도 헛될 뿐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의 편지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인가? 아님 늘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그저 바쁘게 밖으로 돌아다니는 아버지일 뿐인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오늘을 살아내는 내가 되길 원한다. 

9.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은 사실 틀린 말이다. 욥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바스가 나에게 하는 말은 맞는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도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내길 원한다.

10. 오늘도 샬롬

*에게이로 클럽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결신하는 고등학교 형제, 자매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진에도 아래쪽에 브이 하고 있는 아트 형제(관심자), 윗 줄에서는 가장 왼쪽 왓수 형제 (영접 후 교육중), 그리고 왼쪽에서 세 번째 아치 자매 (지난 주 영접) 가 계속 예배와 케어그룹 모임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도 계속해서 고등학교 형제, 자매들이 오고 있습니다. 지혜롭게 에게이로 클럽을 운영하고, 계속 복음이 전해져서 더 많은 영혼들이 이 놀라운 자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저희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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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24. 2. 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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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8:1-21 옳음을 증명하려 말하지 말고 영혼을 살리려는 말을 하자

1. 욥의 (뻔뻔한) 대답에 빌달이 화가 난 것 같다. 권선징악의 사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분명 욥의 삶에는 죄의 결과인 고통이 가득차 있는데, 욥은 여전히 자신에 대해서 변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2. 2절은 빌달의 화가 표현된다.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욥은 아직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약간 성내면서 말하고 있다. 

3. 그리고 그는 악인의 운명을 5-14절까지, 악인의 최후를 15-20절까지 말하고 있다. 5절을 보면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5-20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권선징악의 표현대로 악인은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4. 빌달이 가지고 있는 사고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죄가 없는 자는 복을 누리고, 죄가 있는 자는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 그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고, 그의 논리는 탄탄했다. 

5. 그러나 그의 옳은 말은 욥의 마음을 비수같이 찔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욥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하기 보다는 욥의 마음을 난도질 하고 있었고, 너의 고통은 너의 죄의 결과일 뿐이니 회개하라고 말한다. 

6. 어떤 말을 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옳은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만 지혜롭게 말을 하면 같은 옳은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좀 더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7. 나의 옳음을 주장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하는 옳은 말은 결코 다른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그저 나의 옳음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 돌아가더라도, 혹 나의 옳음이 증명되지 않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8. 최근에 아내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 “오빠 말 좀 이쁘게 해"였다. 나의 말투가 문제인 것 같다. 악의가 없어도, 나쁜 의도가 없어도 말투가 뭔가 공격적이거나 혹은 아내가 듣기에 불편하게 말한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럼 곧바로 대답한다.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어"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오늘 묵상을 하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혹시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오히려 해야 할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말이 아닌가? 나의 말 끝에 나의 옳음만 남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명이 남아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번 마음을 잡는다. 정신줄 잡고 말하기,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지 않기, 살리는 말을 하자. 

9. 빌달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원한다. 정신줄 놓으면 사실 금방 다시 말을 통해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의로움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의롭겠는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보다 낫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영혼이다. 사랑이다.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자. 

10. 오늘도 샬롬

*에게로 클럽이 재정비가 되고 있습니다. 사역자 회의를 통해서 어떻게 왓타텅 학생들을 섬길지 나누고, 알파코스를 통해서 접촉점을 늘려가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기를, 그리고 지금 주일 예배에, 에게로 클롭 모임에 나오는 모든 학생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잘 심기워지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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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24. 2. 13.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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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0:1-22 다 알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다

1.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원인이나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게 된다. 

2.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나쁘게 살지 않았다’ 혹은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공평 하다’는 논지일 것이다. 욥도 원인 모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중이고, 그의 세 친구들이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왔으나 위로는 커녕 오히려 정죄의 말만 쏟아내고 있다.

3. 8장에서 빌닷의 말을 들은 욥의 반응이다. 욥의 반응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도 왜 이런 고통이 자신에게 찾아 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래서 2절에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

4. 욥은 정말로 알고 싶었다. 우리가 욥의 인생을 알지만 그가 이런 어려움을 당할만한 까닭이 있었는가? 그는 당대의 의로운 사람으로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의로운 자가 욥 아니었는가? 그러니 이유를 알고 싶은 그의 반응은 당연하다. 

5. 그리고 그는 9절에서 외친다. “기억하옵소서" 자신의 삶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하시기를 간구한다.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 그러나 욥은 그 이유에 대해서 결코 듣지 못한다. 

6.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우리 인간의 생각 속에서 의인의 고통은 쉽지 않은 일이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아야 하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착하게 살았을 전제 하에서나 성립되는 공식이다. 우리가 ‘권선’의 영역이 아니라 ‘징악’의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7.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9) 우리가 ‘권선’의 영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이유가 필요하다. 억울하다. 물론 우리는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죄인일 뿐이다 (롬 3:23). 

8. 어찌보면 억울하다. 어찌보면 화가 난다. 욥의 모든 반응이 이해가 된다. 나로 알게 하시고, 나를 기억하시라는 그의 고백이 다 나의 고백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딱 하나이다.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왜 내 삶에 이런 어려움이 찾아오는지,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며 오직 피조물일 뿐이며 하나님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이 이 고통의 순간에도, 어려운 시간에도 선하시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6:1)

9.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선하심을 믿으며 이 땅에서는 다 모르지만 다 이해되지 않지만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다. 다 알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도 그 분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기 원한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묻고 싶고, 항변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지만… 나는 믿는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 오늘도 샬롬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에게이로 클럽(Egeiro Club)이 너무 활성화가 잘 되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기도를 부탁드리는 것은 아이들이 너무 많이 오는데 비해서 저희가 함께 섬길 사람들이 부족하여서 좀 분주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에게로 클럽을 섬기는 모두에게 지혜를 주시길.. 그리고 그 친구들 중에 주일 예배를 참석하는 그룹, 주일 예배에 밥만 먹으러 오는 그룹, 또 예배 이후의 체육활동만 오는 그룹 등으로 나눠져서 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오든지 문제는 없지만 딱 하나의 문제는 저희 교회 예배당이 좁아서 다 너무 분주하다는데 있습니다. 이 그룹들을 효율적으로 잘 인도해서 주일 예배가 분주하지 않도록, 또 관계가 잘 세워지고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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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