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3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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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41-53 2019년에는...

  1.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고, 그는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였다. 산당을 폐하지 않은 연약함(43절) 도 있었지만, 그는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다는 꽤 괜찮은 평가를 받는 왕이었다. 
  1. 그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달콤한 유혹도 거절한다 (49절). 금을 구하러 간 배가 파선하였고, 그들에게 분명히 필요한 것이 있었지만 아합왕의 아들과 함께 하는 길을 포기한다. 자신의 삶에 이득보다도 악한 자와 교제하지 않기로 한다. 
  1. 반면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그의 어머니의 길로 행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다. 최악의 평가를 받는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완전하게 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수하더라도 돌이키고, 넘어지더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의 인생을 여호사밧처럼 아하시야처럼 평가하실 날이 올 것이다.
  3. 오늘은 2018년의 마지막 날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과연 나는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답은 내 안에 이미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4.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혈기 부리고, 여전히 연약하지만 그래도 2019년에도 매일을 말씀으로 살아내고 싶다. 주님께 묻고, 주님께 듣고, 주님께 들은대로 행하는 자가 되고 싶다. 
  5. 물어도 실수하고, 들어도 실수하고, 행하면서도 실수하지만 그래도 주님 안에 거하고 싶다. 행동이 완전하여서가 아니라 내가 주님과 함께 걸으려는 그 몸부림과 안간힘이 하나님께서 이쁘게 보시는 포인트가 되는 한해가 되기 원한다. 
  6.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 재우의 길로, 어머니 신애의 길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아이들도 말씀이 이끄시는 삶을 경험해내는 한 해가 되기 원한다. 
  7. 아이들이 엄마와 매일 말씀을 읽고 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좋다. 계속해서 집 안에 그 말씀읽는 소리가 들리는 한 해가 되기 원한다.
  8. 2019년은 정말로 주님과 더 깊은 교제가 생기는 한 해가 되기 원한다. 은혜를 더해 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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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3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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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15-28 살아내기 전에 듣자.

미가야는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아합왕이 진실을 이야기 하라고 해서 진실을 이야기 한다. 그 결과는 선지자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말씀을 쫓아가는 인생은 어쩌면 이렇게 뺨 맞고, 감옥에 갇히고 하는 시련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가야는 자신이 경험하고 들은 것들을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것들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감옥도, 어떤 고난도 그는 넘어갈 수 있었다. 하물며 우리는 들은 것을 어찌 말하지 않으며, 경험한 것들을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듣고 경험한 것은 우리 삶에서 강하게 역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직접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말로 우리가 말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들었느냐? 경험하였느냐의 문제이다. 

어제 밤에 아내가 우리가 좀 더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고 말하였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기도가 정말로 더 필요하다. 동역자들이 우리를 위해서 해주는 기도만큼 우리가 하는 기도도 필요하다. 말씀을 쫓아가며 기도가 더 절실히 필요함을 느낀다. 정말로 들었느냐, 정말로 경험하였느냐가 정말로 내가 말씀을 쫓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게 됨을 잊지 말자. 

들었던 미가야는 말한다. 들었던 미가야는 옥에 갇힐 수 있다. 들었던 미가야는 확신한다. 결국엔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25절).. 먼저 들어야, 먼저 경험해야 들리는 말씀을 따라갈 수 있다. 먼저 더 기도하고, 더 잠잠히 하나님 앞에 머물며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살아내기 전에 듣자. 그것이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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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2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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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1-14 귀를 위한 말이 아니라 인생을 위한 말

끼리끼리 모인다. 아합왕 주변에 있는 선지자들이 사백 명이나 있지만 그들은 아합의 눈치만 보며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아합왕은 그를 미워한다 (8절).

예언이 무엇인가? 정직하게 꼭 해야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언이 아닌가? 만약 길한 것만을 이야기 하면 그것이 예언인가? 아니면 아첨인가?

아합 주위에는 그러한 선지자만 사 백명이 몰려들어 한결같이 길한 이야기만 한다. 하지만 여호사밧 왕은 그것에 속지 않고, 정직하게 해야 할 이야기를 해줄 다른 선지자를 찾는다. 

나는 어떠한 말을 듣기 원하는가? 달콤한 말인가? 아니면 나에게 득이 되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꼭 들어야 할 말인가?

길한 말들, 좋은 말들이 주는 좋은 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쉬이 쫓아간다. 듣기 좋고, 마음에 소화하기 좋은 말들만 쫓는 인생이 되지 않고, 맘을 어렵게 하고, 힘들어도 말씀만 쫓아가기 원한다.

2018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나는 어떤 말씀을 쫓아왔고, 내년에는 어떤 말씀을 쫓아서 갈 것인가? 기도하며 구하길 원한다.

2019년 한 해도 말씀의 푯대만 보며 쫓아가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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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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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11-29 너도 나도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이세벨의 계략대로 나봇은 결국 죽게 되고, 그의 포도밭은 아합이 차지하게 된다.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아합과 이세벨에게 임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27절부터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27절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엘리야에게 말씀으로 임하셔서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돌로 때려 죽이도록 사주하고, 여태까지 지은 악이 얼마인데, 회개하니 돌아보십니까? 라는 불만이 내 안에서 터져나온다. 마치 니느웨 백성을 보는 요나의 마음이다. 쟤들이 과연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까? 하나님 절대 마음을 돌이키지 마세요!! 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복음이다. 아합도, 이세벨도 복음이 필요하며, 그들이 돌이킬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다. 이것이 때로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온다. 마치 내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나는 더 많은 죄와 악에서 용서 받았는데, 내 기준에 나보다 악해 보이는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내 알량한 의로 항변하고 있다.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이 은혜로 치뤄지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제와 다른 빛 가운데 살아내는 것이 복음이다. 아합과 내가 다른 점이 많이 없음에도 그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고 가르는 것이 비복음적인 태도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막 10:17-18). 그도 악하고, 나도 악하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악하여서 복음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다. 내가 나봇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내가 아합이고, 내가 이세벨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심판을 연기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요엘이와의 일에서 자꾸만 요엘이가 하는 행동에서 내가 참고, 내가 견딘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바꿔야 한다. 요엘이의 현재 상황에 우리 부부가 관여한 것이 가장 크다. 우리로 인해 요엘이가 힘들어 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많다. 나는 지금 선하고, 요엘이가 짜증부린다는 마음을 버리자. 나도, 요엘이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교만함을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간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가는 오늘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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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2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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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8-20 입으로 예수를 기다리지 말고 삶으로 예수를 기다리는 자가 되자.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하고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 중 한 그룹이 바로 목자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소식은 먼저 가장 작고 연약한 자들에게 들려졌다. 모두들 자고 있는 그 때에 열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양 떼를 지키는 그들에게 천사의 소식이 나타났다.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린다고 늘 말하던 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신분이 낮고, 가난하여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 입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도 마찬가지다. 입으로만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 속에서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로 임하신다. 

천사는 너희가 보게 될 그 아기가 바로 ‘그리스도 주’ (11절)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아이는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14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이의 존재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에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만 평화가 됨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오심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지 않음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성경에서 읽어서 알듯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 누가 그랬는가? 바로 입으로 기다리던 자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예수를 거절했다. 자신의 기득권이 가진 것이, 자신들의 성경 해석이, 자신들의 관점이, 자신들의 민족이 예수보다, 하나님 보다 더 중요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거절했다. 예수는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평화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가지고 기다리는가? 내 생각, 내 관념, 내 민족, 내 유익…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앞에서 모든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평화가 와야 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기다리는 자들은 이러한 것들은 다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내려놓을 생각이 없으면서 오직 입으로만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우리의 삶으로 기다리는 자들은 그저 자신의 삶에서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게으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양들을 돌보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그 때 생각지도 못한 때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나 또한 양들을 돌보고 있는 자이다. 선교는 이래야 해, 한국 문화는 이런데 여기 문화는 왜 이래? 이건 내 건데…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오직 입으로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되지 말자. 모든 막힌 담을 헐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 함께 삶으로 함께 살아내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가 되고 싶다. 입으로 예수를 기다리지 말고 삶으로 예수를 기다리는 자가 되자. 진정한, 진실한 목자가 되자. 맡겨진 주어진 시간들을 허비하지 말고, 오늘도 정성껏, 최선을 다해… 게으르지 말고, 더욱 더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자. 

  1. 나에게 주어진 공적인, 사적인 시간들을 소중하게 사용하자. 계획 / 실행 프로세스
  2. 입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도록 성경공부와 독서에 더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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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2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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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0:35-43 교제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결과가 불순종이다. 

아합왕은 벤하닷 왕을 놓아주었다. 아합을 이게게 하신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가 원하는데로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아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자신의 마음대로 처리한 왕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오늘의 본문이다. 좀 무리하다 싶은 본문이 등장한다. 선지자가 다른 친구에게 여호와의 말씀이니 자신을 치라 했는데, 치기 싫어하니 그 친구에게 사자가 너를 죽일것이라 하고, 그는 실제로 죽게 된다 (35-36절). 그리고 37절에 또 다른 친구에게 자신을 치라고 하니 그 친구가 선지라를 치되 상하도록 치게 된다 (37절). 

이 말씀은 정말 단순하게 순종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에 치라고 하시면 치라는 것이다. 왕이 범한 죄는 40절에 보면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 그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신다. 치라고 하면 치고,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신 것이다. 스스로를 의지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을 보며 드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일은 물어야 하고 어떤 일은 묻지 않아야 할까? 분명히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고,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도대체 어느 일은 묻고, 어느 일은 묻지 않고 스스로 해도 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답을 제시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스텐리 하우어워스가 정의한 기독교 신앙이란 ‘정답이 없는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이라고 했고, 이 말에 깊은 동의를 한다. 어떤 기준이 있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끊임 없이 묻고 듣고, 순종하는 삶을 그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단순한 순종이 가능하려면 충분한 관계가 먼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충분히 믿고 충분히 주님을 따라가는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 단순한 순종이다. 

아합왕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었다. 그러니 자기 맘대로 결정하게 된다. 물을 이유도, 들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어떠한가? 묻고 들을만큼 충분히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가? 요엘이와의 관계 속에서도 동일한 것들을 느낀다. 나는 요엘이가 나의 말을 들어주길 바라지만, 내가 먼저 요엘이와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가? 요엘이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과도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 그 분과의 교제의 즐거움이 먼저 일어나서 순종은 자연스러운 일들이 되기 원한다. 요엘이와도 지금 훈육이 아니라 교제의 즐거움이 먼저 일어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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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2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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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9:1-21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다. 

엘리야가 도망한 까닭은 혼자라고 느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450 (사실은 1:800)의 맞짱을 뜨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의 그는 혼자라고 느꼈고, 도움이 없다고 느꼈다. 한 번 정도는 맞짱뜨는게 가능하지만 계속은 혼자 못하겠다는 그의 한탄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제의 엘리야와 오늘의 엘리야가 완전히 다른 사람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엘리야에게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신다.

먼저 천사들을 보내주신다. 먹을 것을 주고, 어루만지시며 그를 격려하신다 (6-8절).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강한 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보여주시지만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 바알의 선지자들 위로 임했던 것은 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불로 보여주시지만 그 안에 계시지 아니하셨다. 그리고는 15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라고 말씀하시며 엘리야가 기름부어야 할 왕과 후계자인 엘리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불의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낙심한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불이 아니었다. 바람도, 지진도 아니었다. 다시 말씀을 주시는 것이었다. 말씀으로 우리는 회복할 수 있고, 말씀으로 우리는 낙심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들어야 사는 것이다. 오늘 엘리사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셨다. 사람의 위로가, 어떠한 기적과 이적들이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이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모든 노력들을 기울이지만 말씀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님을 다시 한번 경험한다.

말씀 묵상을 매일 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하다. 조금 더 시간을 아껴서 말씀을 연구하고, 책을 읽고, 말씀을 더 듣자. 그리고 요엘이와도 함께 말씀을 읽자. 말씀이 엘리야를 회복시키신 것 처럼 우리 요엘이를 회복시킬 것이다. 엘리야가 느낀 그 무력감… 부모로써 내가 느끼는 무력감… 말씀 앞에 내어놓는다. 오늘도 더 철저하게 말씀에 붙들리길… 말씀과 함께 걸어가는 하루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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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2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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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8:30-46 물이 아니라 불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진짜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싸여 있다. 그가 가진 마음은 교만함이 아니라 진짜를 소유하는데서 온 평안함이요, 충만함이었다. 진짜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만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었다. 두려울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었다. 왜냐면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만이 진짜시니까..

가뭄이 창궐한 시대에 물 네 통을 제물 위에 부으라고 했다 (33절). 그들의 육체가 얼마나 간절했던 물인가? 영의 갈급함을 모르는 그들을 위해 육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물을 허비했다. 그것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진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불이 아니라 물이었다. 그런데 진짜 불이 임하자 물은 따라오게 된다 (45절). 

나는 진짜 불이신 하나님이 필요한데도 얼마나 많은 순간 물만 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다고 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 내 영혼의 필요와 갈급함보다도 더 많이 더 자주 육신의 필요와 갈급함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데도 얼마나 자주 그 분으로부터 오는 물만을 구하고 있는지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진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여전히 불이 아니라 물만 구하고 있는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진짜를 가진 자의 자부심도 평안함도 없이 가짜를 가진 자와 같이 조마조마해 하며 불안해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말씀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셨고,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기라 하셨다. 진짜 불이신 하나님을 만나며 삶의 두려움을 내려놓기를 원한다. 

요엘이의 상황으로 인해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진짜 하나님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가짜를 소유한 자들과 같이 두려워하고 있다. 조급한 마음 때문이다. 내가 진짜로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불이다. 요엘이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물이 아니라 불이신 하나님이시다. 진짜를 가진 자로써 오늘을 살아가자. 진짜를 가진 자로써 두려워하지 말자. 물이 아니라 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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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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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8:16-29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성경 본문 중 가장 재미있는 본문 중 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응답할 수 없는 바알이라는 가짜 신 앞에서 하루종일 펼쳐지는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실소아니 썩소가 아니 나올 수 없다. 바알은 응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짜가 아닌 가짜 앞에서 하는 행동들은 모두 우리를 웃기는 꼴로 만들게 된다. 아무 응답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몸을 상하게 하고, 피가 흐르게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게 정상이다. 상식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21절에서 나오는 엘리야의 도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에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도 일 대 사백오십이란 숫자의 압박 때문이었을까? 다수결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따라간다고 해서 그 길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머뭇거린다. 여전히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테스트 하고 그 이후에나 믿겠다는(사실 믿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지만..) 태도로 보인다. 나는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 진리인가? 다수인가? 

내가 가장 자주 흔들리는 것은 이 다수들이 보여주는 결과 때문이다. '다들 이렇게 하는데 뭐…’ 무슨 말인가? 다들 이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하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진리를 쫓기 보다는 다수결, 혹은 다자가 쫓아가는 길이 옳아 보이고, 괜찮아 보이는 타협의 접점을 찾고 있는 것이 나의 신앙이다. 이러한 나의 모습들이 바알 앞에서 하루종일 응답을 구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그들의 신을 부르는 바알의 선지자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머뭇머뭇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쫓아야 한다. 사람들의 평판이나 다른 사람들이 쫓고 있는 가치들이 아니라 하나님만 쫓아야 한다. 일 대 사백오십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주를 부인한다고 해도 나는 주님을 쫓아야 하는 것이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의 문제이다. 가짜 앞에서 쇼를 하며 살 것인가? 진짜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살 것인가? 

태국 땅에는 이 가짜 앞에서 쇼를 하는 사람들이 무려 99.5%가 넘는다. 1%가 기독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인구 센서스 상에는 0.5% 정도이고 이 안에는 카톨릭과 기독교 이단들도 포함이다. 이 곳에서 내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진짜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줘서 거의 1:100의 싸움을 해야 하는 곳이다. 1:100이면 어떤가? 진짜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데, 내가 하는 것은 쇼가 아니라 예배인데 무엇인 두려운가? 지금 주태한인선교사 수련회 기간이다. 이 99.5%의 영혼들을 위해 함께 땀흘리고 수고하시는 분들과 함께 모임을 하고 있다. 더 깊은 교제와 동역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태국 땅에 어떻게 전할지를 더 고민하고 묵상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복음에 합당한 훈육을 하기 원한다. 아이들이 예민해지면 예민해질수록 나도 덩달아 예민해진다. 복음적인 가치관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혜를 주면 안된다는 마음,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라는 과시하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더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더 예민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아빠의 가짜의 마음은 아이들을 더 힘들게 더 멍들게 한다. 계속해서 머뭇머뭇 하지 말고, 진짜 하나님 앞으로만,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길은 복음으로만 내 삶이 더욱 더 변화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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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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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라이로 결혼식을 금요일, 토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고, 운전을 왕복 약 20시간 정도하며 다녀왔습니다. 말씀묵상을 여행의 일정 속에서 쉬었습니다. 이게 한 번 쉬니까 계속 쉬게 되는 관성의 법칙으로 어제도 역시 쉬었습니다. 오늘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앉았습니다. 좋은 습관을 세우는건 어렵지만 그것을 허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음에 참 감사합니다. 샬롬 


왕상 17:8-24 절망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서 찾아오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과부를 보고 있으면 꼭 나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12절)) 이제 이걸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고 엘리야에게 말했다. 정말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보인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나올 곳도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아를 만나서 자신의 모든 것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대접하라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고, 결국 통의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맛 보았다 (16절). 그런데 아들이 병들어 갑자기 죽게 되었다 (17절). 그러자 엘리야를 원망하기 시작한다. 엘리야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또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었지 않은가? 죽을걸 살려줬는데, 굶어 죽은게 아니라 병들어 죽었으니 그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되는가?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 하나님이 늘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들을 주시지 않으면 그게 원망이 되고 상한 마음이 되더라. 그런 원망 가운데 엘리야가 기도를 통해 아이를 살린다. 과부의 고백이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에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몰랐단 말인가? 보고도 몰랐고, 먹어도 몰랐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몰랐다. 

한 번 말씀 따라 크게 순종도 해봤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이적도 맛보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말씀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만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시점, 내가 원하는 방법이 머리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엘리야에게 순종할 때에는 이미 하나님이 그 순종의 댓가로 어떤 것을 주실지 미리 말씀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망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들의 죽음은 아무런 약속도 기약도 없는 자신의 힘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삶도 그렇다. 매일 만나를 먹고 있고, 매달 은혜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지금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여전히 원망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있다. 

나의 무력함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여전히 내게 힘이 남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방법들이 있고,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을 때 만난 하나님은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마지막 까지 가서야 이제야..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자꾸만 그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유혹이 결국 관계를 그르친다. 

요즈음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과 소망의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있다. 아빠가 선교사로 나오는 바람에 더 예민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둘째 요엘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기대가 여전히 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가 좀 더 양보하면, 내가 좀 더 사랑해주면, 내가 좀 더, 좀 더, 좀 더.. 내가. 내가. 내가… 이렇게 하면 아이가 이렇게 좋아질 거라는 그 마음 속에서 서 있기 때문이다. 예준이의 힘든 시간에 붙잡아 주신 것처럼 요엘이도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으며 보고 있는데, 자꾸만 내가 기간을 정한다. 시간을 정하고, 상황을 정해서 이정도면 달라져야지… 이정도면 좋아져야지.. 이정도면 바뀌겠지? 사르밧의 과부처럼 여전히 나의 옵션과 나의 생각을 의지하고 있다. 내가 정한 시간 안에서 조금 좋은 것 같으면 기분이 좋다가도 그렇지 않으면 못 견디고 화가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아빠로써의 자격 미달이고, 사랑을 주는 자로써의 자격 미달이다. 아내는 좀 더 긴 시간을 바라보고 아이를 대하는데, 나는 너무나도 나 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행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 과부를 보니 꼭 나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사랑의 물탱크에 물이 차서 넘칠 때 까지 충분히 부어 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 내가 정한 시간, 내가 정한 한계로 아이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충분히 기다려주고, 충분히 참아주고, 충분히 사랑해주는 아빠가 되기 원한다. 이미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맛보기 때문에 기다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조급함을 쫓아 움직이지 않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절망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서만 찾아오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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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