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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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8:1-17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 대상이 곧 나를 규정한다.

아간이 취한 것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 은 이백 세겔 (약 2.3kg), 금 오십 세겔 (약 570g) 이었다. 아마도 첫 번째 여리고 성 전투를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미리 기대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저렇게 난공불략의 여리고 성도 이렇게 쉽게(?) 무너뜨렸는데 이제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나면 그 땅에서 정착해서 부를 쌓고, 멋진 옷을 입고 살고 싶은 욕구를 그는 미리 취했다. 아간이 취한 것들은 당장 지금 전쟁중에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을 앞서 나갔다. 가나안 정착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았겼고, 그래서 오늘 당장 직면해야 할 전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의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만 따라가며, 그 분께 시선을 고정해야 승리하는 전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 때, 언약궤가 앞서 가고, 언약궤만 보며 따라갔다. 하나님의 임재로 대표되는 언약궤로  온전하게 시선을 고정해야 열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고, 여리고를 제대로 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승리 했다. 하지만 승리로 인한 자만심은 현재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고, 또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시선을 놓치게 되고, 그 결국은 하나님 대신 가나안 백성들을 쳐다보게 되니 탐심이 생긴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이다. 하나님인가? 세상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인가? 혹은 애굽인가?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눈이 부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며 이 땅의 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놓는 것이다. 
내가 아간과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자가 되기 원한다. 이 땅의 화려함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런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인생이 되기 원한다. 가진 것으로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자가 되지 않고, 나의 존재로 내가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머문 그 대상으로 내가 규정되기 원한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One thing have I asked of the Lord,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enquire in his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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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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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7:1-15 홀로 산으로 떠나야 한다. 

여리고성의 대 승리 뒤에 교만은 찾아왔다. 여호수아는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고, 너무 강하고 담대하여져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병력을 아이성으로 보내게 된다 (2-4절).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받쳐진 물건들을 취하였다 (1절).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승리를 얻었었지만, 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개인의 교만과 탐심으로 무너지게 된다.  

승리 뒤에 찾아오는 (스스로에게서 나오든, 타인에게서 오든) 인정감은 우리를 흔드는 가장 큰 유혹인 것 같다. 여호수아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자신들의 힘으로 아이성을 점령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백성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결과는 대 패배였다.

큰 성공 뒤에 언제나 더 스스로를 살피고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그 분의 은혜를 더 구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고 함을 보셨다. 오병이어 사건.. 정말 엄청난 기적과 역사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이 분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5

홀로 산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하나님의 인정 밖에는 없는, 아무도 인정해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 가셨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 승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머물면서 자신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그렇기에 아무도 없는,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실 수 있는 산으로 가신 것이다. 

어제 밤에 아내와 몇 가지 일들을 나누면서 서로 감사의 고백들을 나누었다. 우리 태국의 형제들과의 있었던 지난 몇 가지 일들로 인해 감사했고, 또한 요엘이가 아주 조금이지만 덜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 작은 승리, 작은 은혜에 도취되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혼자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나가라는 것이다.  

사람의 시선, 사람들의 인정에서 자유롭지만, 오직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인정이 있는 그 곳, 그 산에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통해 교만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나는 인정의 욕구가 유독 강한 사람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정을 구하고 싶다. 

요즈음 늘 고백하는 말이지만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는 삶이 되기 원한다. 
오늘은 좀 더 예수님이 홀로 가신 그 산, 하나님이 계셨던 그 산에 더 거하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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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9. 1. 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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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6:8-27 공동체라 함께 무너뜨리는 난공불략의 성

여리고가 무너졌다. 어려서부터 너무나도 많이 들은 이야기이다. 여리고는 소리로 무너졌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하나님께서 칠일 째 소리를 지르는 그 시점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에 소리를 질러 성벽을 무너뜨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두 사람도 아니었고, 아주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저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왜 어디든 항상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약간 삐딱한… (내가 그럴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누구도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하는 중이다. 그들은 한 하나님을 경험했고, 한 하나님을 만났고, 한 공동체가 된 것이다. 

그들이 참아냈던 그 시간이… 성을 무너뜨렸고, 그들은 이제 여리고 안으로 진격한다. 난공불략의 성으로 보였고, 정말로 이스라엘이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마음의 순종으로 무너졌다. 결국은 공동체가 함께 일어설 때 난공불략의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여호수아 때문도 아니고 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종을 통해 일어났다. 

손 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 이것이 동역자이고, 이것이 동역이고, 이 것이 한 공동체, 한 몸이다. 굳이 태국선교라는 거창한 주제를 이야기 하지 않아도, 함께 손 붙들고 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협력하고 각 기능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함께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는 영광교회 형제, 자매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우리 가정과 태국의 사역을 위해서 함께 묵상을 나누고, 계속해서 기도를 해주시고, 교제해주시는 분들이 계서서 너무 감사하다. 함께 손잡고 걸어갈 때, 난공불략, 여리고 성 처럼 보이는 태국선교와 주님의 나라의 확장이 이뤄지길 원한다. 

우리 가정에게 그렇게 공동체가 되어 주셔서 손 잡아 주신 것 처럼 우리도 태국 형제, 자매들에게 함께 손 잡고 걸어갈 수 있기를 원한다. 빨리 가지 못해도, 함께 가기 원한다. 

*저희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여러분들 가정에 공동체가 되고 싶습니다. 기도제목이 있으시면 나눠주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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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5:13-6:7 공동체가 함께 강강수월래 하는 기쁨을 맛보기 원합니다.

1절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로 시작한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음도 녹고 정신도 잃었는데 제정신이라면 문 열어놓고 오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 단단한 성벽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야기 하신 방법은 정말로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잘아는 것처럼 여호수아 혼자서도 아니고 모든 백성들이 여리고 성 주위로 강강수월래 하라는 것이었다.

  1.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할례를 통해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었고, 조금 전에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도 만났다. 그래서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당황스러운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 사람과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들의 모든 공동체가 함께 이 당황스러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였다. 모두가 갈라진 요단을 건너며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는가?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한번에 순종할 수 있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함께 이 하나님의 (당황스러운 말씀에 순종하는) 기적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공동체가 하나님을 함께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 공동체에게, 그리고 우리 영광교회 공동체에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올해부터 영광교회에서 함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준비해서 말씀 속에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 형제, 자매들을 만나주시기를 원한다. 한 주에 두 번 드리는 가정예배에도 대충 준비하지 말고, 아이들의 눈높이와 수준에 맞게 준비해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겠다.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것… 
정말로 그렇게 되고 싶다. 설령 우리에게 하나님의 당황스러운 말씀이 임하더라도 함께 강강수월래를 하며 성을 돌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 (마 22:40)
그런 오늘을 살아내고 싶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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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5:1-12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채우는 시간

오늘 본문은 요단과 가나안 왕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1-3절). 요단강 물을 기적적으로 가르고 건넜으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 나의 눈으로 볼 때 이 타이밍에 해야 할 것은 뭐? 공격이다. 마음이 녹았을 때, 그들이 우리를 무서워 할 때 가서 싸워서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할례였고, 율법의 준수였다. 인간의 눈에 보이기에는 지금이 기회 같고, 지금이 달려야 할 때 같고, 지금이 적기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준수였고, 가장 무력하고, 무능한 자리로 내려가는 것 이었다.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최소 일주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가는 것이다. 지금 당장 그들은 우리를 보고 겁을 먹었는데, 달려가서 싸워야 되는 이 타이밍에 하나님은 무력함을 요구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우리의 무력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함이 발휘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뭔가 이루어지는 것 같은 주변 환경도, 떠들석한 상황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채우는 그러한 시간에서 나오는 것이다. 골방이 열방을 움직인다는 그런 의미와 동일하다.

물론 지금 내 상황이 뭔가 이뤄지는 것 같은 주변환경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하나님과의 골방에서의 관계가,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내 삶에 채우는 이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서는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된다. 모든 것이 내가 한 것 같고, 모든 것이 나의 힘과 지혜로 한 것 같이 느끼게 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자.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자. 밖에서의 드러나는 시간 말고, 안에서 친밀함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자.

그 무력함과 순종, 친밀함의 시간들을 보낸 자들이 얻는 것은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게 되는 것이었다 (12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충분히 무력함 안에(그 분의 전능하심 안에) 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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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4:15-24 하나님의 손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께서 요단을 갈라지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가 뭐였을까? 오늘 본문에서는 24절에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려고
  2.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고

기적을 보며 기적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며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려 하셨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우리가 더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더 경외함’이다. 

은혜가 임했는데,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은혜 자체를 바라보거나, 나를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서 어떠한 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며 내가 한 것 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가짜다. 나에게서 선한 것이 절대로 나올 수 없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모든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한 곳은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시다. 다른 곳을 바라보거나 다른 것들을 기대하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 한 분인가? 아니면 하나님 쪽으로 보며 다른 곳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가? 손만 구하고 얼굴을 구하지 않는 우를 얼마나 많이 범하는가? 망하지 말자. 삶에서, 사역에서, 자녀양육에서, 언어공부에서 하나님의 손만 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이 모든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어야지 하나님의 손만 구해서 돌만 세워놓고 사라지는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을 하면서, 요엘이를 양육하면서, 우리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손만(도우심) 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진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어서… 기적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일이 되도록 내 마음을 다잡자. 

하나님이 전부, 하나님이 진짜가 되는 삶 살아내기 원한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연약하다. 더욱 더 예수를 의지하는, 더욱 더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소서. 기적을 맛보지 않아도 일상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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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15-24 붉은 줄은 값싼 은혜가 아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라합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돌아간다. 그리고 붉은 줄을 메어서 그 가정을 안전하게 보호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붉은 줄이라는 메타포는 쉽게 유월절에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를 떠올리게 한다. 유월절에는 피를 바르면 살았고, 이 날에는 붉은 줄을 두르면 살았다. 라합의 가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다. 붉은 줄을 걸었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도왔더라도 붉은 줄을 두르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항상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로 믿는 것 처럼 그저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붉은 줄을 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그렇게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구원을 쉽게 여기면 안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절대 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다. 내가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뼛속깊이 이해해야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을 쉬운 것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없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본 회퍼의 ‘값싼 은혜 cheap grace’에 대해서 접하였다. 라합의 구원은 단순히 문설주에 붉은 줄을 매단 것이 다가 아니다. 그 이전에 정탐꾼 두명의 생명, 그리고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넘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였다. 그런데 이 것을 우리가 쉽게 붉은 줄로만 치환해서 생각하면 매우 쉽고, 값싼 은혜를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치루신 댓가를 생각해보자.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었다. 

도저히 내가 낼 수 없는 값을 치뤄주신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도 나는 붉은 줄 둘렀으니... 피를 발랐으니… 정도로 가볍게,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주님이 하신 모든 구원을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오늘도 주님의 뒤를 쫓는 제자가 되고 싶다. Cheap grace가 아니라 Costly grace 를 받은 자로써 오늘도 살아가기 원한다. 단순한 붉은 줄을 메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쫓아가는 삶이 되기 원한다. 

요엘이를 양육할 때, 아내와 관계할 때, 우리 형제들과 영어를 가르칠 때, 삶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나눌 때, 결코 값싼 은혜로 대하지 않기를 원한다. 온 천하 보다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한 사랑과 값비싼 은혜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복음으로 대하기 원하며, 오늘 그런 하루가 되기 원한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은혜이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용서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고, 교회의 훈련이 없는 세례이고, 고백이 없는 성찬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가 없는 은혜이고,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삶 그리고 성화가 없는 은혜이다. 

“Cheap grace is the grace we bestow on ourselves.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without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living and incarnate.” Dietrich Bonhoe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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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1-1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신뢰하기

본문의 시작은 여호수아가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국어 성경에는 secretly 란 단어가 없지만 ESV 영어 성경에는 sent two men secretly 로 표현되어 있다. 

아주 비밀스럽게 정탐꾼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비밀스럽게 보냈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그들은 금방 걸린다. 조심했을텐데 왜 걸렸을까? 그들이 실수한 것일까? 아니라면 왜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허락하셨는가? 하나님이 보호하셨음 안 걸렸을텐데… 

본문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들이 걸린 이유는 단 한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아합이라는 한 여자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어쩌면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필연일테지만) 그들은 아합의 집으로 들어가 숨었고, 그들은 아합과 가족을 살려주기로 약속을 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을 통해서도 언제나 이루어진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연약한 일들, 속상한 일들, 화가 나는 일들,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어떠한 상황과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선한 일들을 이뤄가실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는 것이다. 

분이 날 때 분을 내지 않고, 억울 할 때 이겨낼 수 있고, 속이 상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한다.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내 삶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일하기를 원하시는가? 여전히 죽지 않은 내 자아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내 삶의 모든 상황과 연약함을 통해서도 그 분께서 그 분의 선한 일들일 이뤄갈 것임을…

새해의 셋째 날이다. 벌써 다양한 일들이 생기고, 힘든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여전히 신뢰하기 원한다. 여전히 내 삶에 일어나는 그 분의 손길을 신뢰하기 원한다.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는 그 분의 손을 신뢰하기 원한다. 내가 계획한대로,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그 뒤에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만 붙들기 원한다. 분내지 말고, 성내지 말고, 잠잠하게 신뢰하자. 하나님이 라합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 정찰대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사용하신 것과 나를 그 분의 뜻과 그 분의 은혜로 이끄실 것이다. ‘신뢰’하며 나아가는 하루, 2019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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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10-18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한 말은 우리가 요단을 건널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것이다 (11절). 그리고 그가 한 말은 13절에서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라는 것이다. 1차적으로 모세가 한 말을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모세가 했던 그 말은 바로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달한 것 뿐이었다. 결국 여호수아가 한 말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었다. 

보이지 않는 약속이 우리 눈에 보이도록 활자화 된 것이 성경이다. 결국 약속을 기억하려면 이 말씀을 부지런히 가까이하고, 묵상해야 한다. 바로 어제 본문에 나온 것 처럼 말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1:8)’ 결국 말씀을 읽고 묵상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실지 어떠한 약속을 행하실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잘 알지 못했고, 여호수아는 이를 기억하라고 말한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자. 그래야 우리 삶에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자.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늘 일하시고, 역사하셨다. 오늘은 어제와 단절된 새로운 하루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일하고 계신다. 기억하고, 기대하자. 

2018년에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2019년에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자. 그리고 기억하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함을 잊지 말자. 말씀 붙든 자가 기억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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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1-9 말씀을 쫓아 천천히 가더라도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한 해 

새해 첫 시작의 말씀이 여호수아 1장이다. 여호수아 1장을 읽으며 여호수아서의 주인공이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계속해서 ‘내가’라는 말이 반복되며, 하나님 본인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3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 번째 약속은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3-4절). 땅이 없이 머물 곳이 없이 돌아다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음이 있었을까? 두 번째 약속은 형통할 것이다 라는 약속이다 (7-8절). 번영하고, 번성하겠다는 약속이다. 세 번째 약속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9절).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또한 세 가지가 있다. 
  1. 강하고 담대하라 (6절)
  2.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7절)
  3. 주야로 묵상하라 (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국 어떠한 계명을 지키라 말라의 문제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는 요구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분을 더 알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내 구원에 혹은 내 삶에 문제가 생길까봐 지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2019년을 시작하며 이 말씀이 요구하시는 그 한 가지 (세 가지이지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어 나가기 원한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예수님이 두 가지로 요약하셨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두 번째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요구하시는 것들에 내가 반응하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 입으로만 사랑하지 않고, 삶으로, 마음으로,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원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임마누엘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은혜가 내 안에 가장 충만하기 원한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말씀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누리는 한 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판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한 해,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쫓아 천천히 가더라도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

그 길 가운에 여러분들이 함께 걸어가주심이 감사하고, 저도 선교사로써 부끄럽지 않게 매일을 살아가겠습니다. 
2019년도 주를 향해 함께 동행하는 걸음이 되고 싶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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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