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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2. 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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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1:14-25 내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솔로몬에게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먼저 이야기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았다. 이방여자들을 보낸다던가, 산당을 허문다던가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죄를 쌓아가고 있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순간에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임을 몰랐을리 없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죄를 계속해서 쌓아가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는 오늘 본문에서 대적들이 일어난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고 (14절), 23절에는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열방에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 친히 선택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의 회개하지 않는 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는 대적들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평안과 평화는 우리가 가진 힘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지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부유하였지만 그의 평화는 그리 오래갈 수 없는 평화였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 관계의 깨어짐은 단순한 하나님과의 평화와 평안만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게 된다. 사방에서 대적들이 일어나고, 그의 나라는 이제 위태롭게 된다. 

결국 여호와께 돌아가야만 한다.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매우 많은 순간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가 보이기 보다는 대적들이 먼저 보인다. 대적들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결국 대적들과의 관계도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이다. 솔로몬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가 걸어갔던 길을 걸었어야만 했다. 

사역이든, 일이든, 가정이든, 관계이든 어느 곳에나 대적들은 있다. 그 대적들은 늘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대적들을 바라보느라 하나님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원한다.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그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이키자. 대적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이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놓치게 되면 대적들만 보이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대적들로 인해 그 시선을 다시 하나님으로 돌이키는게 쉽지 않아진다. 내 시선을 하나님 앞으로 고정시키고, 이 모든 일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자. 

내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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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3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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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1:1-13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다윗은 정말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이후 모든 왕들에게 기준이 된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솔로몬이 여인들로 인해 여호와를 떠나게 되었다. 열왕기상의 저자는 이것은 4절에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12절, 13절에서는 다윗으로 인해 나라를 솔로몬에게서 빼앗아서 신하에게 주는 일을 솔로몬의 세대에는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다 빼앗지 아니하고 다윗과 택한 한 지파에게 일부를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이토록 그를 사랑하시는가? 솔로몬의 시대임에도 그의 신앙적인 영향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러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여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다윗의 씨를 통해 약속된 메시아를 오게 하시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에 솔로몬처럼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멀리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교묘한 방법으로 멀리하도록 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사역이며, 때로는 인터넷이며, 때로는 운동이며, 때로는 아이들일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러한 연약함들을 넘어 일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 

결국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내가 의지해야 할 것은 나의 지혜도, 나의 재물도, 나의 능력도, 은사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에서 온 여인들과 그들의 신을 의지하게 된다. 내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내 힘을 의지하려고 한다. 나를 의지하려는 마음은 우리를 결국 다윗의 길이 아니라 솔로몬의 길로 이끌어가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가면서 나의 가진 어떠한 것들을 의지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기 원한다. 내 연약함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교만하지만 또 얼마나 한없이 연약한게 나인가? 다시한번 다윗의 길을 걸어가길 다짐해본다. 나의 절망을 경험하며 하나님만 더 의지하기 원한다.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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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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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0:14-29 묻고 있는가? 듣고 있는가?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솔로몬의 세입금이 금 육백육십육달란트라고 한다 (14절). 금 25톤 정도로 대략 1조원이 넘는 규모라고 한다. 너무 어마어마해서 사실 말이 안 나온다. 그 금으로 무엇을 했는가? 방패 만들었다 (16-17절). 금그릇을 만들었다 (21절). 그리고 그 재정으로 큰 군대를 만들었다 (26-29절). 하나님으로 부터 온 큰 지혜를 갖춘 그는 (23절) 더 이상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열왕기상을 묵상해오면서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물었던 것으로 기록된 것은 바로 그가 지혜를 하나님으로 부터 받을 때로 기억된다.

그의 아버지 다윗과는 매우 다른 행보였다. 그에게 뛰어난 지혜가 있어서였을까? 그의 지혜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었다. 차라리 지혜가 없었다면… 차라리 그가 정말 구했던 것처럼 듣는 마음이 늘 있었다면… 듣는 마음이 있었으면 물었을텐데… 이제는 그는 그의 지혜를 의지하고, 그가 보기에 좋은데로, 그가 원하는데로 행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옳은 선택이었다. 가장 뛰어난 지혜로 결정한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그와 하나님을 멀어지게 하였다. 

더 이상 하나님께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 하는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이 가진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것이 그렇게 작용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든 갖지 못한 것이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결코 붙잡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더 많이 가져야만, 혹은 더 많이 버려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묻는 은혜가 있어야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듣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물을 때, 들을 때, 우리가 가진 은사들, 혹은 우리가 아직 갖지 못한 것들일지라도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묻고 있는가? 듣고 있는가?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묻고, 듣고 있지 않으면 결국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듣지 있지 않으면 지금 내가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묻는 은혜, 듣는 은혜가 있는 하루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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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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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0:1-14 높아지여야 하고, 드러나셔야 하는 하나님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다. 그가 들은 것은 솔로몬의 명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 그리고 솔로몬과의 모든 대화를 마치고 그녀는 솔로몬을 칭송하고 높인 것이 아니라 (살짝 칭찬하기는 했지만..) 9절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있는 은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 부터 칭찬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은사들이 발휘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높아 지셔야 한다. 

내게 있는 것들이 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높일 수 있다. 내 것이 아닌데 어찌 나를 높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것이 주로 왔고, 주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은사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호흡, 우리의 생명 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이 하루를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이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사실은 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주어진 귀한 하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지금 벌써 아이들 비자 때문에 이민국에 와 있다. 태국에 와서 가장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처럼 느껴지는 날이다. 새벽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고, 계속해서 앉아서 기다리다가 우리 차례가 되면 일을 처리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마도 빨라야 오후 늦게?, 혹은 저녁이 되야 마칠 수도 있는 날이다. 이러한 날에 오늘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위해 내가 어떠한 것들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로 인해 하나님이 높아지실 수 있는 것일까? 효율성이라는 것이 늘 내 삶에 중요한 가치가 되어 있어서 이러한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늘 힘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아이들과 좀 더 많이 이야기 하고, 아이들과 좀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하루에 긴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원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높아 지셔야 함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셔야 함을 더 깊이 묵상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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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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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9:10-28 내 삶을 움직이는 동기, ‘사랑'

오늘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유리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고 있다. 성도 짓고, 역군도 일으키고, 바로의 딸과도 결혼하고…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는 25절에서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행하면서 예배도 드린다.

오늘 솔로몬의 정치적 행적들의 근본 원인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염려’였다. 성을 쌓는 이유는 항상 염려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 것이다. 정략결혼이 왜 존재하는가? 바로의 딸과 왜 결혼하는가? 애굽이란 강대국이 자신을 침범해서 자신의 왕의 자리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염려는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리고,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한다.

그가 예배한 이유도 아마도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예배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예배의 자리로 꼬박 꼬박 나오게 하였다. 그의 예배의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두려움을 예배하며 두려움이 자신에게 겁 주는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행하게 되었다. 

오늘 나를 움직이는 동기가 무엇인가? ‘사랑’인가? ‘두려움’인가? 요즈음 요엘이 때문에 여러가지 고민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요엘이를 ‘사랑’때문에 요엘이를 위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요엘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인가? 오늘 랑캄행 대학교 영어 시험반 대비 클래스를 시작하였는데, 그 동기가 ‘사랑’때문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사랑’때문인가? 아니면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 당연함’때문인가? 내 삶에도 ‘두려움, 염려’가 이유가 되어 움직여지는 일들이 분명히 많아 보인다. 하지만 내 삶이 솔로몬과 같아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삶을 반면교사를 삼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모든 이유가 되기 원한다. 두려움을 쫓아가지 말자. 하나님을 쫓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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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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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9:1-9 하나님의 신실하심(거룩하심) 안으로 더 깊이, 더 깊이

솔로몬이 왕국 건축을 마치고 기도한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1절 후반부에는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 솔로몬의 야망이었을수도, 혹은 솔로몬의 욕망이었을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넘어 그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 그리고 이 성전을 그들의 소원대로 거룩하게 구별하시며,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을 항상 거기에 두시겠다고 하셨다 (3절).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우리의 야망과 욕망에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분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뜻이 멈춰서는 것은 아니다. 죄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내가 어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에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연약하다고, 내가 욕망한다고 두려워 말자. 물론 욕망과 두려움을 합리화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땅에서 섬기며 살아갈 때 계속해서 의지해야 하는 것은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함, 곧 그 분의 신실하심이다. 

신실하신 그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진 것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순종에 있었다. 순종의 내용은 한결같다. 4절에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이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레를 지키면’ 한 마디로 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라는 것이다. 율법이란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거룩하고, 혹시 우리의 거룩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정결하게 하는지를 기록한 책이 아닌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보여주신 책이 바로 이 율법책들(모세오경)이 아닌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이고, 우리와의 동행이다. 즉 순종이라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정도의 친밀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들인가? 아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어 주셨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예전 어느 책에서 봤는데(제목은 기억이…), 유대인의 율법에서 정결은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을 접촉하게 되면 부정해진다. 그런데 이 모든 율법을 바꾸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들을 만지심으로 치료하고, 낫게 하시고, 회복하시고, 온전하게 하셨다. 즉, 유일하게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과 접촉하였을때, 함께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께 붙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예수님께 닿아햐 하는 것이다. 

오늘도 그 예수님께 더 깊이 나아간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 분이 신실한 약속을 의지하여…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그 분께서 '내게로 오라 (마 11:28)’라고 이야기 하신다. 그 약속을 의지하여 그 분 앞으로 더 깊이 나아가고 싶다. 오직 나를 정결케 하실 수 있는 그 분께 더 깊이 나아가고 싶다. 묵상이 묵상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가 기도로 끝나지 않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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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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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44-53 절망의 존재들임을 인식하는 것

오늘 솔로몬의 고백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비슷하다. 46절에서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로 시작한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럴때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 기도한다면 (47절)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께서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백성,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53절). 사도바울은 어떻게 고백했는가? 로마서 3:23 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인식은 똑같다. 우리는 연약하고, 우리는 죄인이고, 죄를 이겨낼 수 없는 존재들이란 것이다. 다만 그럴 때에 솔로몬의 고백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스스로’ 깨우쳐서 기도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 생각하고, 사도바울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직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솔로몬의 관점과 그리스도를 본 바울의 관점의 차이이고, 이것은 매우 큰 차이점이다.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주의 소유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죄인에서 주의 소유가 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구약에서는 희생제사였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필요로 한 것이다. 

솔로몬도, 바울도 ‘내가 할 수 없는 절망의 존재’라는 것에 인식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절망의 존재들’에게만 희망이 필요하고, ‘절망의 존재들’에게는 기도가 필요하고, ‘절망의 존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자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신 산상수훈이 그런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삶에서 내가 할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다. 어느 순간은 어 괜찮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찰나일 뿐, 더 많은 순간은 내가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가득하다. 그 순간 순간 그 절망 속에서 오직 예수로만 새 힘을 얻기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이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나를 주의 백성, 주의 소유 삼아주신 그 은혜를 내 삶에서 드러내기 원한다. 아이들에게 형제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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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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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33-43 하나님을 램프의 지니로 만들지 말라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기도를 다 마친다음(33-40절) 솔로몬은 이제 다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한다 (41-43절). 어제 말했던 타자의 하나님을 부른 것일까? 어떤 마음이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솔로몬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적극적인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혹시 소문을 듣고 온다면…(43절)의 전제가 있다. 선교학에서는 이것을 가는 선교, 오는 선교로 구본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방인에 대한 배려도 있다고 하니 그것만 해도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과 다니엘의 차이점이 보이는 구절이 있었다. 40절은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의 모든 기도를 올려드리고, ‘그리하시면’ 주를 경외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어떻게 기도했는가? 단 3:18 ‘그렇게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에게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그들의 상황과 관계 없는 믿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하시면’의 솔로몬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다니엘이 계속 비교된다.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솔로몬처럼 이것 저것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리하시면’ 주님을 잘 섬기겠다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다니엘과 같이 내 삶에 어려움이 있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 섬기겟다고 기도하는가? 나의 기도는 솔로몬과 같을 때가 너무도 많다. 타자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나의 하나님께 나를 위한 램프의 지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솔로몬과 같이 직설적으로 나를 위해 램프의 지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지만 조금 더 고상한 방법으로 하지만 내용은 같은 기도를 올려 드리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위한 나만의 램프의 지니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나를 하나님께 맞추자. 하나님께 내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을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작은 신으로 만들지 말고, 우주보다 더 크신 그 분의 자리에 계시도록 하자. 결국은 마음의 주인 문제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왕이신가? 아니면 내가 왕인가? 내가 램프를 지닌 알라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은 기도의 모습을 좀 바꿔보기 원한다. ‘~해주세요’의 기도 보다는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 정말로 묻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조금 더 나를 비워내고 조금 더 주님으로 채워내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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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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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22-32 그들의 하나님(타자의 하나님)을 만나자.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며 하나님께 기도 드린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켜달라는 것과
  2. 자신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달라는 것
  3. 그리고 악은 심판하시고,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갚아 달라는 것이었다.

근데 이 세 문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우리(이스라엘) 좀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요약이 된다고 본다. 내 후손들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백성들이 기도할 때 들어주시고, 혹시 잘하는 것 있으면 갚아주세요 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전히 하늘도 용납하지 못하는 하나님을(27절)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으로 생각하고 제한해서 생각하고 있다. 솔로몬에게 그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많은 순간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그들의 하나님으로 보기 보다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켜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는 ‘우리’라는 단어는 좀 특별하다. 그래서 영어를 쓸 때도 가끔 틀리지 않는가? 나와 우리의 개념의 차이 때문에…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나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나만의 하나님 혹은 우리만의 하나님일 때가 매우 자주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으로, 또 그들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나만의 하나님으로만 보기 때문에 타인들의 아픔과 슬픔에 무관심하게 되고, 내가 얻을 것만을 간구한다. 내가 더 먹으면 다른 사람들은 못 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만을 구했다. 함께 이 길을 걷기 보다는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로 살아가려고 할 때도 많다. 내가 가장 우선이 되고, 내 가족이 가장 우선이 된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면 ‘나의 하나님’께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아뢴다. 진정한 ‘우리의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이 내 삶에서 실종된 것은 아닌지? 오늘 솔로몬의 기도를 보며 회개하게 된다. 

예수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는데, 나는 나의 나라와 나의 의만 구하는 것 같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언제쯤 ‘나 좀 잘 되게 해주세요’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공동체와 우리를 볼 수 있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언제쯤 ‘우리’의 개념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넓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품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넓혀 주셨다. 내 삶에서도 우리 가족들, 우리 형제들, 우리 교회, 우리… 가 아니라 그 지경이 선한 사마라이인까지 넓혀지기 원한다. 오늘은 묵상하는데 참으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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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