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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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12-21 내 몸이 성전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그는 오늘 본문에서 여러번 이야기 한다. 13절에서는 ‘주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했다 말하고, 20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했다 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우주보다 더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작고 작은 성전에 가두려고 하고 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그 위에 임재하신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제한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 위에 역사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어제 페이스북에 열왕기상을 묵상하면서 솔로몬 안티가 되어 간다고 올렸었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댓글에다가 '솔로몬과 우리가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라고 달아주셨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나 또한 하나님을 제한하고, 내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작게 보며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를 어떻게 구언해 주시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케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솔로몬에게도 나에게도 우리는 모두 복음이 필요하다. 솔로몬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작게 보고, 제한하고, 그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내 작고 작은 어느 지점에서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기도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가? 

사도바울은 고전 3:16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정말 우주에서 먼지도 안되는 우리 같은 작은 존재들 안에 그 크신 하나님께서 오셔서 거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고, 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신다. 복음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이시지만, 그렇다고 나만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을 전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이 기쁜 소식을 말이다. 내 몸이 성전이다. 
온 천하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께서 이 몸에 거하시니, 이 몸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오늘도 그 분의 사랑과 복음을 기억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애써야겠다. 하지만 이 애씀조차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주님이 거하시도록 내 몸을 내어 드리는 것,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다. 분을 죽이고, 혈기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 웃는 얼굴과 용서받은 자 로써 용서하자. 내 몸이 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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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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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1-11 말씀대로, 말씀 외에 아무것도 없는 삶으로의 초대

성전 완성 이후 언약궤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1-5절). 언약궤 이동에 있어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메다’ 이다. 1절, 2절, 4절 계속해서 연약궤를 메고 올라감을 보여 준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솔로몬은 다윗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신대로 행했다. 말씀대로 순종했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소중하게 옮겼을까? 9절에서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돌판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온 말씀이 적힌 판이다. 즉 그렇게 귀중하게 옮긴 그 안에 실제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9절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렇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삶에도 그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우리의 믿음의 실제이다. 

그리고 10-11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기뻐하셔서 그 안에 가득하게 임재하신다고만 생각했다. 타이망상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열왕기상 말씀을 보며 느끼는 것은 성전건축이 완성되어서 하나님이 기쁘셔서 그 안에 영광으로 임재하신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궤를 메어 옮기고 (1-5절), 그 궤 안에 말씀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데 언약궤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임재하여 주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즉 말씀대로 순종함과 앞으로도 그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 것을 다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보여주신다. 성전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것에 우리의 전 존재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율법적인 순종함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에서 우러러 나오는 순종을 기뻐하신다. 

나도 오늘 내 삶에 그러한 순종이 먼저 있기 원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먼저 사랑함으로 순종하기 원한다. 궤를 어깨에 매든 손으로 들든 무슨상관인가? 라는 내 이해의 방식의 순종이 아니라 그것이 내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혹은 비상식적으로 생각되더라도 그것에 기쁨으로 순종하기 원한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해를 넘어서야 한다. 이해가 먼저가 아니라 순종이 먼저이다. 두 번째로 내 삶에서도 오늘 말씀과 약속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외의 것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쫓고 있는가? 말씀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 원한다. 태국 성경을 계속 보고 있다. 지금 마태복음을 절반 정도 읽은 것 같다. 읽으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기 보다는 공부의 대상으로 여기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오늘은 이것을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진짜 말씀으로 대하는 은혜가 있기 원한다. 

오늘을 주님께 의탁드리며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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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Photo Essay2018. 11. 1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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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면 하루종일 피곤하지만… 

새벽에만 허락된 풍경#Earlybird

#sunrise #Bangkok #Thailand

#beautifulscenery #birds

#24-70mm #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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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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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40-51 묻는 은혜, 동행하는 은혜

어느 순간 묵상을 하면서 '~을 위하여'라는 단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삶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그 헛된 포장이 많아서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오늘 솔로몬은 드디어 성전 기구들을 죄다 완성해서 옮겼다. 다 좋았는데, 51절을 읽는데 이 단어가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솔로몬은 이 성전의 모든 내용들을 여호와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고, 성전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성전의 설계와 내용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막은 모세에게 어떻게 만들라고 하나님이 모조리 지시하셨고, 모세는 거기에 순종했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어떤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솔로몬의 지혜대로, 솔로몬의 생각대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이 불편함… 하지만 많은 순간 내 삶도 ‘주를 위해’라는 타이틀을 걸어놓고, 내 맘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지으시는데 간섭하지 않으셨을까?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주신 그 지혜 안에서 알아서 하라는 자유의지의 표현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 같다. 다윗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있었다. 솔로몬의 인생은 묻는 은혜가 없다. 묻지 않고 자의적으로 한다. 자의적으로 하니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위해’라고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물어야, 여쭤보고 들어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 학생 때 가장 싫어했던 표현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라는 표현이었다. 이것만큼 내 중심적인 표현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무엇이길래 주님의 영광이 나한테 달려 있는가? 우리는 그 분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충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공부한다’가 더 적절해 보인다. 

오늘도 내 삶에 무엇인가를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잘못된 비복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영역이 없는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지 말자. 은혜로 구원받았고, 내가 내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그런 생각도 버려야 한다. 내가 오늘 붙잡아야 할 것은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묻는 은혜가 오늘도 내 삶에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물어야 산다. 물어야 듣는다. 물어야 순종한다.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 섬길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오늘도 묻는 은혜, 함께하는 은혜가 충만하게 내 삶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제발 좀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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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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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13-26 무엇이 더 중한디? 

이야기는 다시 성전건축으로 돌아간다. 이 성전 건축의 책임을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인 두로사람 히람이 맡게 된다. 그런데 그의 이력은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납달리 지파의 이스라엘 여인이었다. 즉 이방인과 혼인한 이스라엘 여자의 아들이었다. 태생적으로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솔로몬은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이 모든 공사를 맡긴다. 솔로몬은 더 중요한 성전 공사를 위해서 덜 중요한 출신이나 신분을 고려하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아는 것이 지혜이다. 살아가다 보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에 목숨 걸 때가 더 많음을 느낀다. 아내랑도 다툴 때 보면 중요한 일에서 기분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투나 태도로 기분이 더 상해서 무엇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를 잊어버리기 일수이다. 태국어를 공부하고, 우리 형제들을 만나면서도 가끔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왜 지금 태국, 방콕에 있는지, 지금 그들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너무도 많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잊어버리고 나면 가야할 길도 잃어버리게 된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어디를 먼저 가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도 잃어 버린다. 그래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악순환은 반복되게 된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우선순위를 세우기 원한다. 요즈음 우선순위 없이 닥치는데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다시 한번 내 삶을 돌아보고, 복음을 위한 삶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점검하자.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말자.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귀한 하루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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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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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7:1-12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을 높인 솔로몬

하나님의 성전은 7년, 솔로몬의 왕국은 13년
지은 방식은 여호와의 성전 건축 방식을 따라서…

솔로몬은 뭐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성전 건축일까? 자신의 왕국 안에 하나님을 집어 넣고 싶었던 것일까? 솔로몬의 성전건축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도 굳이 칭찬하지 않으신다. 그의 성전은 지나치게 화려했고, 12절 마지막을 보면 '마치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 같더라…’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여호와의 성전 안에 넣은 것들이 그의 궁 안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같은 방식 (하나님의 성전 건축)으로 자신을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백향목 궁에 살면서 하나님의 전이 휘장에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성전을 짓기로 했는데 (삼하 7:2), 솔로몬은 이미 있는 다윗 왕궁을 두고, 다시 13년에 걸려서 더 화려한 자신의 왕궁을 지은 것이다. 

솔로몬의 모습은 내가 드러나야 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은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같은데 결국은 자신이 드러난다. 교묘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아내와 어떤 일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다. 그러다가 아내와 서로 좀 맘이 상했다. 아내가 내 마음을 잘 이해를 못해주는 것 같아서였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솔로몬과 비슷한 마음이 내 안에 은밀하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에 대해서 내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고, 위해주는 것 같고, 걱정하는 것 같이 말하지만 혹시 이 것이 내 의를,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100% 악한 마음은 분명히 아니지만 내 안에 이러한 마음이 없는 완전한 순수한 동기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말하던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일에 대해서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말씀을 대하면서 알게되었다). 나는 좀 더 알고, 나는 좀 더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을 위하는 척 성전을 짓고, 그 이후에 자신의 성전은 두배의 시간과 두배 이상의 크기로 화려하게 지어버리는 것 처럼 말이다. 결국 내가 드러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일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었다. 말씀에 나를 비춰보아야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아는 것 같다. 좀 마음이 어렵다. 내 마음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게… 하지만 뭐 사실 부끄러운 일이 이것 뿐이겠는가? 내가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께서만 드러나시는 세례요한의 삶의 태도가 내 안에 있어야겠다. 솔로몬의 실패를 거울 삼고, 오늘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가, 그리고 오늘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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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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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6:14-38 허세의 금칠을 벗어 버리자. 

성전의 외부를 먼저 짓고, 내부를 지었던 것 같다. 성전의 내부는 너무 아름답게 설계하고, 귀중함을 표시하기 위해 아마도 금칠을 한 것 같다. 금을 여기, 저기 입혔다. 짧게 이야기 하면 솔로몬의 하나님의 경외함의 표현일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부의 자랑? 일 수도 있겠다. 솔로몬이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정확히 분간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경외함의 표현이라 보고 싶다. 

아마도 안에서 보면 번쩍 번쩍 했으리라… 금을 입혔으니까… 무엇인가를 입혀 놓으면 겉에 입혀 놓은 것만 보이고 그 속에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성전을 보면서 ‘회칠한 무덤’이란 단어가 떠 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금을 입혀 놓은 듯 한 내 모습 때문이리라.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썩어가는 그러한 삶… 마치 이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번쩍이게 금을 입혀 놓았지만, 결국 이 성전은 하나님이 경외함이 아니라 그들의 욕심 때문에 무너지게 되는 역사를 알기 때문이라. 

좋은 의도로 했지만 그 좋은 의도가 오래가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의 죄, 가식이 떠올랐다. 오늘 성전에 입히고 있는 금처럼 나도 내 얼굴에 내 삶에 금칠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솔직하게 겸손하게 연약함을 드러내고, 혹은 연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내가 이렇게 잘 해나가고 있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기도를 부탁하기 보다는 조금 더 좋게 보이고, 조금 더 있어 보이게, 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된다. 금칠을 하는 이유는 ‘체면’ 혹은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인데, 한국 사람으로써 나는 내 맘 속에 저 두가지 마음이 모두 가득하다. 

얼굴에, 삶에 금칠을 떼버리고 싶다. 그리고 단순하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싶다. 성전보다 크신 그 분 앞에 서기 원한다. 성전보다 더 크신 그 분은 흠모할 모습이 아니라 이 땅에서 가장 낮은 곳,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다. 나 또한 금딱지, 체면, 가식, 벗어 버리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서는 하루.. 그런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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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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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6:1-13 ‘주를 위해’의 삶이 아니라 ‘주로 인해,’ ‘주와 함께’의 삶

엄청난 규모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몇 규빗, 몇 규빗, 다락방, 골방… 머리가 나빠서인지 이 내용으로 건물이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와 화려한 성전임에 틀림없다. 건축하는 그 누구나 여호와의 전을 만든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흥분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성전에 속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다시 한번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11-13절).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성전을 짓는데도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일들이 사실 많이 있다. 뭔가 주를 위해 하고 있는 일 같은데, 그 일 중에서 오히려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들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시간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과 예수를 전하는 것인데, 이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한다는 부담감들이 오히려 묵상의 시간을 짧게 만들고, 하나님 안에 충분히 거할 친밀함들의 시간들을 막고 있는 것 같다. 늘 바쁘게 살아왔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간을 잘 써서 이 모든 일을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지가 늘 나에게 부담이었고, 그래서 늘 효율성을 추구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 주님과의 충분한 교제를 누리기 보다는 묵상 빨리 하고 다른거, 성경 빨리 읽고 다른거 하자라는 생각과 부담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도 말이다. 

성전이 중요한게 아니다.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다. 성전의 화려함이 아니라 성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주를 위해’라는 말이 무색하다. ‘주를 위해’의 삶이 아니라 ‘주로 인해,’ ‘주와 함께’의 삶이 되어야 한다. 효율성을 따지다 보니 늘 입으로는 ‘주를 위해’의 삶을 외치지만 진정 나의 삶은 ‘주와 함께’의 삶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성전이 아니다. 오히려 성전보다 더 크신 이, 예수를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마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오늘 나의 삶에서 정말 ‘주와 함께’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한다. 바쁨보다, 해야 할 것 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 원한다. 성전이 아니라 성전보다 더 크신 이를 바라보는 하루가 되자. 
I will run to You, to the Words of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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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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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5:1-18 성전건축의 모든 시작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솔로몬의 성전은 가장 귀한 나무인 백향목으로 지어진다. 이스라엘에는 백향목이 없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 백향목으로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해서 이웃나라 두로에서 나무를 공수해 온다.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공수해오며 (10절), 매우 지혜롭게 이 일들을 감당한다.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리려고 하는 그 마음이 보여진다. 사실 이 마음은 다윗에게서 시작된 마음이다. 삼하 7:2에서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다윗은 온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자신보다 더 초라한 곳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이러한 마음에서 시작된 성전 건축이 이제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가장 귀한 나무인 백향목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하나님께 받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법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다윗의 성전 건축 정신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그대로 보여진다. 다윗의 소원을 하나님이 거절 하신 이후에 자신의 아들로 이 성전을 짓게 하신다는 말씀 (삼하 7:13)을 받고나서 얼마나 열심히 아들에게 이것에 대해서 가르쳤을까? 그리고 그 돌들과 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준비해 뒀던가? 결국은 솔로몬이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왜 이 성전을 세워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 성전을 세워야 하는지를 배운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말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고 들었다. 천 마디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이고, 내 행동이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제자들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내 입으로 백번 말하는 것 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내 삶에서 한 번이라도 보여지는 것이 더 그들이 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그러한 삶을 보여줬고, 솔로몬은 그것을 배웠다. 그의 준비는 따라서 철저할 수 밖에 없었다. 솔로몬의 성전건축에 대한 준비(물질적, 정신적)는 사실 다윗의 삶과 그의 정신으로부터 다 시작된 것이다. 

나는 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삶을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두렵고 떨리는 질문이다. 내 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이 풍성한 삶을 배우고 있는가? 우리 태국 형제, 자매들은 내 삶을 통해서 그러한 풍성한 삶을 맛보고 있는가? 결국은 내가 먼저 그러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 '말 뿐인 복음’이 되고 만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은 입술로만, 머리로만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분명 아니다. 그런데 내가 전하고자 하는 삶을 내가 먼저 살아내지 못하면 나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 두려워지는 오늘 말씀이다. 

조금 더 내 삶을 점검하기 원한다.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가? 내가 정말로 그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복음의 정신과 복음의 삶이 더 내 삶 가운데 전부가 되기 원한다. 복음으로 내 삶이 진심으로 거듭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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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Thinking)/Photo Essay2018. 11. 1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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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마라는 사실 별로 근심이 없다. 고민할 것도, 특별한 힘든 것도 없다.

좀 더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게 유일한 근심이랄까? 바람이라까?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이런 것일까?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가 예수와 동행하기 때문에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삶이 아닐까? 오늘도 많이 웃기 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웃게 해주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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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