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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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4:20-34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듣는 마음’보다 낫다

솔로몬은 지혜를 얻었고, 그의 지혜와 명성은 높아졌다 (26-34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지혜를 구하러 올 정도였다. 그는 부도 얻었다. 하루에 먹는 음식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22-23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계속 불안한 암시들을 보내고 있다. 그의 왕국은 번영했지만 21절 후반부를 보면 '솔로몬이 사는 동안’ 이었다. 그의 왕국에는 평안이 있었지만 25절 초반부에 ‘솔로몬이 사는 동안’이었다. 제한적이고, 유한한 번영과 평화였다. 

그 이유는 30절, 34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의 지혜를’ 이제 주어가 솔로몬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이고, 그는 그 지혜를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그 자신의 지혜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6절을 보면 그는 이제 자신이 가진 군사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어제 본문에서 그는 분명히 우선순위가 예배, 말씀, 그리고 군대였는데, 이제 그는 그가 가진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다. 

너무 잘 나가고 있어서 연약함이 부족함이 보이지 않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가 가진 부와 명예가 군사력을 의지하는 그의 마음을 가리게 한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그는 조금씩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의지하고 있나보다. 교만함이다. 하나님보다 내가 가진 것들이 우선되는 것, 하나님보다 내 자신을 의지하는 것 바로 교만이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신다 (29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다윗과 다르게 솔로몬은 그 번영함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 버린다. 애굽 공주와 결혼을 통해서 나라를 강하게 하려고 하고, 군대의 힘을 자랑하며, 자신의 지혜로 명성을 얻는다. 대신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이었다. 그의 뒤로 이스라엘은 분열되고, 망가지며, 우상숭배를 시작한다. 

다윗이 가졌던 하나님께 '묻는 지혜'가 솔로몬이 가졌던 '듣는 마음’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물어야 한다. 물어야 안 망한다. 물어야 다음세대까지 살아남는다. 물어야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결정자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물어야 들을 수 있다. 오늘도 주님게 묻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사는 하루가 아니라 겸손하게 묻기 원한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물을 수 있는 것이 지혜이다. 

오늘도 묻자. 묻고 듣고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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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1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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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4:1-19 삶의 우선순위 셋팅하기 

오늘 본문은 잘 조직된 솔로몬의 이스라엘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1절에서 그가 왕이 되었고, 2절부터 그의 중앙정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2절은 제사장, 3장은 서기관, 4절은 군사령관, 5절은 지방 관장, 6절은 노동 감독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솔로몬의 관심이 예배, 말씀, 그리고 그 이후가 군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군대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당연히 가장 중요하게 여겨도 충분할 수 있었지만,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다. 첫째는 예배, 둘째는 말씀.. 그의 우선순위를 보며 이스라엘이 어떠한 나라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이시고, 그 분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때에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군사력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 보다도 먼저 예배와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살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군사력을 믿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가 가진 은사들, 재정, 계획, 힘을 믿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가진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가진 것이 손 안에 있을 때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솔로몬은 다 가졌는데,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들을 의지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손에 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있어 봤자 얼마나 있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나를 도울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 있는가? 모든 대답은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군사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내 삶을 다시 세팅해야 한다.

아웃리치가 끝나고 돌아왔다. 많이 보고, 듣고, 배웠다.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다시 원래대로 자리 잡도록 세팅하는 것일 것이다.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힘을 공급받고, 내 힘과 계획을 의지하지 않도록 내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오늘도 말씀만 붙들자.

아웃리치 기간동안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다녀왔고,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왔습니다. 매우 좋은 시간이었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도 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웃리치 관련해서는 한번 정리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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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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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3:1-15 종교놀이 그만, 삶의 예배 시작

솔로몬은 1절에서 애굽왕 바로의 딸과 혼인을 한다. 나라의 유익을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는 3절에서 보면 여전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대로 행하는 자였다. 하지만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다.’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봐왔다면 산당에서 제사하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봐왔다면 바로의 딸과 결혼하지 않았으리라. 이 둘은 모두 솔로몬의 연약함이었고, 어쩌면 작은 타협이었다. 그가 옳다고 믿는대로 행동하고 원하는대로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예배에 관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잘 몰랐을 뿐이다. 모르는 것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상반부)'. 하지만 이 잘 모르는 행동을 통해서 그는 문제의 씨앗들을 남겼다. 훗날 이 것들은 우상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끄는 시작점이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어떤 예배의 순서나 절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의 예배이고, 삶의 예배 (롬12:1-3)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올려 드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져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의 종교놀이를 그만두고 진짜 삶의 예배가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종교놀이를 뒤엎으셨다. 그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셨다. 결국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 

나의 삶도 종교놀이를 하던 이스라엘의 리더쉽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를 빙자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한 심령의 예배와 삶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수요예배, 주일예배로 퉁 치려고 하는건 아닌지? 물론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신다.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처럼… 솔로몬이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돌보신다. 하지만 다윗이 세웠던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인 이스라엘은 그렇게 조금씩 넘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 

삶의 예배가 오늘도 드려지기 원한다. 순간 순간 내 영혼을 깨우기 원한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매 순간 좌절하지만 또 다시 일어서기 원한다. 오늘은 지역교회에서 아이들을 모아서 함께 놀이하고 예배 드리는 마지막 날이다. 더 깊은 삶의 예배, 아이들을 향한 중보, 그들을 향한 섬김이 내 안에서 나타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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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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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36-46 ‘익숙해져버림’이 가져온 죽음을 넘어서자

예루살렘에서는 집을 짓고 살아도 되지만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 이것이 솔로몬의 시므이를 향한 명령이었다. 그에게 구역을 정해주고, 이 선을 넘어가면 죽는다고 말한 것이다. 시므이도 당장 죽지 않아도 되니 ‘이 말씀이 좋사오니’ 라고(38절) 대답했고, 실제로 시므이가 3년을 지켰다. 하지만 자신의 종이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시므이는 이 명령을 잊어버리고 예루살렘 밖으로 그들을 잡으러 쫓아갔다. 솔로몬의 말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잊어 버렸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간 것은 결국 솔로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시므이는 결국 죽게 된다. 시므이를 죽게 한 것은 3년의 시간으로 인한 ‘익숙해져버림’ 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그 마음은 식어 버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 (도망간 종을 잡아오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기도가 익숙해지고, 예배가 익숙해지고, 말씀이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덜 중요한 것이 전부인 것 처럼 되어 버린다. 시므이를 죽게 한 ‘익숙해져버림’이 나도 죽게 한다.

북부 치앙마이에서도 차로 2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카렌족 마을로 왔다. 오늘 오후는 매해라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 그리스도인들,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서 그 ‘익숙해져버림’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무엇을 하든 행복해 보인다. 너무 추운날씨(태국에서 12도 ㅜㅜ)로 인한 어려움도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이 속에서 예수가 너무 익숙한 사람은 ‘나 한사람’ 밖에 없는 것 같다. ‘익숙해져버림’을 ‘신선한, 새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채우고 싶다. 

언어의 답답함을 느낀다.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언어의 한계가 너무 답답하다. 이 한계가 나에게 ‘익숙해져버림’을 깨고 ‘신선함, 새로움’으로 나를 채우기 원한다. 오늘도 매해라는 곳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기대된다. 그리고 예전에 양육했던 ‘위라시니’ 자매와 ‘렛’ 형제를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이것 또한 너무 기대된다. 예수 안에서의 새로움, 신선함으로 새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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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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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26-35 현실의 유력함 (두려움)을 붙잡은 자들의 최후

왕상 1장에서 시작된 반역이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반역에 가담했던 세 사람이 모두 마지막을 맞게 된다. 
아도니야는 그 마지막이 어떠한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아비아달은 파면되었고, 요압은 성소에서 죽게 되었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들이다. 요압은 이미 많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렸던 장군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댓가를 분명히 치뤄야 하는 존재들이다. 

새로 임명받은 군대장관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은 왕상 1장에서 유력해 보이는 왕자에게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 순간에 더디어 보이고, 유력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 사람들이었다. 다윗의 대는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이 잇게 된다는 것을 정말로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 같은 그 순간까지도 믿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이제 영광의 관이 씌워진다. 이들은 현실이 아니라 약속을,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나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쫓아가고 있는가? 
반짝이고 빛나는 유력해 보이는 것들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약속보다는 현실을,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유력해 보이는 상황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약속을 붙들고 광야와 같은 메마른 땅을 걸어가기 보다는 순간 좋아보이는 것을 붙들고 좋은 길을 가려는 자는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내 안에 그러한 욕심들이 있다.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들에 자주 휩싸인다. 어제는 내 안에 아도니야를 봤다면 오늘은 내 안에 아비아달과 요압을 보게 된다. 

현실아 아니라, 유력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약속과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길이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길이다. 
아비아달과 같이 요압과 같이, 그리고 아도니야와 같이 살지 말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그러한 내 안에 두려움을 해결하자. 두려움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자. 그래야만 아비아달, 요압, 아도니야와 같지 않을 수 있다. 결국은 믿음 싸움이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는 치앙마이 매해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간다. 이 시간들을 통해서 내 안에 약속과 하나님이 더 선명해지길 구해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주님 손 붙들고 같이 가면 되는 것이다. 두려워 말자. 두려워 하여 조급한 것을 붙들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약속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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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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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3-25 내 안에 있는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자신의 입으로 아우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진정한 그의 고백은 아니었다. 그는 다윗을 섬겼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한다. 이것은 둘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했던 것과 유사하게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정통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잔머리를 굴린 사건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았던 요구 속에 그의 욕망과 욕심이 꿈틀거린다.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일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돌이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심히 큰 교만이다. 그 교만한 자의 마지막은 죽음 밖에 남지 않았다 (23절). 솔로몬이 주일 본문에서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 그의 교만한 모습을 보며 나에게도 동일한 교만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역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내 생각을 더하고, 얼마나 많은 내 계략과 내 의견, 내 마음, 등등의 것들을 더하고 있는가?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처럼 붙잡고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도 아도니야처럼 간교한 모습으로.. 아닌 척 하면서..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로 말이다. 

언어 공부를 하면서도 내 안에 계속 꿈틀거리는 욕망들이 있다. 팀 켈러의 복음을 공부하면서 머리로는 복음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삶에서는 복음이 아니라 나의 공로를 의지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내가 이런 부분에서 이렇게 헌신 하니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가, 내가, 내가.. 아도니야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내 안에 아도니아가 있다. 복음이 아니라 공로로, 내 행위를, 내 생각을 의지하는 내가 내 안에 있다. 더욱 더 복음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다.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불러 주셨고,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한 걸음도 내 딛을 수 없는 나를 선교사로 이 태국 땅까지 보내셨다. 더욱 더 복음 위에 서기 원한다. 내 존재와 내 세계관이 여전히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생각으로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내가 그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기를 원한다. 

어제 읽었던 팀 켈러의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 에서 두 구절 함께 나눕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기를 구원은 복음으로 받지만 성장하려면 성경 원리들을 삶 전반에 적용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 받을 뿐 아니라 복음을 삶 전반에 적용하여 성장한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지 못함은 단지 의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더 열심히 해서는 이런 실패를 해결할 수 없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은 어차피 자력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결심에 불과하다. 그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게 있다. 모든 불순종의 뿌리는 행위를 통한 의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우리의 고질적 습성에 있다.”

내 안에 아도나아를 뿌리뽑기 원한다. 교묘하게 복음이 아닌 것들로 내 삶을 채우려고 하는 시도들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만이 내 삶에 나타나기 원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나는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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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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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2:1-12 ‘Be strong, and be courageous’

우리 모두는 누구나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2절). 다윗이 마지막 그의 걸음을 정리하면서 하는 유언이 오늘 본문이다. 유언은 아마도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전하게 되는 그 무엇인가일 것이다. 유언을 통해서 그 사람이 남기고 싶어 하는 가치,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의 유언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라고 유언하였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잘못한 사람에게 갚을 것은 갚고 (5-6절), 그간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것을 갚으라는 (7-12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오늘 본문에 나온 것 처럼 ‘힘써 대장부가 되고’ (2절 후반부) 로 표현할 수 있겠다. NRSV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Be strong, and be courageous’ 로 번역하고 있다. 단순히 남자에게 명한 말씀이 아니라 용기있게 행동하라는 관용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것은 진정으로 멋진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면, 우리가 그의 말씀을 붙들고, 그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용기있게 말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나 정의롭지 못함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그것이 내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로 순종하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정의롭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자꾸만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 개인 신앙으로 축소시키려고 한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그 곳의 불의와 문제들도 함께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돌아봐야 할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불의들은 무엇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섬기고,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복음만 선포하고, 복음 공동체를 만든다면 그 다음에는? 미리 관심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자. 정말로 내가 먼저 말씀 안에서 ‘Be strong, and be courageous’ 해야 하고, 그리고 주변을 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겠다. 고아와 과부, 미혼모, 성적혼란이 있는.. 성전환자들, 가난한 자들.. 주님이 나에게 어떠한 부분을 더 보게 해주시는지 기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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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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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40-53 그들은 (우리는) 각기 갈 길로 갔지만...

아도니야의 계략이 실패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약속하신 메시아를 오게 하는 방법으로 가고 있다. 자신이 잘 나가고 있고, 이제 곧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도니야는 아주 큰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이제 잔치를 통해서 자신의 왕위 등극을 밝힐 참이었다. 얄굳게도 식사가 마쳐가는 시간이 될 때 이 환호성을 들었고 (41절), 그 모든 소식을 들은 그들은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길로 갔다 (49절). 

그들의 시작은 화려해보였다. 많은 사람들을 따돌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유력한 자들인지를 보여주며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따라 움직이는 그 길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주와 같이 가는 길이 아니면 그 길은 주의 길이 아니다. 주의 길을 걷지 않는 그 마지막은 자신의 욕심을 따라 각기 제 갈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결국 그 마지막은 망하는 길이고, 넘어지는 길이고, 죽음의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 그 모든 순간의 마지막은 이와 같다. 우리가 아도니야와 같지 않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는가? 늘 하나님 핑계를 대면서도 하나님과 같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이다. 하지만 늘 이렇게 각기 제 길로 가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살려 주셨다. 그 방법은 이사야서 53:6절의 후반부에서 말씀하시는 것 처럼 우리 모두의 그런 죄악들을 그(예수)에게 담당시키신 것이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그에게 악한 것이 보인다면 죽을 것이라고 했다 (52절). 행위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행위로 판단하면 다 죽을 목숨이다. 그 누가 살아남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 우리가 할 것은 그 분의 이름을 믿는 것, 그 분을 우리의 구주, 구세주로 받아 들이는 것 뿐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을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복음으로 살아내는 삶이다. 

오늘 영광교회 팀이 치앙마이 북부 매해쪽으로 선교를 떠났다. 나는 수요일에 조금 늦게 합류하게 된다. 우리가 가서 전할 것은 바로 이 복음이다. 나를 살려주신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정확하게 전하기 원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믿게 되길 원한다. 그리고 나도 아도니야와 같은 나를 살려주신 그 값없는 복음을 더 복음을 정확하게 깨닫고, 복음으로 더 살아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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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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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28-39 '내가 노래 하듯이 또 내가 얘기 하듯이 살길…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이제 다윗은 그가 이전에 말한대로 솔로몬은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 그 근거는 다윗이 이전에 밧세바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29절) 한 것이다. 그는 그가 말했던 것을 그의 삶에서 실천한 사람이었다. 30절에서 ‘내가…. (말)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라고 이야기 한다. 말이 삶이 되는 삶을 살았다. 다윗은 참 그의 삶에 밧세바라는 오점이 있었지만 (물론 다른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참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말하는대로 살았다. 

자신의 말하는대로 살았던 한 사람 다윗이 있었다면 기록된대로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 분 자체가 말씀이셨고, 그 분은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그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그 자체셨고,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말씀의 성취였고,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셨다. 

자신의 말의 약속을 지키는 다윗, 자신의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서 지키신 하나님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서 그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어제 하루가 참으로 부끄럽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특별히 요엘이 때문에 아내와 우리 부부가 먼저 서로에게 작은 소리로 대화하고, 큰 소리를 내지 않기로 4시 정도에 이야기 했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 7시 정도에 (내 기준으로는 많이 참았다고 생각한다) 계속 참다가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요엘이가 너무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그걸 못 참고 화가 터져나왔고, 요엘이에게 큰 소리를 치며 화를 쏟아내었다. 그 몇 분이 지나고 나니 너무 속이 상하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볼 낯도 없고, 또한 내 마음도 풀리지 않아서 바로 잠을 청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요엘이에게 사과를 했다. 어제 일에 대한 마무리는 되었지만 내 마음은 아직 여전히 갈등중이다. 

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내 기준으로는 많이 참았다고 생각하지만 말씀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마18:21-22) 하셨다. 결국 나와의 약속도, 말씀도 내 삶에서 담아내지 못한 것이다. 최근 내 삶이 사춘기 소년 같단 생각이 든다. 뭔가 옹졸하고, 뭔가 업다운이 심하고, 생각도 많고… 다시 말씀 앞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아침에 잠시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루종일 이 말씀과 더불어 살아내고, 계속해서 묵상하고, 고민해야 하는데.. 너무 아침에 묵상하고, 땡 해버리는 느낌이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대로 살았다. 예수님도 그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성취하셨다. 나도 오늘 내 삶에서 작은 것이라도 순종하며 실천하기 원한다. 
소원의 한 가사가 떠 오른다. '내가 노래 하듯이 또 내가 얘기 하듯이 살길…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이게 다윗의 삶이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삶이었을 것이고, 나의 삶이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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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1. 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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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11-27 새롭게 부여된 이름 ‘하나님의 자녀'

오늘 본문은 나단과 밧세바가 약속대로 솔로몬을 왕위에 앉게 하기 위한 전략과 급함들이 엿보인다. 그런데 본문과 크게 상관없이 11절 첫 부분에서 밧세바를 부르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내가 몇일전에 마태복음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복음 1:6에서는 밧세바를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저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11:3에서도 그녀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고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사무엘하 11장에서 계속해서 우리아의 아내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녀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라고 불리운다. 

그녀는 이스라엘 안에 살고 있는 헷 (히타이트) 사람의 아내였고, 본인도 헷 족속이었다. 이방인이었다. 밧세바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상 1장 이후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왕과의 간음이라는 죄를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 안으로 편입되게 되었다. 그녀의 죄는 매우 악했지만 그러한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녀가 예수님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녀의 이름으로, 또한 왕이 될 솔로몬의 어머니로 불리우게 된다. 그리고 이제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솔로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나단과 함께 고군분투 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통해서도 그 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 역시 이방인에서, 이름없는 무명한자에서 아들로, 유명한 자로 불러 주셨다 고후 6:8-10절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밧세바의 인생은 달라졌다. 이전에 누구의 아내로 불렸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를 죄에서, 저주에서, 이름 없음에서, 죽을 자에서 우리를 살려내신게 복음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다시 누구의 아내로, 혹은 이름 없음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나를 불러주신 주님 앞에,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부여하신 이름 ‘하나님의 자녀’ (요1:12) 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족보를 갈아탔다. 밧세바와 같이 더 이상 이방의 족보가 아니라 왕의 족보로 편입되었다. 왕의 자녀 답게 사는 하루가 되자.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들을 살리고, 섬기는 왕의 자녀 말이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살자. 오늘을 사랑하자. 오늘 만날 사람들을, 오늘 함께 할 사람들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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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