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2:14-21 ‘자기애'를 넘어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로
1. 오늘 본문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예수를 죽이는 죽이려는 자들, 즉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4절) 이들은 받은 사랑과 상관없이 다른 이를 죽이려고 한다.
2. 두 번째는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온유하고 모든 이들을 품으시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놓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설명이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18절 상반부)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9-20절).
3.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의 행동의 결과가 왜 이리 다른가? 아마도 그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의 차이일 것이다.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의 의미와 그 사랑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자기 안에만 머무는 사람과 (바리새인들) 자신이 받은 사랑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 사랑이 흘러가는 사람의 차이이다.
4. 물이 한 곳에 머물면 썩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 안에만 머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썩어버린다. 받은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 흘러갈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예수께 분노하였는가?
5.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의 기득권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자기애’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7. 우리의 사랑은 ‘자기애’를 넘어서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쉽고 때로는 교묘하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애로 인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8. 자기애와 이웃사랑이 같으려면 결국은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내가 사랑 받을 자격이 없었던 사람이었음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죄인으로서의 자각이 크면 클 수록 은혜도 큰 법이다.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나를 사랑해주셔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내가 받은 그 큰 사랑은 나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을 향해 흘러가야만 한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사랑받았지만 ‘자기애’를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려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받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위해 사랑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원한다.
9.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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