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Thinking)/Meditation2019. 4. 2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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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9:49-72 내가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도를 멈추라

 

시인은 고난을 당한 것 같다. 그래서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오히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셨는데, 시인은 그 말씀을 자신에게 기억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자신의 해야 할 책임을 왜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일까?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어제 묵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그 위로의 말씀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50절) 자신의 그 위로의 말씀을 붙들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답답한 지금의 고난과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고, 주님 앞에 그 연약함까지도 내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위로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자신을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한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기억하게만 해주시면 제가 할 수 있습니다'의 고백이다. 반면에 '주님 주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의 기도는 '제가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말씀하신 일을 저의 삶에 이루어주소서'의 기도이다. 나는 어떤 타입의 사람인가? 

 

종종 자신감에 차서 시인의 기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 같다. 나에 대한 과도한 신뢰이고, 말도 안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여태 많은 실패들을 해 온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은 나의 기도가 변하기 원한다. 나에 대한 조금의 신뢰나 자신도 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전부 이시다.

 

결국 Not I but Christ의 진리인 것이다. 나는 못한다고 기도해야 한다. 나는 안된다고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일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나의 기도가 변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조금이라도 내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헛된 망상을 버리고 오직 주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Not I but Christ 구호 뿐만 아니라 삶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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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10. 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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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3:1-18 NIBC, Not I but Christ

우리의 삶은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막막한 순간에 마주치게 된다. 오늘 시인의 모습이 그렇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해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점이다. 18절에는 그래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시를 읽고 있는데도 답답한데 실제로 이 상황 속에 있어야만 했고, 이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힘이 들었을까? 심지어 그는 1-6절에서 이 상황이 그에게 전적으로 닥친 고난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의견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레미야로 볼 경우 그가 얼마나 많은 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가? ‘눈물의 선지자’가 그의 별명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닥친 재앙을 그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예레미야가 정말 무엇을 잘못 했는가? 잘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지 않았는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늘 본문의 저자는 그 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이 받고 있음을, 그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자신’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1절). 

18절의 그가 고백한 그의 상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외쳤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매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잘못 한 것이 없는데도, 묵묵히 이 상황을 받아내고, 감내해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인 것이다. 복음이란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그리스도께도 좋은 소식인가? 아니었다. 그 분께는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 되는 고난이고 고통이었다. 그럼 누구에게 좋은 소식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다. 

오늘 시인의 저자가 자신에게 그 모든 고난을 돌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는 ‘기쁜 소식(복음)'을 향한 부족한 표현이다. 물론 이것을 완성시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오늘 시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였다.  

그렇다면 선교사에게, 리더에게 복음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복음이란 어쩌면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과 같은 고난의 시간이고, 해산의 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도 복음을 먼저 거져 받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용서받았고, 용납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가신 것과 같이 그 고통을 감내하고, 억울함을 감내하고, 그들을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억울함을 수없이 만나게 되고, 내가 무슨 낙을 보려고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수 없이 고민해야 되고, 손해봐야 하며, 때로는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태국 사람들의 속이 보이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묵상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이렇게 글로 쓰는 것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쉽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는 것이다. 소리 지르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져야만 이기는 싸움에 참여한 이상한 왕을 쫓아가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인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내 힘으로 살지 않기를,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말이다. 
롬 8: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도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골 3:1-2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희생과 자기부인이다. 져야만 이기는 이 싸움에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오늘도 겸손하게 이 길을 걸어가기 원한다. 
결국은 NIBC이다. Not I but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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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생각(Thinking)/Meditation2018. 8. 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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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0:1-17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만 의지합니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날을 세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강건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티끌같고 한날의 흔적같은 우리의 인생을 영원하신 주님께서 불러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로 와서 결국 주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우리의 끝이 반드시 존재하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움켜쥐려고 하며 살지 않아야 한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다. 늘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 삶도, 내 생명도, 내 자녀도, 내 사역도..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다. 모두 다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서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16절에 보면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짧은 우리의 인생에서 결국 우리가 행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영원하고 전능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일하실 통로가 되면 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기쁠 수 있다 (14절)

오늘부터 영어 수업을 시작한다. 나도 잘 못하는 영어를 가르치려니 두려움도 생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내가 하는 모든 일 중에서 내가 잘해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잘해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가? 내가 잘해서 선교사로 나와 있는가? 내가 잘해서 말씀을 전했는가? 내가 잘해서 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잘하지 못해도 맡겨주셨으니 최선을 다해서 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 사역도 아니고, 주님의 사역인데... 어차피 내 아이도 아니고 주님의 아이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순간 치열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주님께 맡겨드리고, 내가 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뒤를 그저 쫓아가는 것이다. 내가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하시기를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모든 영역에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오늘도 그 주님만 바라보고, 그 주님만 의지한다.
오늘도 나는 죽고 예수께서 사시길 원한다. 삶에서, 자녀양육에서, 사역에서,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하여 주님만 내 삶에서 빛나시길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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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애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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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날마다 치열한 전쟁터이다. 바로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는 영적인 전쟁이 더욱 더 치열한 것 같다.
순간 순간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 같다.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관계의 문제, 영적인 무력감 등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내 마음을 흔들려고 하고, 내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치열한 영적인 전쟁을 이기는 방법은..
Not I, but Christ의 삶이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승리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여전히 나는 죽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죽지 못하니까 이 순간순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보다는 치열하게 싸우다가 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지치고, 또 힘이 든다. 
오직 하나님께 나를 드리고, 나를 맡기고, 지금 이 상황들에 대해서 초연하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순간순간에 일희일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그 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미 승리하신 전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가 이루어졌다.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전쟁에서 이기는 비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줘서는 안된다. 
오직 조금도 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이기는 마지막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대적하고, 영적인 세력들에 대해서 어린양의 보혈을 뿌리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결심한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시는 갈2:20절의 말씀이 내 삶에 이뤄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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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태국의 거리는 약 2,600 마일 정도.. (마일리지 적립된 것을 참고..)
시차는 2시간 느리다. (한국이 오후 4시면 태국은 오후 2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리상이나 시차의 차이 이상의 엄청난 세계관과 문화의 차이가 있다.
태국에 들어오기 전에 붙였던 오래 밀린 짐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 처리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계속해서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고... 

무엇인가 하나 처리하기 위해 물어봐도 시간을 지켜서 해주거나 원칙에 입각해서 해주는 것도 없는 것 같다.
'마이 뻰 라이-괜찮아요'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너무 많은 융통성과 유두리가 존재하고 있다.
지치고 지쳐야.. 기다리고 기다려야 겨우 일이 한 가지 처리가 된다.

오늘은 짐 때문에 너무 많이 짜증이 났다.
도대체 이거 하나 처리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지...계속 변경되고 밀리고 또 바뀌고...
세관 통과하는 것도 계속 미뤄지고, 변경되고, 결국은 짐을 다 열어서 일일이 검사하겠다고 한다.
외국인의 짐이라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짜증이 나고, 힘이 들고, 마음이 어렵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이 곳에서 잘 적응하고,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길 원하신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도대체가 이해가 안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들을 사랑하기 원하심을 느낀다. 
나의 태도는 마치 요나가 니느웨가 멸망하는지 보기 위해서 초막을 짓고 머물러 있다가 하나님께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주셨던 박넝쿨을 없애셨을 때 화를 내었던 그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요나의 기준은 니느웨가 멸망해야 마땅했다. 죄가 관영했고, 하나님이 회개를 선포하라고 해서 갔지만 그들이 멸망하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매우 달랐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여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4:10-11 

태국에서 내가 원했던 글로벌 스탠다드 혹은 매너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 땅을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원하시고 축복하기 원하셔서 우리 가정을 보내셨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화가 났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다른 것을 용납하고, 참고, 견디고, 사랑하며 이 땅을, 이 백성을 축복하기 원한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 곳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고 그 분의 섬김을 전하기 원한다.
Not i but CHRIST간도 바로 설 수 없다. 
순간 순간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모든 염려와  문제들을 하나님께 아뢰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을 충분히 경험하고 누리자. 
이 것이 지금 내가 받아야 할 훈련이고,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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